< 936화 7. 거병(擧兵)의 시작 (3) >
* * *
뿍뿍이의 얘기는 이안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뿍…… 이 기분 나쁜 냄새…….”
“응?”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드는……뿍. 이 분위기! 뿌뿍!”
“거부감?”
“주인, 기억 안나냐뿍?”
“뭐가?”
“주인과 내가 고통 받았던…… 사랑의 숲 말이다뿍.”
“……!”
오래 전, 차원의 마도사 그리퍼의 도움으로 가 볼 수 있었던 곳인 히든 필드, 사랑의 숲.
뿍뿍이는 지금 이안이 도착한 이곳이 사랑의 숲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에 뒤늦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이안은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뭔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푸르게 펼쳐진 숲과 파란 하늘 사이.
한편에 그려진 아름다운 무지개와 그 위로 떨어지는 새하얀 햇살을 보며, 이안은 뿍뿍이의 이야기가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진짜 사랑의 숲인가?’
그리고 만약 뿍뿍이의 말처럼 이곳이 사랑의 숲과 같은 곳일 경우.
이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만약 여기가 정말 사랑의 숲과 같은 곳이라면, 어떻게든 이리엘을 찾아야 해. 이리엘이라면 날 도와주겠지.’
사랑의 숲 관리자인 이리엘을 떠올린 이안은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그리퍼만큼이나 오래 알아왔던 친밀도 최상의 NPC였으니 말이었다.
이안의 입장에서는 연고 없는 타지에서 예상치 못한 지인을 만난 기분이랄까.
‘흐흐, 뭔가 잘 풀리는 기분인데?’
하지만 행복 회로를 돌리며 이리엘을 찾으려던 바로 그 순간.
이안은 다시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트로웰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혹시나 그곳에서 ‘숲지기’를 만난다면,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그녀는 자네의 위격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말이야.
‘잠깐, 그런데 트로웰은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만약 이 근원의 숲이 사랑의 숲과 같은 곳이라면, 트로웰이 말한 숲지기는 이리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트로웰의 말대로라면 이리엘이 위험한 존재라는 뜻이었으니, 이안으로서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흐으음…….”
하지만 이안의 고민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트로웰의 경고에 대한 고민은 일단 이리엘을 찾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되었으니 말이다.
‘뭐, 어차피 이리엘을 찾는 것이 아니더라도, 불과 바람의 권능을 찾기 위해 숲을 뒤져 보긴 해야 하니까.’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다시 뿍뿍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랑의 숲과 비슷한 분위기의 맵인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숲의 길까지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뿍뿍아.”
“뿍……?”
“너는 여기가 사랑의 숲이라고 확신하는 거지?”
“그렇다뿍.”
뿍뿍이의 답을 들은 이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이리엘 님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리엘 님이라면…… 그 배려심 부족한 못된 엘프 여자를 말하는 거냐뿍.”
“못되다니……?”
“설마, 주인…… 여자 친구 생겼다고 과거의 치욕을 잊은 거냐뿍!”
“아…….”
“찾고 싶지 않뿍.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나쁜 엘프다뿍.”
뿍뿍이의 분노에 피식 웃어 보인 이안은 일단 녀석을 설득해 보기로 하였다.
뿍뿍이가 뭔가를 찾는 데 도가 튼 것만큼은 이제껏 수 없이 보아 온 팩트였고, 때문에 지금 아쉬운 것은 이안이었으니 말이다.
“뿍뿍이, 너도 곧 연애할 거 아냐?”
“뿍……?”
“예뿍이에게 잘 보이려면, 이리엘 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뿌뿍?”
“이리엘 님이라면 예뿍이의 마음을 얻을 방법도 알고 계실 것 같은데…….”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뿍뿍이는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말이 너무도 그럴싸해 보였으니 말이다.
이어서 고민하는 뿍뿍이를 향해, 이안이 은근슬쩍 양념을 치기 시작하였다.
“뿍뿍아.”
“뿍?”
“멋진 거북이가 되려면, 때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는 거야.”
“머, 멋진 거뿍?”
“그래, 멋진 거북.”
그리고 이안의 말을 들은 뿍뿍이의 두 동공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멋진 거북’이라는 단어가 뿍뿍이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뿌뿍……! 사랑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거냐뿍.”
“예뿍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돈 할 수 있지 않아?”
“그렇뿍. 예뿍이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인 뿍뿍이는 이안의 말에 더욱 몰입한 표정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뿍뿍이를 향해, 이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아 넣었다.
“크, 역시 넌 멋진 거북이야.”
“맞뿍. 난 멋진 거북이다뿍.”
“그러니까 이제 이리엘 님을 찾아보자. 우리가 사랑의 숲에 다시 오게 된 건, 어쩌면 운명일수도 있어.”
“알겠뿍. 나만 믿어라뿍.”
그렇게 이안에게 설득당한 뿍뿍이는 의욕적인 표정이 되어 앞장서기 시작하였고.
그런 뿍뿍이의 뒷모습을 보는 이안의 표정에도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하였다.
‘그래, 뿍뿍이가 이리엘 님만 찾아준다면……! 생각보다 쉽게 퀘스트를 진행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뿍뿍이를 따라 숲길을 걷던 이안은 점점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엇, 저기 사슴이……?”
“뭐야, 저 백마는 레벨이 대체 왜 저래?”
분명 사랑의 숲에서 보았던 몬스터들이 눈앞에 하나둘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 수준은 그때와 너무도 달랐으니 말이었다.
-갈색노루/Lv120(초월)
-적안의 백마/Lv150(초월)
‘사랑의 숲에 있던 동물들은 분명 레벨이 10 정도였는데……. 게다가 초월 레벨도 아니고 그냥 레벨이었고.’
때문에 이안은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랑의 숲에서 170레벨이었던 유니콘이 이곳에 등장하기라도 하면, 초월 300레벨을 뚫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사랑의 숲 동물들은 전부 커플이었는데…… 여기 사슴들은 꼭 그렇진 않잖아?’
하여 이안은 뿍뿍이를 향해, 조심스레 다시 물어보았다.
“뿌, 뿍뿍아.”
“뿍?”
“여기 사랑의 숲 맞아? 좀 이상한데…….”
기분 탓인지 숲속을 거니는 사슴들조차도, 뭔가 근육질로 보이기 시작하는 이안.
하지만 이미 멋진 거북에 꽂힌 뿍뿍이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여긴 사랑의 숲이 맞뿍.”
“그, 그래?”
“지금 거의 다 찾은 것 같으니, 나만 믿고 따라와라뿍.”
“알……겠어.”
해서 이안은 뿍뿍이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숲길을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근육질의 사슴들(?) 정도는 아직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몬스터들이었으니, 조금 더 지켜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20여 분 정도가 더 지났을까?
뭔가를 발견한 이안의 동공이, 다시 크게 확대되었다.
“엇, 저건……?”
지금까지는 뿍뿍이를 따라 움직이면서도 사랑의 숲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었는데.
숲길의 끝에 펼쳐진 거대한 나무를 보자, 잊고 있던 기억이 확 떠오른 것이다.
‘저건 분명, 이리엘 님이 관리하던 세계수야……!’
하여 이안은 기특한 표정으로 뿍뿍이의 뒷모습을 응시하였다.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야 많이 보였지만, 결국 이리엘의 세계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뿍뿍이의 말이 맞았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짜식, 오늘따라 믿음직스럽잖아?’
오늘은 오랜만에 미트볼의 배급량을 두 배로 늘려 주고 싶을 정도!
하지만 이 숲의 반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안이 흐뭇한 표정으로, 뿍뿍이를 향해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기이잉-!
세계수를 향해 걷던 이안과 뿍뿍이의 바로 앞에, 기이한 일렁임과 함께 의문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말이었다.
우우웅-!
게다가 그 그림자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히 이안 일행을 향한 적대감!
그 때문에 이안은 반사적으로 정령 마법을 캐스팅하여, 그림자를 향해 쏘아 보냈다.
일단 상대로부터 적대감이 느껴지는 이상, 먼저 선공을 하는 것이 유리할 테니 말이었다.
“루가릭스, 엘!”
“알겠다, 주인. 소울 스톰!”
“빛의 섬전!”
소환되어 있던 소환수들을 동원해, 순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원거리 공격까지 퍼부은 이안.
콰콰쾅-!
그리고 다음 순간,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더욱 경악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환수 ‘루가릭스’의 마법, ‘소울 스톰’이 발동합니다.
-소환수 ‘엘카릭스’의 마법, ‘빛의 섬전’이 발동합니다.
……중략…….
-숲지기 ‘청랑’의 고유 능력, ‘마력의 방호’가 발동하였습니다.
-강력한 마법력의 방호로 인해, 마법 피해의 위력이 급감합니다.
-숲지기 ‘청랑’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청랑’의 생명력이 21만큼 감소합니다.
-‘청랑’의 생명력이 18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뭐라고……?’
급하게 사용하느라 완벽하게 설계된 공격들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낮은 대미지가 시스템 메시지에 찍혔으니 말이었다.
꿀꺽-!
그 때문에 이안의 등줄기를 타고, 한 방울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자, 비로소 트로웰의 경고가 제대로 체감되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이거 제대로 꼬였는데?’
이안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지금이 어쩌면 이 퀘스트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라고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이라도 저 괴물 같은 존재를 피해 도주를 택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맞상대하여 공략법을 찾아보거나.
이안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저 마력의 방호라는 건 분명 마법 피해만 흡수하는 것 같으니…… 물리 딜로 어떻게든 승부를 내 봐야 하나?’
하지만 이안은 그리 쉽게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었다.
두 가지 선택지 모두 커다란 리스크를 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렇게 공간 이동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녀석을 상대로, 도망간다고 하여 도망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안의 그 고민은 상대에 의해 강제로 결정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잉-!
이안을 향해 다가오는 듯 보였던 그 의문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공간을 격하여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었다.
“허억……!”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 삼켰고, 이어서 그 의문의 존재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길게 늘어진 푸른 머릿결과, 에메랄드빛으로 수놓인 하얀 드레스.
그리고 그 드레스 사이로 튀어나온 신비한 빛깔의 꼬리들까지.
게다가 이리엘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외모를 가진 눈앞의 존재는, 이안조차도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존재였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이안의 정신을 깨운 것은, 이안의 앞에 두둥실 떠오른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이 건방지고 못생긴 인간은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