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5화 7. 거병(擧兵)의 시작 (2) >
* * *
트로웰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하지만 결국 그 내용의 핵심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정령계 깊숙한 곳까지 자리 잡은 기계문명들의 잔재.
이것을 전부 몰아내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령계의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각 사대 속성의 정령들과 NPC들을 모아서…… 전장으로 데려오라는 소리잖아?’
사실 과거에는 정령계의 힘을 전부 모으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대 정령왕들의 의지만 모인다면 그것이 곧 정령계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사대 정령왕들 중 트로웰 혼자만 남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것이 퀘스트가 되어, 이안에게 부여된 것이고 말이다.
“그 ‘권능’이라는 것이 있으면, 해당 속성의 병력은 전부 불러 모을 수 있는 겁니까?”
-거의 그렇다고 보면 되지.
“으음…….”
-권능을 얻었다는 것은 정령왕의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니 말이야.
“정령왕의 자격이라면…….”
트로웰의 말을 들은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는 이미 이해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퀘스트 외적인 콩고물(?)에 관심이 생겼으니 말이었다.
‘그 권능이라는 것을 얻어 오면, 혹시 마그번을 정령왕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걸까?’
정령왕의 대리인이 되어, 해당 속성의 모든 정령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강력한 권능.
그것이 어쩌면 상급 정령을 정령왕으로 진화시키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그 궁금증은 잠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띠링-!
트로웰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고.
-‘정령왕의 대리인’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새롭게 얻은 퀘스트 창이 눈앞에 주르륵 하고 펼쳐졌으니 말이다.
-‘근원의 숲(에픽)(히든)’ 퀘스트를 획득하셨습니다.
‘근원의 숲? 이건 또 뭐지?’
고개를 갸웃한 이안은 일단 하려던 말을 멈추고 퀘스트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령왕 진화에 대한 단서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당장은 이 메인 에픽 퀘스트가 더 중요한 게 맞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느낌상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정령왕 진화에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레 해결될 것 같았다.
이안은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퀘스트 창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근원의 숲 (에픽)(히든)(연계)>
-비터스텔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천상의 숲으로 이어진 길이 존재한다.
‘근원’의 힘이 담겨 있는 고대의 숲이자 ‘정령왕’들이 잉태되는 정령계의 심장과도 같은 곳.
이곳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던 이름 없는 숲이었지만, 정령계의 모든 정령들은 이곳을 ‘근원의 숲’이라고 불러왔다.
……중략……
고대의 전쟁으로 인해 소멸한 불의 정령왕 라그나로스와 바람의 정령왕 에실론. 그들이 소멸하며 남긴 권능이 다시 이 근원의 숲 어딘가로 회수되었다고 한다.
근원의 숲으로 가서 불의 권능과 바람의 권능을 찾고, 그 권능을 이용해 불과 바람의 군대를 전장으로 인도하자.
빠른 시간 안에 불과 바람의 힘을 모아야,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SSSS
-추천 레벨 : ???(초월)
-퀘스트 조건 :‘정령왕 트로웰’과의 친밀도 100 이상, ‘기계대전쟁’ 에피소드 진행
-제한 시간 : 알 수 없음
-보상 : 불의 근원, 바람의 근원
*공유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한 번이라도 실패할 시, 다시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에 실패하더라도, 다음 퀘스트가 자동으로 연계되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이안의 머릿속에, 곧바로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불의 권능과 바람의 권능이라면…… 물의 권능은 근원의 숲에서 얻을 수 없는 건가요?”
분명 트로웰은 나머지 모든 속성의 지원군을 모아 오라 하였는데, 근원의 숲 퀘스트에 명시된 속성은 불과 바람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의 그 의문점은 트로웰의 대화로 금방 풀릴 수 있었다.
-그렇다네. 자네의 말대로, 물의 권능은 근원의 숲에 존재하지 않는다네.
“음……?”
-소멸된 라그나로스, 에실론과 달리, 물의 정령왕 엘리샤는 아직 이계의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아아……!”
이안은 고대 정령왕들의 히스토리에 대해 다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트로웰의 이야기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엘리샤는 찰리스의 마탑에 봉인되어 있으니……. 물의 권능은 그녀가 가지고 있나 보네.’
하지만 이해와 별개로 한 가지 남을 수밖에 없는 궁금증.
이안은 마지막으로 그것을 트로웰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물의 지원군을 전장으로 끌어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흠, 그야 간단하지.
“……?”
-자네가 그들을 직접 찾아가서, 지원 요청을 하면 된다네.
“아…….”
-권능이 없으니 명령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직접 찾아가 부탁한다면 그들 모두 기꺼이 정령계를 위해 힘을 합치겠지.
그리고 트로웰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이제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의 권능과 바람의 권능이 필요한 것은 최대한 빠르게 지원군을 모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권능이 없더라도 일일이 찾아가 각 종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것.
‘대지의 종족들처럼 각 속성의 종족들이 정령계 곳곳에 산재해 있겠지. 그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게 트로웰이 말하는 권능일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향해, 트로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네, 이안. 지금 이 순간에도, 기계 군단의 병력은 모이고 있을 것이라네.
“그렇……겠지요.”
-근원의 숲으로 가는 길은, 내가 인도해 주겠네. 자네라면 충분히…… 불과 바람의 권능을 가져올 수 있을 게야.
“알겠습니다, 트로웰 님.”
이안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트로웰의 몸에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의 반짝이는 물체가 되어, 이안의 앞에 나타났다.
띠링-!
-‘대지의 날개(초월)(신화)’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을 확인한 이안은 또다시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 내용에도 없는 신화 등급의 초월 아이템이 갑자기 생성되었으니, 아무리 이안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단지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주어진 일회성 아이템일 뿐이었다.
-근원의 숲으로 가기 위해선, ‘성운’을 통과해야만 한다네. 하지만 자네가 가진 위격으로는 아직 성운을 밟을 수 없겠지.
“아아……!”
-이걸 사용한다면, 날개가 소멸되기 전까지는 성운을 밟을 수 있을 걸세.
“그렇군요.”
-그럼, 무운을 빌겠네, 이안.
이안이 푸른 빛깔의 날개에 손을 뻗자, 그것은 그대로 이안의 등에 스며들어 다시 솟아올랐다.
띠링-!
-‘대지의 날개(초월)(신화)’아이템을 사용하였습니다.
-아이템의 지속 시간 동안, ‘성운’을 밟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됩니다.
-지속 시간 - 00 : 29 : 59
이어서 트로웰이 손을 뻗은 자리에, 또다시 푸른 빛줄기가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내 힘이 닿는 곳까지 자네를 이동시켜 주겠네.
“감사합니다, 트로웰 님……!”
-부디 빠르게 불과 바람의 권능을 얻어, 그들의 힘을 전장으로 보내 주게나.
“물론입니다!”
이안은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대지의 날개 지속 시간이 30분도 채 안 되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여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하여 이안은 곧바로 트로웰이 만든 포탈 안으로 발을 집어 넣었고, 그러자 커다란 공명음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그리고 이동하는 이안의 귓전으로, 트로웰의 마지막 한마디가 흘러 들어왔다.
-혹시나 그곳에서 ‘숲지기’를 만난다면,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
-그녀는 자네의 위격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말이야.
이안은 숲지기라는 존재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이미 트로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만큼, 포탈 안쪽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간 상태였으니 말이다.
‘젠장, 좀 빨리 말하든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근원의 숲’에 대한 이안의 흥미도는 점점 더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불확실성과 의외성만큼, 콘텐츠를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요소도 없었으니 말이다.
새하얀 빛으로 가득 들어찼던 이안의 시야가, 점점 다시 선명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천상의 공간이 펼쳐졌다.
띠링-!
-‘성운을 밟은 자’ 칭호를 획득하였습니다.
-‘정령의 빛’이 당신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안은 눈앞에 떠오른 푸른 빛줄기를 정신없이 쫓아 달리기 시작하였다.
* * *
띠링-!
-‘근원의 숲’에 입장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대지의 날개’가 소멸됩니다.
-‘정령의 빛’이 소멸됩니다.
푸른 잔디에 발을 디딘 순간, 이안은 무릎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억…….”
대지의 날개 덕에 성운 위를 달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제한 시간 때문인지 무척이나 급박하게 달려야 했던 것이다.
성운 위에서는 소환수를 타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어떤 공간 이동 계열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안은 오롯이 신체 능력으로만 미친 듯이 달려야 했다.
‘후, 무슨 육상경기 뛰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숨을 좀 고르기 시작하자, 이안은 슬슬 주변의 풍경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껏 온통 빛과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던 곳을 지나, 확실히 ‘숲’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공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아직까지 특별한 것은 안 보이는데…….’
이안은 눈을 반짝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숲의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환 해제되었던 소환수들을 차례로 다시 소환하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소환수 ‘라이’를 소환하였습니다.
-소환수 ‘카르세우스’를 소환하였습니다.
……후략…….
일단 이안이 소환한 소환수들은 덩치가 작은 소환수들이었다.
정확히는 실제로 덩치가 작거나 폴리모프로 작아질 수 있는 소환수들.
아직 근원의 숲이 어떤 곳인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소환수들을 다 소환하고 보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곳은 어딘가, 주인.”
“크릉……! 신비로운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처음 숲에 도착한 이안과 마찬가지로,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안의 소환수들.
그런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발견했는지 뿍뿍이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뿍……?”
잔디를 밟으며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계속해서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리는 것이다.
“왜 그래, 뿍뿍이. 무슨 일 있어?”
뿍뿍이에게 다가간 이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뿍뿍이는 대답 대신 계속해서 숲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잠시 후, 뭔가를 깨달았는지 뿍뿍이의 동공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였다.
“아, 알겠뿍……!”
“뭘 아는데?”
“여기, 어딘지 알겠다는 얘기다뿍!”
그리고 이어지는 뿍뿍이의 말을 듣는 이안의 동공 또한, 점점 더 확대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