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0화 6. 전략 대결 (2) >
* * *
화염법사의 최상위 공간 이동 마법 중 하나인 홍염의 균열.
이 마법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 외의 다른 아군까지도 지정된 위치로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여야 하며, 거리 제한도 있지만, 이런 전장에서는 충분히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인 것이다.
하지만 이 마법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쉽게 쓸 구도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회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
재사용 대기시간이 긴 데다 시전 사정거리가 짧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멀리 보낼 수는 있어도, 멀리 있는 대상을 소환해 올 수는 없는 마법이었다.
그래서 이 마법은 이안같이 복귀 수단이 있는 팀원에게 사용할 때 최고의 성능을 발휘한다.
언제든 자신의 소환수와 위치를 바꿔 생존할 수 있는 이안이라면, 이렇게 적진 한복판으로 보내면서도 리스크가 크게 감소하니까.
물론 이안이라는 폭탄이 핵폭탄급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고 말이다.
화르륵-.
하지만 그런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정말 이런 전략을 펼칠 것이라고는 전장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효과적인 한 방임과 동시에, 그 효과 이상으로 리스크가 큰 것도 사실인 극단적 전략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팬들은 더욱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점수가 잘 나지 않는 보수적인 경기보다는 화끈한 전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니까.
-이안! 이안이 칼데라스의 후방 라인으로 파고듭니다!
-이안의 저 분신 스킬은 어떤 능력일까요?
-과거에도 몇 번 보여 줬던, 서머너 나이트의 고유 능력이 아닐까 예상합니다.
-그렇군요.
-아직까지 구체적인 고유 능력의 정보가 알려진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안의 분신은 어지간한 전사 클래스 랭커 이상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분신들이 기습적으로 진영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칼데라스의 후열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까강-촤라라락-!
“크허어억-!”
“서포터들 뭐 해! CC라도 걸어 봐!”
“이쪽으로 못 오게 저지하라고!”
마치 전장의 한쪽 구석에, 이안이라는 존재가 파고들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긴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구멍을 메울 수는 없을지언정, 칼데라스는 침착하게 대열을 가다듬기 시작하였다.
버릴 것은 빠르게 버리고, 자신들이 얻을 수 있을 것을 취하려는 것이다.
평범한 길드였다면 이대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칼데라스는 결코 평범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차륜전을 펼쳐! 수비 라인의 피해는 최소화시키고, 파상공격(波狀攻擊)으로 이안을 갉아먹는다!”
칼데라스의 길드원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안의 전투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본래 수준이 높을수록 그 이상의 것들이 더 잘 보이는 법이었으니, 어쩌면 이안의 진정한 힘을 가장 근접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들이 칼데라스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무척이나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철저한 차륜전의 형태로 이안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올 것 같으면 곧바로 포지션을 스와프해 가며, 단단한 구조로 버티기 시작한 것.
까강-촤아악-!
콰아앙-!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되자, 이안으로서도 살짝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역시, 괜히 칼데라스가 아니네.’
물론 처음 공간 이동으로 습격을 감행했던 순간, 이미 이안이 가져온 이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첫 30초 내로 이미 열 개체가 넘는 차원 병사들을 삭제시켰으며, 마법사나 기사같이 상위 유닛들도 너덧 이상 처치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칼데라스의 기사단원까지 둘 정도 보내 버렸으니,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고도 남은 것.
이대로 공간 왜곡을 사용하여 복귀해도 충분한 성과였지만, 이안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잘만 풀리면 상대 딜러 라인을 싹 다 녹여 버릴 수도 있었던, 회심의 한 방이었으니까.
“역시 이안인가……?”
“과연, 마스터와 비견될 만하군……!”
차륜전으로 겨우 이안의 공격을 버텨 내던 칼데라스의 랭커들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전력을 다한 이안과 검을 맞대자,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 번 짜임새가 무너지는 순간, 그대로 전멸이라는 사실.
무슨 분신의 검격 한 번에 탱커 라인의 생명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가니.
파괴력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미 약속된 충분한 시간을 버텨 내었고, 이제는 반격의 시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둠의 권능이여……!”
고오오오-!
이안과 분신들이 방어 라인을 두들기는 사이, 어느새 그 너머에 나타난 어둠의 기운.
칼데라스 길드 최고의 어둠 마법사, ‘메가론’의 등장이었다.
“모든 왜곡된 것들을, 어둠으로 화하라!”
스하아아아-!
메가론의 영창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스산한 어둠의 기운이 이안과 분신들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이번에는 이안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강력한, 안티 일루젼(Anti Illusion) 스킬이 존재한다고?’
랭커들의 차륜전에도 큰 피해가 없던 이안의 분신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치칙-치치치칙-!
고유 능력의 정확한 메커니즘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의 방어력과 관계없는 수십만의 고정 피해가 분신들에게 들어온 것.
“으음…….”
때문에 이안은 이제, 한 가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여기서 카이라도 나타난다면, 아무리 그라도 더 이상 버텨 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카이의 포지션은 최전방이었어. 하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단 것은, 나를 견제하러 직접 오진 않았다는 얘긴데…….’
포르투나의 전장은 꽤 넓었기에, 같은 진영의 전방과 후방을 왔다 갔다 하는 데에도 제법 긴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그 때문에 이안은 카이가 자신을 상대하러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자신이 공간 왜곡을 사용하여 복귀해 버리면, 왕복에 들어간 시간만 날리는 상황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카이로서는 그 시간에 전방에서 로터스의 병력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되는 상황인 것.
전장의 특성상 그냥 병력을 줄이는 것을 넘어 자원 확보 측면까지도 고려해야 하니.
이안은 자신의 판단이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카이만 없으면, 시간을 끄는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무기를 스와프하였다.
철컥-!
-‘악마의 심판 검’을 착용 해제하였습니다.
-‘심연의 심판 검’을 착용하였습니다.
물론 바이탈리티 웨폰(Vitality Weapon)을 활용하여 세 자루의 심판 검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상태이긴 하였지만.
결국 손에 직접 들려 있는 무기가 가장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극단적인 공격형 무기인 악마의 심판 검을 해제하고, 심연의 심판 검을 쥐었다는 것은 킬을 한두 개 더 챙기는 것보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 보겠다는 의지.
지이잉-!
그리고 이것은 ‘악마’속성의 공격들을 사용하는 칼데라스의 상위 랭커들에게, 더욱 위협적인 세팅이기도 하였다.
‘대충 2분 정도…… 그쯤만 버티면 돼.’
날카롭게 파고드는 논타깃 스킬들을 피해 낸 이안은 그대로 몸을 날려 더욱 깊숙한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이안의 타깃은 어둠법사 메가론.
만약 공간 왜곡을 활용한다면 메가론을 따 버릴 자신도 있었지만, 생존을 위해 그 수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를 노리는 것이 버티기 측면에서도 가장 효율적일 것이라는 판단일 뿐.
콰콰쾅-!
그리고 그렇게 이안이 생각했던 2분의 시간이 지나자, 전장의 판도는 다시 바뀌기 시작하였다.
-아아, 이안이 시간을 끌어 줘도, 로터스의 앞 라인은 결국 밀릴 수밖에 없군요!
-아니, 오히려 이안이 없기 때문에, 로터스의 랭커들이 카이를 견제하기 버거워 보입니다!
-이대로 본진이 무너지면, 이안이 아무리 오래 버텨도 의미가 없을 텐데요!
-앗! 말씀하시는 그때……!
이안의 활약에도 병력 차이에 밀리던 로터스가, 역으로 칼데라스를 압도할 수 있는 판이 깔린 것이다.
-로터스의 지원 병력이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숫자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앗,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더 강력한 상위 유닛들이에요!
-그……렇습니다! 기사들의 차원 레벨이 150이 넘었어요!
-로터스의 차원 마법사들이, 광역 마법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5분이 지나는 동안, 더 큰 손해를 본 것은 로터스였지만, 결국 상위 티어의 지원 병력들이 도착할 때 까지 버텨 냄으로서,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칼데라스가 조금 유리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 거죠?
-그렇습니다! 상위 티어의 병력이 도착했다는 말은 커맨드 타워의 건설이 완료되었다는 말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상위 티어 병력들이 누적되기 시작하겠네요.
-그렇죠. 아마 10분만 지나도, 전황이 완전히 뒤집어질 게 분명합니다.
5분 전에는 로터스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이었다면, 이제는 칼데라스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
위이잉-!
적진 한복판에서 시간을 끌던 이안까지도 공간 왜곡을 사용해 본진으로 복귀하였으니, 이제 반대로 칼데라스가 주춤 주춤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아, 어렵습니다!
-여기서 칼데라스가 뒤를 보이는 순간, 첫 전투로 얻었던 이득까지도 전부 날려 버릴 수 있거든요!
-아마 지금쯤이면 칼데라스도 커맨드 타워의 업그레이드를 시작했을 테니…… 이번에는 칼데라스가 버틸 차례인가요?
해설진의 흥분된 목소리만 봐도 알 수 있듯,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는 상황.
그리고 이 상황에서 칼데라스는 이안이 예상치 못했던 한 수를 또 던져 주었다.
우웅-우우웅-!
마법사들의 광역기를 피해 뒤로 살짝 물러나는가 싶더니, 칠흑같이 까만 어둠의 기운이 진영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 것이다.
“다크 홀……?”
이번에는 이안 또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크 홀이 지금 발동되었다는 것은 칼데라스에서 이 시점까지 완벽하게 계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다크 홀! 다크 홀입니다!
-칼데라스는 이미 3분 전부터, 치고 빠질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거예요!
매스 텔레포트와 비슷한 용도로 쓰이는 어둠 마법인 다크 홀.
범위 내의 모든 아군을 특정 좌표로 이동시킬 수 있는 이 마법은 캐스팅 시간이 정확히 3분이었고.
지금 시점에 발동되도록 미리 마법을 발동시켜 뒀다는 것은 로터스의 지원군이 도착할 타이밍까지 계산되어야 가능한 한 수였던 것이다.
고오오오-!
광역 이동 마법을 발동시켜 깔끔하게 성채 안으로 후퇴하는 칼데라스를 보며, 로터스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상황!
-로터스와 칼데라스의 장군 멍군입니다!
-크으으……! 감탄밖에 나오질 않는군요!
이안은 칼데라스의 병력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쉽게 당해 주지는 않는다는 건가?”
이 한 방으로 다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킬 포인트 자체는 칼데라스가 많이 딴 것처럼 보이지만, 로터스는 칼데라스보다 한 발 빠른 발전 테크를 성공시켰으니.
균형의 추가 다시 맞춰진 것.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