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9화 6. 전략 대결 (1) >
이안은 천룡기사단의 기사단장이기 이전에 로터스 왕국의 국왕이다.
그 때문에 그는 영지 내정과 관련된 거의 모든 콘텐츠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평범한 유저들은 1년 넘게 플레이해도 경험해 보기 힘든 콘텐츠가 영지 내정 콘텐츠였지만, 이안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콘텐츠였던 것이다.
해서 이안의 콘텐츠 적응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흠, 구조 자체는 영지전 구조랑 비슷한데, 훨씬 더 속도감 있는 구성이네.’
이안이 파악한 이 성채 전투의 시스템은 거의 RTS 게임들과 비슷한 구조였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건물을 짓고 유닛을 생산하여, 상대 진영을 무너뜨리면 승리하는 구조.
다만 일반적인 RTS와 확연히 다른 부분은 자원 획득이 채집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서로 생산한 병사들과 서로의 기사를 처치했을 때 쌓이게 되는 차원력 포인트가 곧 자원이었으니, 한 번 한 번의 전투에서 손해를 보기 시작하면 구조적으로 계속해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교전이 전투의 승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니, 더욱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게다가 건물 건설이나 유닛 생산시간 자체도 일반적인 RTS보다 훨씬 더 짧아서, 엄청난 속도전이 될 게 분명하였다.
‘지금쯤 칼데라스도 성채를 점령했을 거고…… 어떤 전략을 선택했으려나?’
성탑에 올라선 이안은 필드 반대편 멀찍이 보이는 성채를 날카롭게 응시하였다.
처음 성채를 점령한 직후, 길드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분류라고 할 수 있었다.
성채를 점령하면서 얻은 자원을 활용하여 전부 병력을 뽑아 선공을 시작하는 방향과, 병력 생산은 최소화하고 우선 건설과 업그레이드를 통해 성채를 발전시키는 방향.
두 방향성 모두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에, 이안조차도 칼데라스가 어떤 전략을 쓸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두 방향성을 적절히 섞어서 움직일 수도 있겠고…….’
그 때문에 이안은 긴장하였다.
지금 로터스의 첫 선택은 병력 생산보다 건설과 발전 쪽으로 가닥이 잡혀 있었으니.
만약 칼데라스가 처음부터 총력전을 걸어온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카이의 성향상 그럴 확률이 좀 더 높아 보이긴 하는데…….’
그리고 이안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아, 칼데라스의 성문이 열립니다!
-칼데라스에서 먼저 선공을 시작하려나 봅니다!
해설진들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며, 칼데라스의 병력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하였다.
* * *
포르투나 최후의 전장에 솟아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성채.
하지만 크기가 거대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채의 방어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양쪽의 성채는 사실상, 수성과 관련된 보강이 아무것도 되지 않은 기초 성채일 뿐.
그 때문에 전장을 수성전으로 유도하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성벽이 주는 전략적 이점에 비해, 벽이 뚫렸을 때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훨씬 더 컸으니까.
“앞으로 5분. 5분만 벌면 된다.”
이안의 말에 모두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5분이라는 시간이 뭘 의미하는지,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커맨드 타워 업그레이드가 끝나고, 업그레이드된 병력을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그 시간이 정확히 5분이었다.
“남은 자원은 전부 일반 병사에 투입하고, 기술 연구 건물에선 방어력 강화 업그레이드만 싹 다 돌려.”
“방어력 강화 끝날 때까지, 공격력 업그레이드 쪽은 눌러 보지도 못할 텐데?”
“화력은 커버할 방법이 많아. 일단 버티는 게 중요해.”
“알겠어, 형.”
남겨 두었던 소량의 자원을 소모하는 데까지 빠르게 오더를 마친 이안은 곧바로 아이언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쐐애액-!
그러자 이안의 뒤를 따라 나머지 기사단원들이 날아올랐고.
펄럭-!
이어서 로터스 성채의 성문도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끼익-끼이익-!
칼데라스에서 총력을 다해 초반 러시를 들어왔으니, 로터스에서도 가능한 모든 병력을 우선 꺼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맵이 탁 트인 평야가 아니라는 건데.’
이안은 빠르게 아이언을 조종하여, 생각해 두었던 지형을 선점하기 위해 속력을 올렸다.
최대한 지형지물이 많고 좁은 위치에서 전투를 발생시켜야, 소규모 병력으로 버텨 낼 가능성이 높아지니 말이다.
그리고 양 진영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전장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아, 드디어 로터스와 칼데라스! 이 두 길드가 전장에서 만났습니다!
-사실상 글로벌 기준, 랭킹1, 2위 길드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데이터만 봐도, 다른 랭커 길드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곳들이죠.
-그런데 병력의 숫자가 칼데라스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 이유는 뭘까요?
-아무래도 선택과 집중이겠죠. 자원 소모의 선택지에는 병력 생산만이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중간계가 열린 이후부터는 거의 매번 비교되어 가며 최강으로 꼽히던 로터스와 칼데라스.
활약하는 차원계가 다른 까닭에 제대로 된 전면전은 한 번도 벌인 적 없던 두 길드의 첫 격돌은 전 세계 모든 유저들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가 이길까?”
“이건 진짜 짐작도 안 되네.”
“그래도 이안갓의 로터스가 결국 이기지 않을까?”
“카이가 지금껏 보여 준 전적도 만만치는 않아서…….”
그리고 그런 유저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이안의 모든 소환수들이 차례로 소환되기 시작하였다.
* * *
LB사 기획팀의 모니터링실.
깜깜한 모니터링실 안에 앉은 나지찬은 커다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지찬뿐 아니라 다른 기획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기획 3팀의 할 일이야 지금도 끝없이 쌓여 있었지만.
팀장인 나지찬이 이 역사적인 순간만큼은 모두가 함께 시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에 팀원들이 불만을 가질 리는 없었다.
이안은 기획팀에게 애증(?)의 존재였으니 말이다.
“붙었네요.”
“크……!”
“첫 번째 전투만 봐도, 두 길드의 성향이 확실히 드러나네.”
“그러게요. 역시 팀장님 말씀대로, 로터스는 테크를 올리고 칼데라스는 초반 러시를 선택하는군요.”
기획팀의 팀원들은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이 최후의 전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초 기획안부터 시작해서 세부 기획 세팅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 그들 모두가 참여했으니 말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단순히 전투를 시청하는 평범한 유저들보다도 훨씬 재밌게 방송을 즐길 수 있었다.
“일단 초반에는 팽팽한데…… 아무래도 기사단장들이 보수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 거겠죠?”
“그렇지. 카이나 이안이나, 서로가 죽으면 그대로 게임 셋인데……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지.”
“슬슬 로터스가 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팀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나지찬의 시선은 스크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일단 첫 전투의 양상이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긴 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는 그조차도 완벽히 예상할 수 없었으니 말이었다.
‘이안보다 더 공격적인 성향인 카이조차도…… 쉽게 최전방으로 나서지 못하는군.’
사실 나지찬이 기획자로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시작하자마자 게임이 끝나 버리는 상황이었다.
성채와 관련된 수많은 콘텐츠를 준비해 두었는데, 시작부터 기사단장끼리 싸워서 결판이 나 버리면 너무 허무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양 길드 모두 최대한 병력을 이용한 힘겨루기를 지향하며, 정확히 기획 의도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거, 너무 무난해서 더 불안한데…… 이렇게 노멀하게 전투가 진행된다고?’
나지찬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혀를 할짝거리며 더욱 전장에 집중하였다.
이대로라면 조금씩 밀려서 후퇴하던 로터스가 결국 외성을 내주거나,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추가 병력이 생산되어 전황을 역전시키거나.
두 가지의 상황 중 하나 외에는 다른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전장의 재미야 충분했지만, 그래도 어떤 의외성이 있기를 바라는 나지찬.
그런데 바로 그때.
“어어, 팀장님, 저기!”
팀원 하나의 목소리가 살짝 격양됨과 동시에 뒤늦게 ‘무언가’를 발견한 나지찬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 *
칼데라스에서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생산한 병력은 외관상으로는 최초에 성채를 지키던 중립 병력과 다른 것이 없는 유닛들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중립 NPC일 때와 칼데라스 진영의 병사들일 때의 전투력 차이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레벨 자체는 이전과 같은 130~150레벨대였지만, 이제는 칼데라스 랭커들의 각종 서포팅이 있었으니 말이다.
현존하는 최고 티어의 버프들과 힐, 그리고 원거리 딜러들의 지원사격이 조화를 이루니, 같은 ‘차원 기사’라 하더라도 위협도는 격이 다른 수준이었다.
물론 로터스 진영의 차원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병력의 숫자가 너덧 배는 차이난다는 게 문제였다.
까강 깡-!
심판 검을 휘둘러 기사 하나를 깔끔하게 베어 넘긴 이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슬쩍 닦아 내었다.
‘역시 쉽지 않군.’
아직까지는 크게 밀리지 않았지만, 지휘관 포지션의 이안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버텨 내는 방어선에 금이 가는 순간 외성까지 밀려 내려오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헤르스 : 결정해야 해.
-이안 : 뭘?
-헤르스 : 전장을 뒤로 물릴지 말지, 지금 결정해야 된다는 말이야.
헤르스의 다급한 메시지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안의 표정은 무척이나 침착하였다.
단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일 뿐, 대응할 방법이야 처음부터 생각해 둔 상태였으니까.
‘딱 셋……! 셋만 따고 돌아온다.’
스르릉-!
이어서 심판 검을 뽑아 든 이안이 전방으로 날아올랐다.
“레미르 누나, 지금!”
“알겠어!”
“레비아 님, 도와줘요.”
“옙!”
뭔가를 미리 이야기해 놓은 것인지, 간결하게 오더를 내리며 전장의 최전방을 향해 쇄도하는 이안.
-앗! 이안이, 이안이 전선으로 움직입니다!
-기사단장이 직접 움직였어요!
그의 전신에 새하얀 빛과 화염의 기류가 동시에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기사단원 ‘레미르’가 ‘홍염의 균열’ 마법을 시전하였습니다.
-기사단원 ‘레비아’가 ‘성전’을 선언하였습니다.
-기사단원 ‘레비아’가 ‘환영의 빛’마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소환수 ‘엘카릭스’가 고유 능력 ‘드라고닉 베리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중략…….
-‘마법의 균열’의 영향으로 좌표를 이동합니다.
우우웅-!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허공에서 사라진 뒤, 순식간에 전장 한복판에 등장한 이안.
이어서 이안의 신형이, 둘, 셋으로 나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