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7화 5. 운명의 언덕 (2) >
사실 기사 대전이 열린 뒤로 지금까지, 이안이 기사 대전에 무척 소홀했던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기사 대전 자체를 경시하거나 중요치 않다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최후의 전투 이전까지는 자신의 힘이 크게 필요치 않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나 없어도 올라갈 거, 에픽 퀘 진행이 훨씬 더 이득이었지.’
그리고 그러한 계산 덕에 이안은 많은 부분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의 정령술부터 시작해서 신화 등급의 초월 지팡이. 거기에 퀘스트 진행 한정이긴 하지만, 정령왕과의 계약까지.
게다가 이런 실질적인 이득만이 이안이 얻은 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은 기사 대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타 길드에 본인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는 최고의 이점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스릉-척-!
이안에게는 손에 들려 반짝이는 최강의 검, 세 자루의 ‘심판 검’을 비롯하여,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많은 무기들이 있었으니까.
“차핫-!”
“대형 유지!”
“딜러부터 보호해!”
그리고 그 숨겨 뒀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들기 시작한 이안은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아, 역시 용기사단인가요!
-그렇습니다!
-타이탄 길드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요!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요. 시간이 한 달 정도만 더 있었어도, 타이탄 길드도 용기사단을 창설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죠.
-전력만 해도 로터스에 밀리는 상황인데, 기사단 효과까지 밀리니…… 이건 너무 순식간에 무너지는군요!
운명의 언덕은 사실상, 거의 모든 제약이 최소화되어 있는 전장이었다.
그 때문에 기사단 효과를 받고 싸울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용맹기사단’에 불과한 타이탄 길드의 기사들이 비룡을 타고 날뛰는 로터스 길드를 당해 낼 수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용맹기사단>
*설립 조건
-‘중간자’이상의 위격을 가진 구성원 20인
-‘전설’등급 이상의 ‘준마’ 20필 보유
-‘신화’등급 이상의 수호신수 등록
-‘기사’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5인 이상
-‘전사’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5인 이상
-‘궁사’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5인 이상
-초월 레벨 50레벨 이상인 ‘전사’클래스의 ‘유저’를 ‘기사단장’으로 임명
*용맹기사단 버프 효과
-‘용맹기사단’소속의 파티원 전원 공격력 +50%, 방어력 –20%
-‘용맹기사단’소속의 파티원 전원 이동속도+20%
-함께 있는 ‘용맹기사단’소속의 파티원 숫자에 비례하여, ‘용맹기사단장’의 모든 전투 능력이 추가로 증가(한 사람당 +3%)
……중략…….
<천룡기사단>
*설립 조건
-‘중간자’이상의 위격을 가진 구성원 20인
-‘전설’등급 이상의 탑승 가능한 ‘드래곤’ 20마리 보유
-‘신화’등급 이상, ‘천룡’이상의 위격을 가진 드래곤종족 소환수를 수호신수로 등록
-‘기사’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5인 이상
-‘(흑)마법사’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4인 이상
-‘사제’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3인 이상
-‘소환술사’클래스를 가진 구성원 2인 이상
-초월 레벨 70레벨 이상인 전투 클래스의 ‘유저’를 ‘기사단장’으로 임명
*천룡기사단 버프 효과
-‘천룡기사단’소속의 파티원 전원 모든 전투 능력치 +30%
-‘천룡기사단’소속 모든 드래곤의 공격력 45%만큼 상승
-‘천룡기사단’소속 모든 드래곤의 ‘브레스’계열 고유능력 재사용 대기시간 50% 감소
-‘수호신수로 등록된 드래곤’의 속성과 같은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시, 위력 30%만큼 증가
……후략…….
기본적으로 버프 성능의 차이도 차이였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탈 것’의 성능 차이.
-아아, 이안의 비룡이 강력한 숨결을 내뿜습니다!
-단번에 타이탄 길드의 기사 셋이 아웃됐어요!
-아니, 저 비룡은 대체 뭔가요? 다른 비룡들이랑 생김새가 좀 다른데요?
-아마도 비룡의 상위 개체인, 철갑신룡인 듯 보입니다.
-역시 세계 랭킹 1위의 소환술사인가요? 탈것마저도 신화 등급의 용족 소환수로군요!
타이탄 길드의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들도 평범한 말이 아닌 ‘신수’들이었으나,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샤크란을 비롯한 몇몇 단원들이 비행 가능한 신수인 ‘유니콘’을 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보다 더욱 일방적인 전투가 될 뻔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스코어 35 대 7! 점점 스노우볼이 구르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전투 가능 인원 차이도 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아요.
-역시나 이대로, 로터스의 승리가 결정되겠죠?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타이탄 길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무리해서라도 이안을 직접 노리는 것이었다.
-앗! 샤크란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어디론가 향합니다!
-아, 이안에게로 향하는군요!
어차피 스코어 차이가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면, 이제 역전을 위해 남아 있는 선택지는 기사단장인 이안을 처치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자, 오랜만에 놀아 볼까?”
샤크란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안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좋죠.”
사실 다 이겨 놓은 상황에서 샤크란의 도발에 응수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만 놓고 봤을 때 좋은 방법이 아니었지만, 이안은 기꺼이 검을 들고 샤크란의 도발을 받아 주었다.
-아앗! 이안과 샤크란이 맞붙기 시작합니다!
-로터스 입장에서는 싸워 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이건 팬 서비스인가요?
-아니면 자신감일수도 있겠죠.
경기를 지켜보던 카일란의 팬들로서는 더없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
“캬, 역시 이안 클래스!”
“그렇지! 이렇게 끝나 버리면 노잼이지!”
하지만 기대에 찬 팬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이안과 샤크란의 전투가 끝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어, 어어……?”
“미친!”
이안의 주변에 떠오른 세 자루의 심판 검이 하얀 빛을 내뿜은 순간.
콰쾅-콰콰쾅-!
거대한 심판의 번개가 전장 전체를 뒤덮었으니 말이다.
* * *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나뉜, 운명의 언덕 두 곳의 전장.
그 때문에 대부분의 게임 방송에서는 최초로 분할 화면을 통한 경기 중계를 진행하고 있었다.
좌측에는 로터스 길드와 타이탄 길드의 경기를.
우측에는 칼데라스 길드와 발러 길드의 경기를.
기본적으로 동시에 띄워 놓은 채, 번갈아 양쪽 화면을 확대하며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이 전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정해지는 데에는, 실시간으로 양쪽의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확인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였으니 말이었다.
그 때문에 각 게임 방송의 해설진과 캐스터들은 침이 마르다 못해 숨이 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운명의 전장 안에서 직관하는 유저들을 상대로 해설하는 해설자들이야 각각 맡은 경기만을 해설하고 있었지만, 게임 방송을 통해 송출되는 TV는 두 화면을 동시에 해설해야 했으니 말이다.
-칼데라스! 칼데라스가 발러를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칼데라스 용기사단의 마룡들은 이번에 처음 등장하는 전력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마룡기사단의 존재까지도 철저히 숨겨온 듯합니다!
-말씀하시는 사이! 이안과 샤크란의 일기토가 시작되었어요!
-어엇, 이안이 그에 곧바로 응수합니다!
-와아앗!
-로터스와 타이탄! 그리고 칼데라스와 발러!
-어느쪽이 먼저 승부가 결정 날까요?
-확실한 건 양쪽 전장 모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카이! 카이의 검에서 거대한 어둠의 폭풍이 뿜어 나옵니다!
-아르케인이 어떻게든 막아 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에요!
-올리버는 뭐 하고 있나요!
-크리스와 알파인이 올리버를 완전히 묶어 둡니다!
정신없이 확대되었다가 분할되었다가를 반복하는 양쪽 전장의 숨 막히는 화면들.
그 화면은 전 세계 수억 명의 시청자들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있었다.
-칼데라스! 칼데라스가 먼저 50번째 킬을 달성합니다!
-운명의 봉우리로 향하는 서쪽의 등천문이 먼저 열렸습니다!
-앗! 말씀하신 바로 그 순간! 이안의 검에 샤크란이 쓰러집니다!
-거의 동시에 동쪽의 등천문도 오픈됩니다!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는 마지막 전장에 이르자 처음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로터스와 칼데라스는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보여 주었다.
기사 대전에 처음 등장한 이안의 전투력이 경악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카이 또한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대인전투가 아닌 팀 전투였기 때문에, 두 랭커는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상급의 길드원들이 전폭적인 지원을 하며 전투를 서포팅해 주니, 더욱 거침없이 전장을 휘저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첫 번째 전장이 마무리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양쪽 모두 30분 이내.
비룡을 탄 로터스의 기사단원들과 마룡을 탄 칼데라스의 기사단원들은 빠른 속도로 운명의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동쪽 성을 먼저 점령해야, 선공권을 확보할 수 있어.”
“의도적으로 수성하면서 칼데라스의 힘을 빼놓는 건?”
“아냐. 그러다가 한번 틈이라도 생기면, 그대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언덕길을 따라 날아오르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대화를 하며 의견을 나누는 이안과 헤르스.
그런 그들의 눈앞에 하얀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성(城)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렇게 크다고?”
고작 30 대 30으로 진행되는 공성, 수성전을 수행하기에는 성채가 생각보다 너무 거대했으니 말이었다.
* * *
온통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인 거대하고 웅장한 성채.
이곳을 점령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였다.
성채의 중앙에 있는 첨탑에 기사단의 깃발을 꽂아 넣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방법이 간단할지언정, 그것이 쉽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직 아무도 점령하지 못한 중립 지역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비어 있는 성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도전자여, 그대들의 능력을 증명하라……!”
“기사도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보여 주도록 하지!”
차원의 마법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수백이 넘는 차원 병사들.
운명의 봉우리에 솟아 있는 두 개의 성은 강력한 중립 NPC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와앗! 성을 지키고 있는 NPC들의 레벨이 무려 130입니다!
-병사들의 레벨이 130이고, 기사들은 거의 150레벨이에요!
-로터스, 칼데라스로서도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겠는걸요?
-과연 이게 적정 난이도일지……! LB사에서 랭커들을 너무 고평가한 것은 아닐지 걱정됩니다.
그리고 차원의 병사들을 발견한 이안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오호, 이것 봐라?’
당연히 성을 점령하는 데에는 별다른 공수가 들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안으로서도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방패 병사에 궁수, 거기에 마법사까지…… 저 커다란 골렘은 탱커인 것 같고. 이거 병력 구성도 은근히 탄탄하잖아?’
중립 병력의 전력에 대해 빠르게 분석을 마친 이안은 기존의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밀어붙여 깃발을 꽂아 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무리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병사들의 레벨도 레벨이었지만, 수적 열세가 더 큰 위험 요소였던 것.
하여 이안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천천히 중립 NPC들을 공략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다들 저공 비행으로 접근해! 대공포에 잘못 맞으면 그대로 끔살이니까!”
“기사들이 어그로 끌어 주면, 마법사부터 먼저 저격하자고!”
그리고 서서히 성채 공략이 진척되기 시작하자, 이안은 재밌는 사실을 한 가지 알아낼 수 있었다.
‘NPC들 주제에 수성 전략이 제법이잖아? 어라, 그러고 보니 저기……!’
첫 번째 외성을 넘어 성벽 위로 올라서자, 성 안쪽에서 병력을 생산하는 특이한 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아하, 성채가 왜 이렇게 큰가 했더니…… 이제야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 전장인지 알 것 같네.’
포르투나 최후의 전장은 단순히 30인의 랭커끼리의 힘 싸움이 아닌, 또 하나의 거대한 전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