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6화 5. 운명의 언덕 >
운명의 날이 밝았다.
사실상 기사 대전의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최후의 전장 운명의 언덕.
카일란의 모든 팬들은 한국 시간 기준 22시가 되기만을 기다렸고.
그 이유는 당연히 ‘설렘’ 때문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운명의 언덕’ 전장의 룰과, 결승 리그의 진행 방식이 바로 그 시간에 오픈되니 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뜸을 들인 만큼, 운명의 언덕 전장에는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포르투나의 제2전장(운명의 언덕)>
-포르투나 제1의 전장인 ‘콜로세움 검투장’에서 살아남은 네 길드의 기사단만이 입장할 수 있는 전장입니다.(A조 둘, B조 둘)
운명의 언덕은 검투장과 달리 단일 기사단끼리의 기사단 대전으로 진행되며, 대진은 다음과 같이 결정됩니다.
A조 1위 vs B조 2위
B조 1위 vs A조 2위
경기는 운명의 언덕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각 경기에서 승리한 두 팀이 운명의 언덕 정상에서 만나게 됩니다.
운명의 언덕 정상에 있는 두 개의 성을 전부 손에 넣은 기사단이 기사 대전의 최종 우승컵을 거머쥐게 됩니다.
……중략…….
*참전하는 각 길드는 기사단원들을 포함하여 총 30명까지 입장이 가능합니다.
*만약 성이 전부 함락되지 않았더라도 ‘기사단장’이 사망한다면, 전장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운명의 언덕 전장의 세부적인 룰은 콜로세움 때와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였다.
전장의 구조 자체가 새로운 콘텐츠나 다름없다 보니, 이런저런 세세한 요소들이 많은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란의 기획팀이 대단한 이유는 이 모든 복잡한 룰을 몰라도 경기를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언덕의 정상에 있는 두 개의 성을 함락시킨 팀이 우승한다는 이 하나의 명제로, 모든 경기를 설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복잡한 룰을 하나하나 분석하며 즐기는 하드한 유저들에게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면서, 그런 것들은 관심없는 라이트한 유저들도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
운명의 전장은 바로, 그런 콘텐츠였다.
-역시 조 1위랑 2위가 먼저 엮이네.
-뭐, 그거야 거의 모든 스포츠 경기들도 이런 방식이지 않나?
-맞음.
-하, 아쉽네. 이러면 한국 팀끼리 먼저 붙어야 되잖아?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잖음ㅋㅋ
-ㅋㅋ그러네.
-최후의 전투에서 한국 팀끼리 만나는 그림을 보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 그림이 나은지도 몰라요.
-하긴. 어쨌든 네 팀 중에 최약체가 타이탄이라는 것 만큼은 사실이니…….
결승 리그까지 꽤 긴 시간 공백 기간이 있었던 것과 달리, 운명의 언덕 전장 일정은 곧바로 이어져 진행되었다.
어차피 모두 ‘포르투나’의 맵 안에서 이뤄지는 경기기도 하였으며, ‘결승 리그’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여 있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여 운명의 언덕 경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콜로세움 전투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오전.
그 때문에 공식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잠을 설치고 있었다.
-캬, 12시가 넘었는데 설레서 잠이 안 오네.
-저도요.
-마지막 경기인 만큼 제일 흥미진진하겠죠?
-참전 팀끼리 짜고 치는 그림만 나오지 않는다면요.
-짜고 친다니요?
-어차피 타이탄이 로터스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고, 그보다는 가능성 있지만 발러 길드가 칼데라스를 이기는 것도 거의 힘들다고 봐야 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타이탄이나 발러가 상대 팀을 위해…… 일부러 쉽게 져 주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럴 이유가 있나요?
-먼저 언덕의 정상에 오른 기사단이 최후의 전투에서 훨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테니까요.
-아하?
-로터스나 칼데라스가 로비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게다가 양쪽 모두 같은 나라의 팀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저는 살짝 걱정이 되네요.
경기에 대한 기대부터 시작해서 갖은 걱정들까지.
관심도가 높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는 것이다.
-너무 걱정 마세요. LB사가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가능성 정도는 사전에 차단해 뒀겠죠.
-하긴. 그도 맞는 말씀이네요.
하지만 그런 걱정들은 일부일 뿐.
역시 팬들이 가장 크게 기대하는 것은 자신이 응원하는 길드와 랭커들의 활약들.
-진짜 기사 대전 느낌 나겠네요.
-역시 일기토식 대전보단, 떼싸움이 재밌지.
그리고 그렇게 밤이 지나, 결전의 날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 * *
일반 유저들이 결승 경기에 대한 기대로 밤잠을 설쳤다면, 참전 팀들은 새 전장에 대한 분석으로 밤잠을 설쳤다.
참전 멤버로 이름을 올린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컨디션 조절을 위해 쉬었지만, 헤르스와 피올란 등의 수뇌부들은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별다른 걱정 없는 이안이나 훈이 등의 소수 길드원들에게서는 걱정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말이었다.
-이안 : 분석할 것도 없네, 뭐.
-헤르스 : 음……?
-이안 : 그냥 빨리 이기고 빨리 올라가서 빨리 점령하면 끝이잖아.
-피올란 :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쉬워 보이네요.
-헤르스 : 하아…….
-간지훈이 :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내일은 제가 캐리합니다.
-레미르 : …….
물론 이안과 훈이의 걱정 없음은 그 결이 다르긴 하였다.
훈이는 걱정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없는 느낌이었지만, 이안은 이미 경기의 모든 룰을 읽어 본 다음 나름대로 꼼꼼히 분석을 마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한 핵심은 수성전과 공성전을 어떻게 운용하냐는 건데……. 내성에 무슨 콘텐츠가 있는지는 공개되어 있지 않으니, 지금 더 고민할 것도 없지, 뭐.’
그래서 잠들기 전, 이안이 마지막으로 한 것은 대전사 카이가 참전했던 기사 대전 영상들을 한 번씩 돌려보는 것이었다.
이안이 생각하기에 지금 시점에서 유일한 적수는 카이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이 친구도, 모든 걸 보여 주진 않는 느낌이군.’
그리고 카이의 플레이를 볼수록 이안은 더욱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하였다.
‘내일은 정말 재밌겠어.’
오랜만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준비가 된 이안은 히죽 웃으며 잠에 들었다.
* * *
-자, 여러분! 드디어 포르투나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세계 카일란 최고의 랭커들을 만나 보실 수 있는…….
비현실적으로 새파란 포르투나의 하늘에 캐스터와 해설진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한국 시간을 기준으로, 정확히 아침 9시에 열린 운명의 언덕.
전장이 열리자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밀려든 것은 새벽부터 직관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카일란의 팬들이었다.
“캬, 밤새우길 잘했지.”
“결승전 직관이라니, 행복하구먼.”
아예 전투를 관전할 수 있는 좌석이 존재하는 콜로세움과 달리, 운명의 언덕에 그런 관람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실질적으로 전투가 진행되는 지역의 바깥쪽에서는 어디서든 허공의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전투를 관람할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마치 축제를 즐기듯 ‘운명의 언덕’에 몰려든 것이다.
순수히 경기를 즐기기 위해 온 팬들부터 시작해서, 세계 각국의 BJ들에, 심지어는 자녀들에게 끌려온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그리고 남자 친구의 손에 이끌려 따라온 여대생까지.
“우린 어느 쪽으로 가야 돼?”
“당연히 동쪽이지. 한국 경기 버리고 미국 경기 보러 갈 일 있어?”
“아하.”
“동쪽 필드가 한국 팀끼리 붙는 전장이야.”
“그럼 가서 아무나 이겨라 하면 되는 건가?”
“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로터스를 응원하는 게 나을 듯.”
“왜?”
“로터스가 올라가야, 최종 우승이 가능할 테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럼 로터스를 응원해야겠네.”
어느새 카일란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콘텐츠가 되어 있었다.
-경기 시작을 5분 앞두고, 각 길드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먼저 타이탄 길드의 기사들부터 살펴보시면…… 왼쪽부터 차례대로 에밀리, 세이론, 알랑크라…….
-마지막으로 현 시점 한국 서버의 전사 클래스 랭킹 1위이자, 타이탄 길드의 길드 마스터! 샤크란이 입장합니다!
“와아아-!”
타이탄 길드의 기사단 입장이 모두 끝나자, 전장에는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최후의 전장까지 올라온 타이탄 길드에, 한국 팬들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저들이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로터스의 기사단이 입장하기 시작하자, 그 함성 소리는 더욱 커졌다.
-로터스! 드디어 로터스 길드의 기사단이 입장을 시작합니다!
-누가 뭐래도 이번 기사 대전에서 최강의 활약을 보여 주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레미르, 피올란, 훈이……! 아, 저기 오랜만에 레비아도 전장에 등장하는군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일인대전의 특성상 사제 클래스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기사단 전투가 되니 역시나 곧바로 엔트리에 들어오는 레비아!
-역시 로터스인가요, 누구 하나 만만해 보이는 멤버가 없습니다.
-타이탄은 과연 이 로터스를 상대로, 얼마나 재밌는 경기를 보여 줄지!
각각 서른 명으로 구성된 기사단이 전장에 마주 서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점령전인 최후의 전투와 달리 섬멸전인 1차전에는 다음과 같은 세부 룰이 적용되고 있었다.
1. 누적 킬 포인트 50킬을 먼저 달성하거나 상대 기사단장을 먼저 처치한 길드가, 전장에서 승리합니다.
2. 전장에서 사망한 기사는 정해진 자리에서 5분 뒤에 부활합니다.(기사단장 제외)
3. 귀환, 순간 이동 등의 공간 이동이 가능한 아티팩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소모성 아이템을 전부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략…….
그리고 이 룰만 봐도 알 수 있듯.
운명의 언덕 첫 번째 전투는 말 그대로 기사단끼리의 진검 승부라 할 수 있는 경기였다.
-잠시 후, 운명의 언덕 기사 대전이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 : 179초
……중략…….
-남은 시간 : 13초
-남은 시간 : 12초
……후략…….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전투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점점 조용해지고.
저벅-저벅-.
각 기사단의 두 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서며,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오랜만이네요, 샤크란 아재.”
“후후, 이렇게 마주하는 건 거의 몇 달 만인가?”
“아마도 그쯤 됐죠?”
오랜만에 만난 서로를 보며, 반가운 표정이 된 이안과 샤크란.
“그나저나 그 아재 소리는 이제 그만할 때 안 됐냐?”
“아재한테 아재라 하지 그럼 뭐라 합니까?”
스르릉-!
이안을 향해 검을 치켜든 샤크란이 씨익 웃으며 대답하였다.
“오늘 내가 이기면, 이제부터 아재 아니고 형님인 거다.”
이어서 그 말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마주 검을 뽑아 들었다.
“흐흐, 영원히 아재라고 불러 드리죠.”
그리고 그렇게.
-남은 시간 : 1초
띠링-!
-포르투나, 운명의 언덕 전투가 시작됩니다!
“와아아아-!”
모두가 기다렸던 기사 대전 최후의 전투가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