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3화 4. 마법 대결 (1) >
“크흐……!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먼!”
따뜻한 햇볕이 내리비추는 한가로운 오후.
오랜만에 집에서 휴식을 즐기는 나지찬은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물론 회사에 할 일이야 산더미처럼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차를 낸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일’은 모두 지워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막대한 일거리가 쌓여 있다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마음 편히 쉴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어지간해서는 휴가를 잘 쓰지 않는 나지찬이 일거리가 쌓여 있는 데도 불구하고 출근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이안갓이 드디어 기사 대전에 왕림하셨는데, 경건한 마음으로 라이브 경기를 시청해 줘야지.’
세계 리그의 정상에서 이안이 어떤 활약을 보여 줄지, 한 장면도 빠짐없이 시청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콜로세움의 첫 번째 전장은 나지찬이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안갓이 나와 줄 줄이야.”
당연히 4~5선발일 것으로 생각했던 이안이 1선발로 나왔다는 사실부터가, 그를 미치도록 흥분케 하였으니 말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체까지 숨긴 채 ‘정령 마법사’로서 전투를 벌이는 이안.
그의 모든 퀘스트를 지켜본 나지찬이야 한눈에 그가 이안임을 알아보았지만,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팬들이 정령 마법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상황이었고, 이 모든 상황이 맞물려 나지찬에게 최고의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안이라면 정령 마법으로도 최소 2킬은 올리겠지?”
딸깍-!
감자칩을 우물거리며 맥주 캔을 따 올린 나지찬은 벌컥벌컥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마시면서도 시선만큼은 단 한 순간도 스크린에서 떼지 않는 나지찬이었다.
“와씨, 벌써 3킬?”
“아니…… 잠깐. 여기서 둘을 더 잡아 버린다고? 아오, 저 등신들은 왜 화염법사를 꺼내 가지고……. 미쳤네. 하아…… 고대 정령 마법 너프해야 되나? 리플렉션 실드 메커니즘이 뭐였지? 저렇게 쉽게 튕겨서 맞출 수 있는 스킬이었나?”
거의 스크린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한 나지찬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콜로세움의 경기를 시청하는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다른 유저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생각들을 떠올리는 나지찬.
카일란의 영상을 보면 항상 분석하는 버릇이 있는 나지찬이었기에, 재밌게 경기를 즐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머리에는 부하가 오고 있었다.
까강-까가강-!
이안이 리챠오의 검술을 지팡이로 모조리 막아 내는 것을 보며, 나지찬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아오, 빨리 이안이 심판 검 꺼내는 거 보고 싶은데…….”
로터스의 내부 사정(?)까지는 모르는 나지찬은 이안이 아직 심판 검과 소환수들을 꺼내지 않는 이유를, 단지 상대가 ‘약해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체 류첸이나 아르케인은 언제 나오려고 안 나오는 거야?”
그리고 그가 판단하기엔 이안이 숨겨 둔(?) 정체를 드러내려면, 발러 길드의 최강자 아르케인이나 천웅 길드의 마스터 류첸이 등장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그쯤 되는 랭커들을 상대론, 정령 마법만으로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
나지찬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거지!”
드디어 그가 바랐던 대로, 류첸이 전장에 등장했으니 말이었다.
* * *
환영파혼진은 평소에, 생존 기술로 많이 사용되는 진법이었다.
진의 바깥에서는 진법을 파괴할 방법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강력한 공격을 계속해서 두들기면 언젠가는 내구력이 전부 다 닳겠지만, 모든 피해량을 70%만큼 감소시키는 무지막지한 기본 고유 능력을 가진 진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전자가 자신의 마력을 소모하여 계속해서 내구력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 사실상 이 진법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시전자를 처치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인 것.
그래서 보통 환영파혼진은 길드 단위의 다수를 한 번에 살리고자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다.
파티 전체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며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 낼 수 있는 기술은, 이 환영파혼진 이상의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렇게,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할 때도 있지만 말이야.’
이안과 눈이 마주친 류첸의 입꼬리가 점점 더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가 지금 기분이 좋은 이유는 제법 복합적인 것이었다.
우선 킬 포인트를 다섯 개나 삼킨 저금통(?)이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단연 첫 번째 이유였으며, 이 싸움이 제법 재밌을 것 같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류첸은 평소에도 PVP를 즐겨 하는 편인 데다, 마법사끼리의 전투를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종류의 마법사인 ‘정령 마법사’와의 전투에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밌는 마법을 쓰는구먼그래.”
대치 상황에서 슬쩍 입을 여는 류첸을 향해, 이안이 가볍게 대꾸하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류첸이 이안에게 흥미를 느꼈듯, 그것은 이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용하는 마계의 주술 또한, 결코 흔한 종류의 마법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이 친구랑은 언젠가 한 번 더 싸워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사실 류첸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둘은 이미 구면이라 할 수 있었다.
중간계가 열렸던 초창기 시절.
신의 말판 최후의 전장에서, 마지막까지 혈전을 벌였던 상대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춰 놓고 있었다.
사실 소환수들과 심판 장비들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 이안이 류첸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정보의 차이’ 때문에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안은 류첸이 가진 고유 능력들을 대부분 다 꿰고 있었지만, 류첸은 눈앞의 정령 마법사가 이안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류첸은 전투 내내 이 환영파혼진을 유지할 것이기에, 이 또한 제법 큰 페널티라 할 수 있었다.
파혼진은 계속해서 류첸의 마력을 갉아먹을 것이고, 그것은 류첸의 플레이에 많은 제약을 두니까.
‘쉽진 않겠지만, 해볼 만하다는 거지.’
이안은 더욱 승부욕을 불태우며, 류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런 이안을 향해, 류첸이 커다란 칠흑빛 지팡이를 휘둘러 올렸다.
“악령소환진……!”
이어서 전장 곳곳에서, 붉게 빛나는 마수들이 소환되기 시작하였다.
* * *
-아, 류첸! 류첸이 등장했습니다!
-역시 지략가로 유명한 유저인가요? 이런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등장을 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웅 길드가 탈락하는 이변을 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러기는 힘들겠군요!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이, 수많은 마수들이 전장에 소환되었다.
케르베로스와 같은 중상급의 마수들부터 시작하여, ‘데빌 발록’과 같은 최상급의 강력한 마수들까지.
마수들은 이안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하였고, 그 장면을 보며 나지찬은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가장 소환술사같은 마법사와, 가장 마법사같은 소환술사……. 이렇게 재밌는 대결을 보게 될 줄이야.’
류첸의 클래스는 마법사 카테고리 안에 있는 마계 주술사였지만, 웬만한 소환술사보다도 더 강력한 소환 마법을 사용한다.
반면에 이안의 클래스는 분명한 소환술사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지간한 대마법사 뺨을 후려칠 수준의 강력한 정령 마법사였다.
때문에 이 전장을 지켜보는 나지찬은 점점 더 기대가 커지고 있었다.
“자, 이안……! 이제 너도 소환을 시작하라고! 심판 검은 안 써도 좋으니까, 제발 소환이라도 좀 해 봐…….”
류첸이 소환하는 강력한 마수들과, 이안이 소환하는 더욱 강력한 소환수들.
반대로 이안이 사용하는 강력한 마법들과, 류첸이 가지고 있는 더욱 강력한 주술 마법들.
절묘하게 비슷한 대칭 구도로 만들어진 지금의 상황에서 나지찬의 마음은 두 랭커들의 총력전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안은 나지찬의 바람에 부응해 주지 않았다.
우우웅-콰콰쾅-!
기존에 소환해 두었던 정령들과 함께 지팡이만을 휘두르며, 그 모든 마수들을 마법으로만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스 파이크!”
쿠콰쾅-!
“머쉬 퀘이크……!”
쿠르르르릉!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지찬은 어이없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류첸이 등장했는데도, 마법만 쓰겠다고?’
이쯤 되면 이안의 자신감이, 거의 만용으로 보였으니 말이었다.
‘자체 밸런스 조절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훈이와 맺은 협약(?)의 내용에 대해 모르는 이상,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물론 이안이 소환수를 소환한다고 하여, 전투력이 그만큼 무조건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환수를 소환하고 운용하는 만큼 소환 마력이 빨려 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고대의 정령 마법들을 난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안이 소환수들을 소환했을 때, 최소 1.5~2배 정도 강력해지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답답함과 흥미로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품은 채, 나지찬은 스크린에 계속해서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구구궁-!
-류첸이 데스 메테오를 소환했습니다! 아, 이걸 어떻게 막아내려는 걸까요!
콰앙-!
-이, 이걸 리플렉션 실드로 막아 냅니다!
-곧바로 반격이에요!
-그렇습니다! 로터스의 정령 마법사가, 또다시 냉기 지옥을 뿜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캐스팅 수 싸움에서 류첸을 이겼어요!
-류첸의……! 류첸의 마수들이 전부 다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지찬 또한 더욱 흥분하였다.
“그렇지! 그렇게 막아 내면……!”
-아, 하지만 여기서 디스펠이 터지는군요!
-마수들의 발목을 잡았던 얼음들이 그대로 녹아 버렸어요!
-류첸은 여기까지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경기를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나지찬은 감탄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와씨, 류첸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한다고?”
전반적인 경기 내용 자체는 이안이 류첸에게 밀리고 있었지만.
오직 마법만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미 이안의 압승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정령과 정령 마법만을 사용하는 이안의 전력은 본래 가진 전투력의 3~4할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경기를 지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지찬은 순간 얼굴이 굳어 버렸다.
“잠깐, 근데…… 여기서 이안이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팬으로서 순수히 이안을 응원하다가도, 결국 기획자로서의 고뇌가 떠올라 버렸으니 말이었다.
“하, 이안 저거……. 어떻게 혼자 격리시킬 방법 없나?”
이안이라는 플레이어가 있음에 팬으로서 감사하면서도, 그 고마움이 커질수록 기획자로서의 고통은 더욱 커지는 아이러니가 계속되는 것이다.
“후우…… 그래. 오늘만큼은 류첸을 좀 응원해도 괜찮겠지. 이안을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제발 소환술이라도 꺼내게 만들어 줘…….”
그리고 그렇게, 나지찬이 고뇌에 빠져있던 그때.
-앗, 저 마법진은 뭔가요?!
-류첸의 앞에 갑자기 커다란 마법진이 나타납니다!
마치 나지찬의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류첸이 새로운 마법을 꺼내 들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
지금까지 마수들을 소환했던 마법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화려한 어둠의 소환 마법진.
캬아아오오!
이어서 그곳에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카일란에 등장한 적 없었던 거대한 마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