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2화 3. 정령 마법사의 등장 (3) >
* * *
전황은 대체로 이안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이제까지가 이안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면, 새로운 검투사들이 유입된 뒤부터는 무척이나 치열해진 것이다.
어쨌든 정령 마법사로서 이안이 가지고 있는 고대 마법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때문에 타 길드의 검투사들이 어느 정도 이안을 상대하기 위한 상대법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같은 마법 패턴에 당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후후.”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패턴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거라고.”
천웅 길드 검투사의 비아냥에 이안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의 말이 결코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정령 마법사로서의 가능성은 이미 충분히 보았으니 말이었다.
‘확실히 최상위 랭커들이라는 건가? 적응이 빠르네.’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아쉬움에, 이안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융합을 그냥 하지 말고, 여러 가지 마법을 쓸 걸 그랬나? 아니지. 그랬으면 이런 퍼포먼스가 애초에 불가능했을 거야.’
고대의 마법을 한 두세 가지만 더 가지고 있었더라도, 전투에서 창출해 낼 수 있는 변수는 열 가지도 넘게 늘어났을 테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의 전투에 대한 아쉬움일 뿐, 고대 정령 마법에 대한 아쉬움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차피 고대의 정령술은 이제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일단 지금은 제한 속에서 최선을 찾아내야지.’
타타탓-!
이안의 공격 마법들을 피해 낸 천웅 길드의 검투사가 돌진기를 사용하여 빠르게 이안의 앞으로 접근하였다.
쉬이익-까앙-!
마법으로 대응하기에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의 날카로운 접근이었고, 때문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지팡이를 꺼내어 휘둘렀다.
깡-까가강-!
마치 창술을 사용할 때처럼, 지팡이를 이용하여 상대의 현란한 검술을 막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무기 막기’에 성공하여, 피해량을 79%만큼 흡수합니다.
-‘무기 막기’에 성공하여, 피해량을 87%만큼 흡수합니다.
-‘무기 막기’에 성공하여, 피해량을 84.5%만큼 흡수합니다.
……후략…….
그리고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을 힐끔 확인한 이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으씨, 역시 지팡이라 그런가? 무기 막기 효율이 제대로 안 나오네.’
검에 비해 공격 속도 자체가 현저히 느린 지팡이다 보니, 이전만큼 완벽한 무기 막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심판 검을 들었더라면 전부 90% 이상의 데미지 흡수를 해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높아야 80% 정도밖에 수치가 나오질 않았으니, 이안으로서는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근접전을 쭉 유지하는 건 부담스러운데.’
사실 이안처럼 민첩성 스텟이 높지 않은 일반 마법사였다면, 지팡이로 무기 막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던 상황이지만.
평소만큼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울 뿐, 그런 객관적(?) 사실은 이안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블래스터!”
콰콰쾅-!
한 차례 검투사의 공세를 막아 낸 이안은 블래스터를 컨트롤하여 오히려 그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블래스터 또한 고유 능력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면 언월도를 든 근접 공격형 정령이었기 때문에, 근접 전투가 취약한(?) 이안을 충분히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이어서 깔끔하게 마지막 공격을 막아 낸 이안은 그대로 후방으로 도약하여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까앙-!
한 차례 공방을 주고받으며 상대의 전투 타입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이제 역공을 준비해 볼 차례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근접에서 해결해 보려 했지만…….’
지팡이를 등에 둘러 멘 이안의 손에,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하였고.
화륵-!
이어서 그런 이안의 몸놀림에 콜로세움은 다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아 저게 지금 뭔가요!
-마, 마법사가……! 무기 막기를……!
-마법사가 무기 막기로, 전사 클래스의 근접 스킬들을 전부 다 막아 버렸어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콜로세움의 상부 스크린에는 이안의 무기 막기 장면이 슬로우 비디오로 재생되기 시작하였고, 해설진들은 그것을 보면서 침을 튀어 가며 설명하였다.
-어쭙잖은 초보 검사의 검을 막아 낸 것도 아니고, 천웅 길드의 랭커를 상대로 무기 막기를 했어요.
-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지팡이를 들고 어떻게……!
-지팡이의 무기 공격 속도가, 대체로 매우 느림이죠?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민첩성이 주 스텟인 암살자가 지팡이를 든다고 해도,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네. 카일란의 무기 공격 속도는 스텟으로 상승한 모든 스피드를 최종 비율로 다시 연산하는 시스템이거든요.
-아……!
-차라리 평범한 공속을 가진 완드류 장비면 모를까……. 저건 아무리 봐도 양손 지팡인데 말이죠.
그리고 놀란 것은 당연히 해설진 뿐만이 아니었다.
해설이 콜로세움에 울려 퍼질수록 게임 지식이 부족한 일반 관중들 또한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으며.
“와아아……!”
“전투 마법사다!”
“대박!”
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이안의 상대였던 천웅 길드의 검투사.
‘리챠오’였으니 말이었다.
* * *
‘뭐지? 지팡이로 이걸 막는다고……?’
보통의 마법사들은 근접전에 무척이나 취약하다.
그 때문에 PVP에서 마법사를 잡기 위한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최대한 날카롭게 거리를 좁히고 파고들어, 근접전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지근거리에서 계속해서 괴롭히면 마법사는 당연히 마법 캐스팅을 하기 힘들었고, 그렇게 공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그대로 자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일 뿐, 랭커급의 마법사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캐스팅이 거의 없는 실드 마법과 블링크 계열의 마법을 번갈아 사용하며, 다시 틈을 만들고 시간을 벌어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천웅 길드의 검투사 ‘리챠오’도 이 공격 한 번에 이안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었다.
다만 그가 당황한 것은 이안의 대응 방식이 마법사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런 혼종이…….’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상황으로 인한 당황스러움이 지나가고 나자, 그의 얼굴은 시뻘게질 수밖에 없었다.
‘으득……!’
중국 서버 전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인 그의 공격이 마법사의 지팡이질(?)에 모조리 막혀 버렸으니.
당장의 상황이 어떤지와 별개로, 이런 모욕이 없었던 것이다.
“후우우…….”
만약 관중 없이 벌어진 일대일의 대전이었더라면 조금 덜 부끄러웠겠지만,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전장은 세계 모든 카일란 유저들이 지켜보고 있는 콜로세움.
자신의 아이디야 비공개 처리되어있지만, 이미 중국 유저라면 자신이 누군지 전부 다 알 것 이었으니.
자존심 강한 랭커로서는 기분이 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놈…… 넌 내 손에 죽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방을 확인한 리챠오는 다시 경악스런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핑-피피핑-!
다시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돌진 스킬을 사용하려던 그에게, 돌연 십수 발의 불화살이 날아들었으니 말이었다.
‘이건 또 뭐……!’
까가강-!
심지어 그 공격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정교하고 정확하게 리챠오의 약점들을 노리고 있었으니, 이것은 랭커급 궁수의 사격이라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이었다.
‘정령 마법인 것 같긴 한데…….’
이안의 불화살들을 빠르게 쳐 낸 리챠오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대기실에서 이미 전부 파악했다 생각한 이안에게서, 새로운 능력들이 연달아 튀어나왔으니 말이었다.
마치 까도까도 끝이 없는 양파마냥, 계속해서 새로운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이안.
그런 그를 향해 다시 칼을 겨눈 리챠오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이번엔 무조건 승부를 본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카드를 전부 꺼내서라도, 여기서 이안을 잡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리챠오가 고유 능력들을 발동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 나와 그의 검을 타고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최후의 순간에 꺼내려고 준비해 왔던,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검술 중 하나인 ‘파괴의 검술’을 시전한 것.
고오오오-!
하지만 다음 순간, 파괴의 검술로 단숨에 이안을 처치해 버리려던 리챠오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었다.
띠링-!
“큭.”
그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천웅’길드의 대기실에서 교체권을 사용하였습니다.
-교체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길드 마스터 류첸이 교체권을 발동시켰고, 그것은 곧 그에게 대기실로 돌아오라는 명령과 다름없었으니 말이었다.
‘젠장……!’
물론 교체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곧 마스터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
게다가 류첸의 의도 또한 짐작할 수 있었기에 리챠오는 순순히 교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숨겨 둔 패를 꺼내 드는 게 못마땅하셨겠지. 로터스에서는 아직, 이안은커녕 레미르나 훈이도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야.’
위이잉-!
리챠오가 교체를 수락하자, 콜로세움 전체에 예의 그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띠링-!
-천웅 길드에서 ‘교체권’을 사용하였습니다!
-천웅 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다른 인원으로 교체됩니다.
이어서 천웅 길드의 진영 마법진이 가동되며, 새로운 검투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일렁임과 동시에 그 위로 솟아오르는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 쓴 핏빛 그림자.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콜로세움에 또 한 번 뜨거운 열기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아앗! 천웅 길드에서 교체권을 사용했습니다!
-이, 이럴 수가!
-……!
지금의 타이밍에서 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던 남자.
카일란에서 유일하게, 핏빛으로 일렁이는 붉은 그림자를 가진 남자.
그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었다.
-어둠의 주술사……! 류첸입니다!
-정말 류첸입니다! 류첸이 나타났어요!
-천웅 길드에서, 초강수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어서 전장에는 핏빛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 * *
사실 리챠오의 짐작은 틀린 것이었다.
류첸이 교체권을 사용하여 리챠오를 불러들인 이유.
그것은 결코, 리챠오의 숨겨진 패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멍청한…… 저 타이밍에 파괴의 검술을 쓴다 해서, 절대로 놈을 잡을 수 없을 것인데.’
다만 류첸이 교체권을 사용한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하고 확실한 이유 때문이었다.
‘엇……!’
콜로세움에서 한 검투사의 목숨과 비견될 만한 가치를 지닌 교체권을 사용한 이유는 그것을 사용함과 동시에 최소 2킬 이상을 따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예 검투사 ‘리챠오’가 교체를 수용하였습니다.
-전장으로 입장합니다.
스콜피온 길드와 호왕 길드의 두 검투사들을 동시에 처치해 버릴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을, 전장 안에서 읽어 낸 것이었을 뿐.
이안과 리챠오가 싸우는 사이 삼파전을 벌이고 있던 전장에 난입하여, 두 개 이상의 킬 포인트를 슬쩍 주워 담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스하아아아-!
그리고 그의 계획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콰쾅-콰콰쾅-!
-‘천웅’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킬 포인트를 1Point 획득하였습니다.
-‘천웅’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킬 포인트를 1Point 획득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생명력이 남아 있던 발러 길드의 검투사를 제외한 나머지 둘의 킬 포인트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좋아, 이제 밑밥은 깔렸고……!’
게다가 생존한 발러 길드의 검투사 또한 곧바로 교체 카드를 사용하여 전장 밖으로 역소환되었으니, 류첸이 원했던 완벽한 ‘판’까지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길어야 10초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장에 류첸과 ‘정령 마법사’ 둘만이 남은 일대일의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계획대로 깔끔하게 로터스의 마법사를 처치한다면, 천웅 길드는 단숨에 다시 조 1위로 치고 올라가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류첸이 그리는 완벽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후후, 이거 마치 저금통을 따는 기분인데?’
이어서 모든 계획을 머릿속에 떠올린 류첸은 곧바로 준비해 뒀던 주술을 발동하였다.
“환영파혼진(幻影破魂陣)……!”
그러자 이안과 류첸의 주변으로 붉은 기의 막이 겹겹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좋아. 이제 아무도 내 밥그릇을 건드릴 수 없겠지.’
류첸이 죽기 전에는 그 누구도 해체할 수 없는 진법인, 환영파혼진이 발동된 것.
환영파혼진은 어떤 공격성도 갖지 않은 진법이었으나, 류첸이 이 진법을 발동시킨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의 저금통(?)인 이안의 막타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일대일의 결투장 안에서 이안을 처치하기만 하면 되는 것.
이안을 노려보는 류첸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