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1화 3. 정령 마법사의 등장 (2) >
기사 대전을 대하는 길드원들의 자세는 모두가 다 제각각이었다.
어떻게든 길드의 우승이 최우선인 길드마스터 헤르스 같은 인원들도 많았지만, 길드의 우승만큼이나 본인의 활약도 중요한 훈이나 레미르 같은 길드원들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이안 같은 케이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본인의 활약, 길드의 우승보다도 자기만족적인 요소인 ‘흥미’와 ‘탐구’가 최우선인 이안 같은 유저 말이다.
그리고 그런 특이 케이스인 이안 덕분에, 기사 대전에 이런 흥미진진한 이벤트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와아아……! 정령법사 대박이다!”
“좋았어! 이대로 다 쓸어 버리라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로터스의 진영에 등장한 신비의 정령 마법사.
그의 활약은 지금 콜로세움 안의 관중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하게 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아무도 밝혀내지 못하였지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카일란의 팬들이 이런 E-스포츠를 시청하면서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의외성’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로터스 정령 마법사의 활약은 그 기대치를 훌쩍 넘기는 수준이었으니 말이었다.
-대박,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랭커지?
-갑자기 저런 톱 티어 랭커가 뚝 떨어지는 게 가능한가?
-톱 티어 랭커라기에는 아직 검증이 덜 됐죠.
-그건 또 무슨 말임. 지금 등장하자마자 5킬 땄는데.
-윗님 말이 맞음. 혼자 무쌍 찍고 있는데, 무슨 검증이 또 필요하다는 건가요?
-사실 지금 저 랭커가 쉽게 킬 포인트를 올리고 있는 데에는, 정령 마법사라는 알려지지 않은 클래스의 이점이 크니까 하는 말입니다.
-흐음.
-최상위권 랭커들 사이에서는 정보 하나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하니까요.
-맞는 말이긴 한데…….
-물론 그런 이점을 가졌다 한들, 뛰어난 실력이 없다면 저런 활약은 불가능하겠지만…… 조금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도, 역시 가장 흥분 상태인 이들은 로터스의 길드원들을 비롯한 수많은 로터스의 팬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긴장 상태로 콜로세움의 대기실에 있던 로터스의 수뇌부 또한,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캬, 미쳤다. 역시 이안 형이야!”
로터스의 대기실에서 경기를 구경하던 카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바로 옆에 있던 레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진짜 이안 님은 엄청나네요.”
“그쵸?”
“매번 물리 계열 무기들만 사용하셔서 몰랐는데…… 마법 이해도가 이 정도로 높을 줄은 몰랐어요.”
“저 형은 그냥 괴물이에요.”
끄덕-.
“그냥 논외로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합니다.”
끄덕-.
이안의 활약으로 인해, 로터스 대기실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이안이 미리 쌓아 둔 포인트가 있으니, 뒤에서 똥을 좀 싼다 한들 어느 정도 커버가 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담감을 덜 수 있다는 것은 기사 대전같이 글로벌 규모의 큰 경기에서 엄청난 이점이 될 수 있는 것.
지금 가장 얼굴이 밝은 것은, 길드마스터인 헤르스라고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순서로 훈이에 이어 레미르 누나까지 배치해 뒀으니…… 잘하면 시작부터 굳히기에 들어갈 수도 있겠어.’
이안은 아무리 막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자기 입으로 뱉은 약속만큼은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헤르스가 이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대신, 그는 위기 상황에서 무조건 ‘교체’티켓을 수용하기로 하였으니, 큰 이변이 있지 않는 한 이안을 보험 카드로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훈이와 레미르 선에서 승리를 확정 짓지 못한다고 해도, 유신에 이안까지 뒤 라인을 다시 튼튼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보수적으로 생각하는 헤르스가 보기에도, 사실상 2위 이상은 이미 확보가 된 상황.
“좋았어. 딱 2킬만 더 따 보자, 진성아.”
하지만 그런 헤르스의 바로 옆에는 그와 완전히 상반된 표정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헤르스의 표정이 안도, 기쁨, 환희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면, 불안, 초조. 혹은 분노(?)와 같은 표정을 한 사람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그의 정체는 바로, 이안의 다음 순서로 출전을 기다리고 있던 훈이.
‘아니, 저 형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네, 진짜.’
콜로세움 전투의 MVP를 꿈꾸고 있던 훈이로서는 이안이 활약하면 할수록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교체권 그냥 지금 쓰자고 하면 안 되나…… 하아…….’
훈이가 이번 전장에서 MVP를 노렸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콜로세움 전투에서는 이안까지 차례가 가지 않아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안만 없다면 자신이 충분히 MVP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훈이로서는 다음 전장인 운명의 언덕이나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그 뒤의 전투로 넘어갈수록 MVP를 따보기 더욱 힘들어지는 것.
“크흑.”
하지만 그런 훈이의 슬픔을 알 리 없는 이안은 더욱 신나게 전장에서 날뛰기 시작하였다.
* * *
처음 이안이 2킬을 가져갔을 때, 각각 그 킬 포인트를 헌납한 천웅 길드와 스콜피온 길드는 곧바로 다음 출전자를 내보내며 카운터 어택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두 길드의 그러한 선택은 단순히 반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정황상 이안이 빙계 마법사라는 확신을 가졌고, 그에 대해 카운터를 칠 수 있는 확실한 카드를 보유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킬 포인트 손실을 메우기 위한,빠른 대응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운터 카드로 꺼내든 두 화염법사가 속수무책으로 또다시 킬 포인트를 내줘 버린 지금,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
5명 이상의 정예 검투사가 전사하는 순간 길드가 검투장에서 아예 아웃되기 때문에, 섣불리 다음 카드를 내놓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검투장에서 먼저 아웃된다 하더라도 킬 포인트를 압도적으로 따 놓으면 상관이 없었지만, 천웅과 스콜피온 길드의 킬 포인트는 현재까지 제로였다.
-아, 이렇게 되면 천웅 길드와 스콜피온 길드는 너무 위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거 아직까지 마틴이 버티고 있는 호왕 길드가, 어쩌면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그저 버티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끝까지 생존하더라도, 킬 포인트에서 너무 밀리면 수포로 돌아가니까요.
-그래도 생존 자체가 의미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결국 이 검투장의 모든 승점 중 가장 큰 지분은 생존 점수에 있으니 말입니다.
검투사가 사망한 경우, 다음 검투사를 투입해야 하는 제한 시간은 10초.
천웅과 스콜피온은 이 10초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10초 동안 전장에 남아 있는 타 길드의 검투사들이 조금이라도 치고받으며 싸워야, 다음 검투사를 투입했을 때 더 수월하게 싸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때문에 두 길드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발러 길드에서 10초를 전부 채운 뒤 두 번째 검투사를 투입하였다.
위이잉-!
-발러 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전장에 입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띠링-!
-호왕 길드에서 ‘교체권’을 사용하였습니다!
우우우웅-!
호왕 길드의 정예 검투사였던 마틴이 대전장 바깥으로 역소환되었다.
-호왕 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다른 인원으로 교체됩니다.
이안의 눈치를 보고 있던 호왕 길드에서 서둘러 교체권을 사용한 것이다.
-역시 호왕 길드에선 빠르게 교체 카드를 쓰는군요!
-사실 발러 길드에서도 교체 카드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첫 킬을 내주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요.
-워낙 변칙 공격에 당한 터라, 타이밍을 놓쳤던 게 아닐까요?
-어쩌면 전략적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교체 카드를 아낀 것 또한, 충분히 의미 있는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이 급박하게 상황이 굴러가는 콜로세움의 한복판에서, 홀로 여유롭게 서 있는 이가 있었으니.
“후후.”
그는 다름 아닌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한 명, 바로 이안이었다.
‘크, 생각보다 정령 마법이 더 강력한데?’
처음부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이안은 결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입장했다면 슬슬 긴장감을 더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이제 슬슬 더 재밌어지겠군.’
이제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이안이 이 콜로세움에서 ‘생존’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선 호왕 길드를 제외한다면 다른 길드들의 남아 있는 출전 멤버는 지금까지보다 더 뛰어난 랭커들일 것임이 첫 번째 이유였으며, 두 번째로는 5킬이나 먹은 탓에 이안의 ‘가치’가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콜로세움에서는 같은 킬 포인트라도 높은 킬 관여율을 가진 검투사를 처치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승점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길드의 우승에 큰 관심이 없을지언정, 기사 대전의 구조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빠삭하게 꿰고 있는 이가 바로 이안이었기에, 그는 앞으로의 전개를 거의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틈이 보이면 누구든, 바로 나부터 노리기 시작하겠지. 하지만 2등이라도 해야 하는 이상, 합공을 하더라도 언제든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는 할 거고.’
그리고 이안이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전장은 새로운 구도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천웅 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전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스콜피온길드의 ‘정예 검투사’가 전장에 입장하였습니다!
발러 길드의 새로운 검투사가 섣불리 이안을 선공하지 않고 기다렸기 때문에, 그사이 다시 나머지 길드들의 검투사도 입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검투가들이 입장한 순간, 대전장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구도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타탓-!
쿠우웅-!
처음 전투에서는 이안이 먼저 선공하며 전장을 주도했다면, 이번에는 나머지 넷이 먼저 검을 뽑아 들었으니 말이다.
바야흐로 난전의 시작인 것.
그리고 그 난전 속에서, 이안은 첫 번째 위기(?)를 맞게 되었다.
* * *
“오호, 저놈 봐라?”
대기실에서 전황을 구경하던 천웅 길드의 길드마스터 류첸은 점점 더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벌써 2데스나 누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안하거나 초조한 기색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유는 사실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류첸이 믿고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강력함이었고, 적어도 로터스를 제외한 다른 세 곳의 길드들은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릴 자신이 있었기에 나오는 자신감이었던 것이다.
“어쩌시겠습니까, 마스터?”
“뭘?”
“2데스나 내줬는데…… 아직 승점이 전무하지 않습니까.”
길드원 ‘샤오핑’의 걱정 어린 말에 류첸은 피식 웃으며 전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지금 전장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정령 마법사가 서있었다.
“저기 저놈이 있지 않느냐.”
“예……?”
“저놈 혼자서 저렇게 킬 포인트를 쓸어 담고 있는 이상,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어차피 저놈 하나만 꿀꺽할 수 있으면, 무조건 2등은 확보된다는 뜻이다.”
“아……!”
류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전장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또다시 열심히 마법을 캐스팅 중인 ‘정령 마법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놈이야. 하지만…….’
류첸은 로터스의 정령 마법사를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 랭킹 최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자신에 견줄 정도로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 또한 가지고 있었다.
‘자, 이제 남은 밑천까지 다 꺼내 보거라.’
그에게는 아직 세상에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