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2화 8. 트로웰을 깨우다 (2) >
* * *
나지찬은 오랜만에 DB가 저장되어 있는 서버실로 향했다.
갑작스런 날벼락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 그가 하려는 일은 명확하였다.
‘이안에게 던져 줄 미끼. 어떻게든 그걸 찾아야 돼.’
이안이 퀘스트를 진행하여 연계된 에픽 퀘스트를 받기 전에, 해당 퀘스트와 관련된 콘텐츠들을 싹 다 개발해 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은 사실 ‘카일란’ 개발팀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타 게임들의 경우.
유저가 예상 이상으로 콘텐츠를 빠르게 진행하면, 업데이트 기간까지 해당 콘텐츠를 막아 버리는 게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유저의 콘텐츠가 막히면 안 된다’는 LB사의 암묵적 내규 때문에, 이런 웃지 못 할 상황이 매번 벌어지는 것.
나지찬은 이 암묵적 규정 때문에 수없이 야근을 해 왔지만, 그렇다고 윗선에 크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LB사의 고집스러움이, 카일란을 세계적인 게임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고생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인센티브 하나는 확실하게 챙겨 줬고 말이다.
‘어디 보자…… 서버 담당자는 퇴근했겠지? 누가 당직을 서고 있으려나.’
서버실에 도착한 나지찬은 드르륵 문을 열고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본래 기획자가 서버실에 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나지찬만큼은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직접 서버실, 개발실에 왕래하는 거의 유일한 기획자가 그였으니 말이다.
“여, 송 대리. 오늘도 당직이야?”
나지찬의 목소리에,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당직자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 나 팀장님. 이 늦은 시간에 또 무슨 일이십니까. 한동안 안 보이시더니요.”
눈을 부비적거리는 와중에도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여는 송수한을 보며, 나지찬이 피식 웃었다.
“내가 여기 무슨 일로 왔겠어.”
“하긴…… 또 DB 뜯어 보러 오셨겠죠.”
“이안 로그나 좀 따서 정리해 줘. 골치 아픈 일이 또 생겨서 말이야.”
“하, 또 이안입니까?”
“근 1주일 정도 기간이면 될 거야 오늘은.”
“1주일치 DB를 너무 쉽게 얘기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난번엔 거의 한 달치 뜯은 적도 있는데, 뭐.”
“…….”
송수한에게 부탁을 마친 나지찬은 푹신한 당직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가 오늘 이안의 DB를 뜯어 보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이안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게 뭔지 찾아야 해.’
이안에게 줄 가장 효과적인 미끼를 찾기 위해, 최근 그의 플레이들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안이 가장 갖고 싶을 만하면서, 당장 콘텐츠 밸런스에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을 찾는 것이, 오늘 퇴근 전까지 나지찬이 해야만 할 일이었다.
물론 퇴근 시간은 벌써 한참 지났지만 말이다.
드르륵- 딸깍-!
인쇄된 플레이 로그를 뽑아 든 송수한이 능숙한 솜씨로 그것들을 정리하여 나지찬에게 건네었다.
“고마워, 송 대리.”
“별말씀을요. 이건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쇼파에 앉은 채 서류 뭉치를 받은 나지찬은 차근차근 데이터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게임 회사라면 기획자가 플레이 로그를 읽어서 뭔가 찾아낸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겠지만, LB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코드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로그 출력 시스템이 편리하게 자리 잡혀 있었으니 말이다.
어느새 날카로운 표정이 되어 로그를 읽어 내려가는 나지찬에게 송수한이 찻잔을 건네었다.
“차라도 한 잔 하시면서 일하시죠.”
“땡큐.”
“어휴. 그거 대충 봐도 몇백 장은 되는 것 같던데. 언제 다 읽으시려고 그럽니까?”
송수한의 걱정 어린 물음에, 나지찬은 피식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뭐, 시간이야 좀 오래 걸리겠지.”
그의 걱정처럼 몇백 장짜리 로그를 전부 검토하는 것은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시간이야 오래 걸릴지언정 나지찬에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재밌으니까.’
만약 평범한 유저의 플레이 로그를 몇백 장 살펴야 한다면 한숨부터 나오겠지만, 이안의 플레이 로그는 이야기가 좀 달랐으니 말이다.
이안이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타임 라인을 따라가며 읽어 내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재밌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디 보자…… 이안갓 못 본 지 오래됐는데, 요즘에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군그래.’
나지찬은 소파에 앉은 자세 그대로, 쉴 새 없이 로그를 읽어 내려갔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송수한은 어느새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다.
거의 석상처럼 숨조차 쉬지 않고 데이터를 읽어 내려가는 나지찬을 보고 있으니, 졸음이 더 크게 쏟아진 것이다.
쌔액- 쌔액-.
그렇게 너덧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끼익-.
미동조차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던 나지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흠, 좋아. 이거면 충분하겠군.”
그리고 플레이 로그 안에서 뭔가를 찾아낸 것인지, 나지찬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반격의 시작’ 퀘스트의 보상은 ‘태고의 땅’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가장 비중 있고 이안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상은 그것이었지만, 그 외에도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한 보상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잡화 아이템인 ‘정령왕의 상자(대지)’아이템이었다.
-‘정령왕의 상자(대지)’ 아이템을 오픈합니다.
-‘트로웰의 은총(전설)(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대지의 정령 소환서(상급)’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트로웰의 은총>
-분류 : 잡화(소모품)
-등급 : 전설(초월)
-대지의 정령왕 트로웰의 은총이 담긴 성스러운 마석입니다. ‘대지의 신단’에 이 물건을 가져간다면, 고대의 보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정령왕 트로웰’에게 이 물건을 가져간다면 특별한 퀘스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저 ‘이안’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되는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대지의 정령 소환서(상급)>
-분류 : 잡화(소모품)
-등급 : 전설(초월)
-상급 대지의 정령, ‘투르칸’을 소환할 수 있는 소환서입니다. 소환된 정령의 능력은 일정 기준 안에서 랜덤하게 설정됩니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되는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역시 상자 까는 맛은 좋단 말이지.’
정령왕의 상자에서 나온 아이템들을 확인한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태고의 땅’을 살필 때처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잡화 아이템인 만큼 가치와 별개로 단순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트로웰의 은총은 신단에 가져가거나 트로웰에게 건네주거나 택1인 것 같고…… 대지의 정령 소환서 이건 좀 애매하군.’
이안이 대지의 정령 소환서가 애매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소환서에서 소환된다는 정령인 대지의 상급 정령 ‘투르칸’이 크게 끌리지 않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희귀한 녀석인 것은 맞지만 고유 능력들이 이안의 플레이 성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
‘은총은 아무래도 트로웰에게 가져다주는 게 좋겠지. 신단에 가는 것보단 정령왕을 찾아가는 게 더 난이도가 높으니, 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소환서는…… 경매장에 팔아야겠군. 제법 비싸게 팔 수 있겠어.’
하여 새로 얻은 아이템들의 처분(?)을 결정한 이안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인벤토리를 닫았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대전사님?”
크로네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내딛었다.
“네. 지체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안이 앞장서기 시작하자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동이 시작되자, 풀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전신을 옥죄기 시작하였다.
‘왜 이렇게 조용해?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리가 없는데?’
분명 이대로 순조롭게 트로웰에게 도달할 수 있을 리 없건만, 이상할 정도로 던전 내부가 고요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깊숙한 곳에서는 어떤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으니.
이안뿐 아니라 모든 일행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절대자님.”
하지만 상황은 이안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요람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적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적을 만날 것에 대한 걱정보다도, 정령왕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걱정될 정도.
‘트로웰을 찾으려면…… 우선 대지의 인도자를 찾는 게 빠르겠어.’
하여 요람의 최심부까지 들어왔던 이안은 다시 걸음을 돌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대지의 인도자는 요람의 2층에 있을 것이었고, 그를 찾아가는 게 퀘스트 진행상 맞다고 여겨졌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요람 지하에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 오히려 상층부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달한 이안 일행들.
이어서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
이안은 초입부터 느껴졌던 불길함의 정체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요람의 2층에 도착하자마자, 거대한 오염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크르륵- 크르르르-!
온몸에서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특이한 생김새의 드레이크들.
녀석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시스템 박스를 확인한 이안은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린 드레이크(키메라 3단계)(유일)/Lv 125(초월)
‘이놈들도 키메라야?’
트리오르 이후에 또다시 ‘키메라’를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1단계도 아닌 2단계.
물론 전설 등급의 소환수인 트리오르보다야 많이 약하겠지만, 숫자가 스무 개체도 넘으니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키메라가 대체 뭐지? 이 녀석들도 한번 포획해 봐야 하나?’
크르렁거리는 녀석들에게로 한 발짝 다가간 이안은 조심스레 포획을 시도해 보았다.
당연히 포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포획 가능한 녀석인지부터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그린 드레이크(키메라 3단계)’몬스터를 ‘포획’합니다.
-대상의 오염도가 너무 높습니다.
-‘포획’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음……?”
이어서 떠오른 메시지에 이안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트리오르가 포획되었으니 당연히 이 녀석들도 포획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의외의 메시지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키메라 단계에 따라, 포획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건가?’
그린 드레이크가 탐나기보단, ‘키메라’라는 콘텐츠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던 이안은, 아쉬운 표정이 되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다 쓸어 버리는 수밖에.”
스르릉-!
이어서 검을 뽑아 든 이안이 드레이크들을 향해 뛰어들었고, 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셀라무스의 전사들도, 일제히 전장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죽어라, 더러운 놈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드레이크들이 입을 쩍 벌리기 시작하였다.
콰아아아-!
그린 드레이크들의 고유 능력인 맹독의 숨결을 일제히 뿜어낸 것이다.
“핀, 태양신의 비호!”
우우웅-!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핀의 광역 보호기를 사용했기에 망정이지, 자칫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던 상황.
스하아아-!
브레스를 흡수해 낸 뒤 침착하게 녀석들의 사이로 진입한 이안은 빠르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콰쾅- 쾅-!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이안의 눈에 특이한 것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뭐지, 저 사슬은?’
키메라화된 그린드레이크들의 등 뒤로, 반투명한 어둠의 사슬들이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