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9화 7. 반격의 시작 (2) >
* * *
대지가 갈라지고 녹 빛과 보랏빛의 기운이 허공으로 퍼져 나온다.
이어서 그 갈라진 어둠 바깥으로, 거대한 나무줄기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건……?”
성인 남성의 몸통보다 굵은 줄기들이 뒤엉키며,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존재.
파괴의 해골 기사 토르와 비견될 정도로 커다란 그 그림자는 기괴한 나무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스하아아-!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이안이 알고 있는 어떤 존재와 무척이나 흡사한 모습이었다.
“트리……오르?”
트리오르는 제법 유명한 전설 등급의 소환수이다.
물론 이안의 신룡들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국 서버를 통틀어 열 개체가 넘지 않을 정도로 희소성도 있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강력한 탱킹 능력과 회복, 정화 능력을 가진, 대지 속성의 강력한 소환수.
게다가 트리오르는 ‘완전체’가 아니었고,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신화 등급으로 진화도 가능한 개체였으니.
이안이 놀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굼뜨고 느릿느릿한 기동성 탓에 이안이 선호하는 류의 소환수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트리오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아니, 트리오르가 아닌가?’
마른침을 한 차례 꿀꺽 삼킨 이안이, 천천히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일정 거리를 확보해야,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그리고 잠시 후, 이안과 녀석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트리오르(키메라 1단계)(전설)/Lv 145(초월)
녀석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시스템 박스를 확인한 이안은 순간 살짝 동공이 확대되었다.
‘키메라? 키메라가 뭐지? 게다가 1단계……?’
또다시 처음 보는 종류의 수식어를 트리오르의 이름에서 발견했으니 말이다.
‘확실한 건, 평범한 트리오르는 아니라는 건데…….’
이안은 눈을 반짝였다.
녀석이 등장한 뒤로 주변에 다른 몬스터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다른 자잘한 녀석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트리오르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하기도 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게는 특별한 느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항상 정령계에서 처치하던 평범한 몬스터들이랄까.
‘혹시 포획도 가능하려나?’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 이안은 천천히 심판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포획이 가능한 타입의 소환수인지도 몰랐으며, 140레벨이 넘는 녀석을 포획할 수 있을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지만,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도는 해 봐야 했으니 말이다.
퀘스트 제한 시간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었으니, 결정한 이상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이안과 다시 눈이 마주친 트리오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하아……! 먹음직스런 냄새가 느껴지는군!”
촤촤촤촥-!
이어서 거대한 넝쿨이 뻗어 나오며, 트리오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 *
이안은 트리오르의 고유 능력을 전부 다 알고 있다.
카일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소환수들의 정보를 꿰고 있는 이안의 머릿속에, 이런 유명한 녀석의 고유 능력 정보가 없을 리 없는 것이다.
‘일단 조심해야 하는 능력은 신성한 속박…….’
‘키메라’라는 수식어 때문에 고유 능력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했지만, 그래도 일단 가지고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녀석을 공략해 보는 것이 정석일 터.
솟아오르는 넝쿨을 피해 낸 이안은 빠르게 녀석을 향해 접근하였다.
‘다른 건 다 맞아 줘도, 절대로 속박에는 걸리면 안 돼.’
트리오르의 고유 능력인 신성한 속박은 얼핏 보면 평범한 속박 계열의 기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대상을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들며, 일정 수준의 마법 피해를 주는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하는 것은 그 속박에 달려 있는 부가 효과.
-적을 속박하는 데 성공할 시, 대상의 생기를 빨아들여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트리오르는 속박한 대상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문제는 그것의 계수가 트리오르 자신의 생명력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탱커인 트리오르의 생명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 그 수치에 비례하여 생명력을 흡수당한다면, 어지간한 딜러 포지션의 유저는 녹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생명 흡수 효과는 마법 방어력과 무관한 고정 피해로 들어오기 때문에,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라 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의 레벨은 140대…… 한번 제대로 걸리면 생명력이 거의 100만 가까이 빨릴지도 모를 일이지.’
하여 침착히 트리오르의 넝쿨을 피해 낸 이안은 날렵하게 그의 지척으로 접근하였다.
스슥-!
이어서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는 악령의 심판 검을 녀석의 심장부에 꽂아 넣었다.
-‘트리오르(키메라 1단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트리오르(키메라 1단계)’의 생명력이 584,987만큼 감소합니다.
굼뜬 녀석에게 치명타를 터뜨리는 것은 이안에게 있어서 너무도 쉬운 일.
깔끔하게 공격이 들어갔음을 느낀 이안은 반사적으로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하였다.
이 공격으로 최대 생명력 대비 얼마 정도 비율의 피해를 입혔는지 확인한다면, 녀석의 스펙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140레벨에 전설 등급 탱커이니…… 대충 700만 정도 되려나?’
하지만 다음 순간.
“……!”
트리오르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한 이안은 당혹스런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예상대로라면 최소 5% 이상의 생명력이 깎였어야 하는데, 깎여 나간 생명력 게이지를 눈대중으로 보아도 그 절반 수준밖에 안 되어 보였으니 말이었다.
이런 식의 데미지 계산을 수 없이 해 온 이안의 눈썰미는 무척이나 정확한 편이었다.
‘1,000만? 아니 한 1,500만까지 봐야 하나?’
치명타 공격 한 번에 50만이 넘는 데미지를 입혔으니, 트리오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1,000만이라는 수치도 그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단순 계산상으로 50만의 데미지를 스무 번 입히면, 1,000만의 수치를 날려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트리오르에게는 탱커치고 약한 방어력 대신 좀비 같은 회복 능력이 있었으니, 생각을 조금 달리 할 필요가 있었다.
-소환수 ‘루가릭스’의 마법, ‘어둠의 부패’가 발동합니다.
-‘트리오르(키메라 1단계)’의 생명력이 70,921만큼 감소합니다.
-‘트리오르(키메라 1단계)’가 상태 이상 효과에 저항합니다.
-‘회복 불가’효과가 무효화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했던 대로, 회복 불가는 면역이로군.’
키메라라는 수식이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알고 있는 트리오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패턴을 보여 주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물리 딜 위주로 녹여야겠고…….’
그리고 루가릭스의 공격에 입은 피해량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트리오르의 방어력은 마법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다.
루가릭스의 어마어마한 마법 공격력에도 10만이 채 안 되는 데미지를 입은 반면, 이안의 칼질 한 번에 50만이 넘는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다.
‘이러면 기계 드래곤처럼 심판의 번개로 녹일 수는 없겠는데.’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킨 이안은 녀석을 제압할 방법을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어.’
어쨌든 맷집이 좋을 뿐, 피켄로의 기계 드래곤에 비하면 훨씬 허약한 녀석이었으니, 처치할 방법 정도는 금세 떠올린 것이다.
다만 포획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그냥 처치하는 것이 아닌 살려 놓은 상태로 ‘제압’해야 된다는 것이 문제.
“늦어도 20분 안으로 승부를 봐야겠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안이 본격적으로 녀석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 * *
최근 기획 3팀은 정신없이 바빴다.
물론 정령계의 콘텐츠 대응을 하고 있는 1팀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기획을 시작한 카일란 신규 프로젝트 개발을 3팀에서 맡게 된 탓이었다.
야근 없던 클린한 회사 생활이 끝나고, 다시 밥 먹듯 야근이 시작된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찬의 표현에 의하면, 이것은 행복한 야근이라고 하였다.
신규 콘텐츠 개발은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직접 설계한 콘텐츠를 전 세계의 수많은 유저가 플레이한다는 것은 기획자의 가장 큰 기쁨인 것.
그 때문에 오늘도 나지찬은 즐겁게 문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크, 이번에 기사 대전 끝나고 업데이트 발표하면, 커뮤니티 한번 뒤집어지겠는데요?”
“그러게. 이번에 오픈하는 던전들은 우리가 봐도 잘빠졌지?”
“맞아요, 팀장님. 특히 중저 레벨 구간 콘텐츠가 많이 추가된 게 좋은 것 같아요.”
“흐흐, 랭커들 생각하면서 콘텐츠 짤 때보다, 한 3만 배 정도 쉽고 재밌는 것 같습니다, 팀장님.”
완성된 문서를 검토하며, 뿌듯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3팀의 팀원들.
이번 콘텐츠는 기획팀원들도 직접 게임에 들어가 플레이해볼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레벨 구간에 추가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의욕적으로 기획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자, 이제 슬슬 9시가 돼 가니까……. 야근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퇴근해 볼까?”
“아니면 팀장님, 오랜만에 불금에 다 같이 야근했는데…… 요 앞에서 치맥 한번 때리고 퇴근하는 게 어때요?”
“그것도 좋지!”
3팀의 팀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퇴근 준비를 시작하였다.
자리를 정리하고 사무실의 불을 하나둘 끌 때가 바로, 직장인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치킨 뜯을 사람 남고, 나머지 다 퇴근하도록!”
“크, 신난다!”
“치킨은 팀장님이 쏘시는 건가요?”
“무슨 소리. 말 꺼낸 사람이 사야지.”
“후후, 왜 이러십니까, 팀장님. 오늘 법카 들고 계신 거 다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뭐야,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남 대리 귀신이야?”
“으하핫!”
하지만 이렇게 행복한 분위기도 잠시.
시끌벅적하던 사무실에,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삐리리리-.
갑자기 나지찬의 자리에서, 요란 맞은 벨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헉……!”
순간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켜는 팀원들과,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나지찬.
“이 시간에 누굴까요, 팀장님.”
“윗분들은 다 퇴근한 걸로 아는데…….”
“설마……?”
순식간에 불안한 표정이 된 나지찬은 천천히 벨소리가 울려 퍼지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잠깐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누구일지 짐작되기는 하는데…….’
이 시간까지 퇴근을 못 하고 남아 있을 사람들 중, 자신의 직통 전화로 전화를 걸 만한 사람!
“기획 3팀 나지찬입니다.”
적막해진 사무실에 나지찬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어서 수화기 넘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찬아, 퇴근하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기획1팀의 팀장 김의환.
“네, 김 팀장님.”
-좋냐?
“음, 조금……요?”
-후우…….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다 죽어 가는 김의환의 목소리에, 3팀의 팀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김의환이 나지찬에게 전화하는 경우는, 보통 ‘그’ 때문일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었다.
“또 뭐지? 설마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흐흐, 우리만 아니면 되지, 뭐.”
“그러다가 우리가 넘겨받는 수가 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말이 씨가 된다고.”
잠시 속닥거리던 3팀의 팀원들은 다시 두 사람의 통화 내용에 집중하였다.
어찌 됐든 김의환이 왜 전화했는지는 모두가 궁금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팀장님. 콘텐츠 뭐 터진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닌데…….
잠시 뜸을 들인 김의환의 말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지찬아, 혹시 그 키메라 기억나지?
“그야 당연히 기억하죠. 오늘도 그거 관련된 콘텐츠 만들다가 퇴근하는데요.”
-…….
김의환의 이야기에 나지찬은 슬슬 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키메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으니 말이었다.
‘이안이 피켄로를 잡았다면, 지금쯤 키메라를 만날 때가 되긴 했는데…….’
그리고 다음 순간.
-키메라 있잖아. 그거 일반 유저가 포획해도 되는 거지?
이어진 김의환의 말을 들은 나지찬은 순간 수화기를 손에서 놓칠 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