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6화 6. 직위 승계 >
모든 것이 이안이 계획했던 대로 되어 버렸다.
진행 중이던 메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뚫어 냈음은 물론, 그와 동시에 셀라무스의 절대자 계승 퀘스트까지 깔끔하게 끝내 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정확히 하자면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피켄로가 죽었다 해도 아직 제법 많은 기계 병사들이 남아 있었으며, 이 모두를 섬멸시켜야 전장이 마무리될 테니까.
하지만 남은 잔당을 처치하는 것은 이안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능한 수준.
이제 이안이 해야 할 일은 셀라무스 전사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뿐이었다.
‘기계용가리도 잡았는데, 이 정돈 껌이지, 뭐.’
콰쾅- 콰콰쾅-!
피켄로가 소멸한 뒤 완전히 여유를 찾은 이안은 히죽히죽 웃으며 전장을 쓸고 다녔다.
심지어는 전투하는 와중에 피켄로가 드롭한 장비들의 옵션을 하나씩 확인할 정도.
기대에 부응하는 아이템들의 성능을 확인한 이안의 입꼬리는 더욱 씰룩거리기 시작하였다.
‘크으…… 역시!’
이안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역시 피켄로가 사망하면서 드롭한 신화 등급의 장비 아이템들.
‘파괴의’라는 수식어를 가진 이 세트 아이템들은 대충 읽어 봐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자랑하는 장비들이었다.
세부 옵션들이 뛰어남은 물론 세트로 착용했을 때의 세트효과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파괴의 군단장(세트 효과)>
-2Set : 물리 공격력이 25%만큼 증가하며, 치명타 피해량이 50%만큼 증가합니다.
-3Set : 고유 능력을 사용하여 적을 처치 시, 해당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50%만큼 감소합니다.
-4Set : ‘파괴의 삼지창’의 ‘파쇄 연환격’ 고유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파쇄 연환격(패시브)
-적을 빠르게 다섯 번 찔러, 더욱 강력한 피해를 입힙니다. 약점을 정확히 공격할 시 방어력을 20%만큼 무시하며, 다섯 번 연속으로 약점 공격에 성공할 시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연환격으로 적을 처치할 시, 30초 동안 공격 속도가 30%만큼 증가합니다.
신화 등급의 초월 장비를 이미 여러 번 획득해 본 이안의 눈에도 매력적으로 보일 만큼 성능 좋은 세트 옵션들.
물론 심판 세트에 유물들을 둘둘 두르고 있는 이안이 그것들을 포기하고 착용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말이다.
‘내가 쓸 만한 옵션은 아니겠지만, 길드원 중에 침을 질질 흘릴 만한 사람도 많겠고……. 팔아먹어도 엄청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어.’
애초에 자신의 장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적이 없는 이안은 파괴 세트 장비들에 충분히 만족하였다.
하지만 피켄로가 드롭한 아이템들 중, 이안을 가장 만족시켜 준 것은 장비 아이템들이 아니었다.
지금 이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아이템은 바로 이것.
<피켄로의 기계 설계도(신화)(초월)(고유)>
-파괴의 군단장이자 최고의 기계공학자 피켄로가 남긴 알 수 없는 기계 설계도입니다. 엄청난 파괴 병기를 제작할 수 있는 설계도임이 분명하지만, 웬만큼 뛰어난 기계공학자가 아니라면 해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저 ‘이안’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드롭되지 않습니다.
기계 드래곤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피켄로의 설계도였다.
‘진행 중인 퀘스트를 전부 마무리하는 대로, 토라프에 먼저 들러야겠어. 켄토라면 이 기계 설계도를 충분히 해석할 수 있겠지.’
이안과 친분이 있는 유일한 기계공학자이자 이안이 아는 유일한 ‘유저’ 기계공학자인 켄토.
토라프는 적진이나 다름없는 라카토리움의 위성 도시였지만 그런 것은 별로 거리끼지도 않는 이안이었다.
‘흐흐, 피켄로가 이 정돈데, 찰리스는 얼마나 엄청난 걸 드롭할까?’
계속해서 기계 병사들을 쓰러뜨리면서도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안.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고 있는 이가 하나 있었다.
‘아, 내가 너무 무례했구나. 감히 절대자님을 걱정했다니!’
크로네는 전사들을 통솔하면서도, 이안의 활약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전장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대승을 거둬 냈음은 물론, 그 모든 것을 거의 혼자의 힘으로 해낸 이안이었으니.
이안을 바라보는 크로네의 눈빛에 무한한 존경심이 담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런 분이 절대자로 계시는 이상, 셀라무스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안이야 딱히 셀라무스 부족을 위해 뭔가 할 생각이 없을 것이었지만 일단 김칫국부터 마시고 보는 크로네.
‘어쩌면 부족의 오랜 숙원을…… 내 대에서 이뤄 낼 수 있을지도.’
그리고 크로네가 이런저런 망상을 하는 사이.
더욱 기세가 오른 셀라무스의 전사들은 순식간에 모든 기계 병사들을 섬멸해 버렸으며.
띠링-!
이안의 눈앞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파괴의 군단 섬멸전’ 전장에서 승리하셨습니다!
-활약 등급 : SSS+
-활약 등급의 한계 초월로 인해, 획득 공헌도가 98%만큼 증가합니다.
-획득한 전공(전쟁 공헌도) : 891,892
-병력 손실률 : 6.2%
-8티어 난이도의 전장에서 최초로 승리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이 100,000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셀라무스의 절대자 계승(히든)’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중략……
-‘셀라무스의 절대자’ 직위를 계승하셨습니다.
-‘절대자의 망토(신화)(초월)’ 장비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안이 이 모든 시스템 메시지들을 확인한 그 순간, 어느새 이안을 둘러싼 셀라무스의 전사들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쿠웅-!
이어서 그들은 이안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동시에 입을 열었다.
“셀라무스의 절대자를 뵙습니다!”
커다란 협곡에 커다랗게 메아리칠 정도로, 강렬한 울림을 퍼뜨리는 전사들의 목소리.
한 번 들었던 똑같은 대사였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부족장 ‘크로네’ 한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수백에 달하는 셀라무스 전사들 전부가 일제히 만들어 낸 목소리였으니 말이다.
“……!”
그리고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이안의 눈앞에, 생각지 못했던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이제부터 ‘셀라무스의 절대자’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셀라무스의 부족장 ‘크로네’를 통해, ‘셀라무스 부족’의 내정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내정 탭 안에서 셀라무스 부족에 속해 있는 모든 인원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셀라무스의 부족장 ‘폴 크로네’를 통해, 셀라무스의 전사들에게 임무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임무 부여의 대상이 ‘유저’라면 해당 유저에게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하나의 대상에게 부여할 수 있는 임무는 한 달에 최대 다섯 개입니다.
‘유저가…… 퀘스트를 생성할 수 있다고?’
또다시 처음 보는 종류의 콘텐츠가 등장하자, 이안의 두 눈이 다시 휘둥그레 확대되었다.
* * *
퀘스트를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개념은 신선함은 물론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게임들을 플레이해 온 이안이지만 이런 종류의 콘텐츠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말이었다.
콘텐츠가 이안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느냐를 떠나서, 이 정도의 자유도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웠던 것.
‘이건 대박인데.’
하지만 아쉽게도 이안은 이 콘텐츠를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내정’ 탭은 부락에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무 부여’는 ‘지도자의 막사’에서만 가능합니다.
‘지도자의 막사’는 부락 안에 있는 크로네의 막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곧바로 메인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는 이안에게 막사로 다시 돌아갈 시간은 없었으니 말이었다.
‘아쉽지만, 뭐…… 퀘스트 다 끝내고 해도 늦지 않으니까.’
하여 한차례 입맛을 다신 이안은 셀라무스의 전사들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피켄로의 설계도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셀라무스 부족의 내정까지.
확인해 보고 싶은 콘텐츠들이 쌓여 있었기에, 이안의 걸음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 모든 퀘스트를 먼저 쭉 정리한 뒤에야, 그것들을 확인할 여유가 생길 것 같았으니 말이다.
‘어차피 기사 대전 리그전이 시작되기 전엔, 어느 정도 퀘스트를 마무리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여 이안을 위시한 셀라무스의 군대는 협곡을 지나 거침없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으니, 거칠 것이 없는 이안이었다.
‘일단 신단으로 가서 그락투스 일족, 그리고 숲의 엘프들과 합류해야겠지.’
숲의 엘프인 샤트라 일족과 그락투스 일족이 비터스텔라의 남쪽에 남은 이유는 기계 문명으로부터 숲의 신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그들을 만나기 위해선 당연 신단으로 가야할 터.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합류해야만 하니 이안의 걸음이 신단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30여 분 정도를 더 남하했을까?
와아아아-!
쿠르릉- 쿠쿵-!
멀리서부터 소란스런 소리들이 이안의 귓전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 * *
샤트라 일족의 지도자 솔루미엘.
숲의 하이엘프이자 엘프 대마법사인 그녀는 정신없이 마법을 캐스팅하는 중이었다.
“숲의 힘으로! 저들을 대지의 지옥에 가두어라!”
쿠콰콰쾅-!
커다란 대지의 신단 꼭대기에서 전장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는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프답게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온갖 화려한 마법들이 그녀의 주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특이한 점은 다른 일반적인 대마법사들과 달리, 정령 마법과 원소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
이안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솔루미엘의 클래스는 ‘자연의 마법사’라는 특수한 마법사 히든 클래스였던 것이다.
아마 이안이 소환술사가 아닌 마법사였더라면, 그녀로부터 히든 클래스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리엘르! 저쪽으로 가서 그락투스 전사들을 지원해 줘!”
“알겠어요, 솔루미엘 님!”
“궁수 부대는 적 원거리 병력부터 먼저 저격한다!”
“명을 받듭니다!”
샤트라 일족과 그락투스 일족의 병력은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지만, 신단을 공격하는 기계 군단 또한 만만치 않은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단의 위쪽에서 수성하는 진영이 숲의 진영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반대의 진영으로 싸웠더라면 상대하기 버거웠을 정도였으니 말이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군.”
“더러운 고철 덩어리 놈들!”
그 때문에 솔루미엘이 지혜롭게 전장을 지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숲의 일족들의 피해는 조금씩 누적되고 있었다.
신단이야 철통같이 지켜 내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야금야금 손실되는 병력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솔루미엘은 점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하였다.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정찰병들의 말에 따르면 파괴의 군단이 마타야 협곡을 점령했다 하였으니, 지금쯤 이안이 그들과 맞서고 있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빨리 이곳에 쳐들어온 기계 병력들을 정리하고 북진하여, 이안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
‘큰일이야.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어…… 대전사께서 무사하셔야 하는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솔루미엘은 비장한 표정으로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상황에서 조금 도박수이기는 하지만, 그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 보려는 것이다.
“조금만 버텨라, 제군들!”
“알겠습니다, 솔루미엘 님!”
3분이나 되는 긴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지만, 마법을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전황을 확 뒤엎을 수 있을 터.
고오오오-!
캐스팅을 시작하자 솔루미엘의 주변으로 녹 빛의 강렬한 기운들이 휘감기기 시작하였고, 그락투스와 샤트라 일족의 전사들을 필사적으로 그녀의 앞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솔루미엘 님을 지켜라!”
“고철 덩이들을 밀어내!”
밀려드는 기계 괴수들을 응시하며,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는 솔루미엘!
하지만 잠시 후, 이를 악물고 마법을 캐스팅하던 솔루미엘은 당황한 나머지 집중력이 흐트러질 뻔하였다.
쐐애애앵-!
갑자기 커다란 파공성이 전장에 울려 퍼지더니,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적진에 내려앉았으니 말이었다.
쿵-!
물론 상황이 거기서 끝이었다면, 솔루미엘이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멀찍이 알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났다고 해서, 캐스팅이 흔들릴 정도로 동요할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솔루미엘이 놀란 이유는.
쩌저저적-!
‘저, 저런……!’
적진에 내려앉은 그림자의 주변에서부터, 날뛰던 기계 괴수들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