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이밍 마스터-901화 (904/1,027)

< 901화 4. 파괴의 군단 >

띠링-!

-파괴의 군단장, ‘피켄로’와 대면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메인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캐릭터의 통제권이 서서히 사라진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이질적인 기분.

여러 번 경험해 봐도 적응하기 쉽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이러한 전개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안은 편안한 표정으로 전장을 관조하기 시작하였다.

‘에피소드 진행되는 동안, 적들 전력이나 살피고 있으면 되겠네.’

물론 AI의 대사들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설렁설렁 흘려들을 생각은 없었다.

카일란의 메인 에피소드에 포함되는 대사들에는 특별한 정보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조하는 시점에서 본다면 두 가지를 충분히 동시에 해 낼 수 있었다.

‘대충 봐도 쉽진 않은 싸움이겠군.’

그리고 이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이안의 ‘AI’와 피켄로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파괴의 군단장이라…… 이 정도 거물이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군.”

기이잉- 철컥-!

이안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피켄로의 기계 로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리고 그 조종석의 문이 열리며, 까만 가운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정체는 당연히 군단장 피켄로였다.

피켄로가 칼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그에 이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클클, 마스터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그런가.”

“네놈이 더 이상 활개 치도록 둘 수 없었지.”

“웃기는군.”

고요한 협곡의 가운데서,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두 사람의 대화.

“뭐가 말인가?”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웃기다는 이야기다, 고철.”

“오만하군!”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입을 연 것은 숲의 대전사 이안이었다.

“내 힘에 대한 과신이 아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대지의 힘을 믿을 뿐.”

“성물을 믿는 것인가.”

“정령왕께서 나를 남쪽으로 인도하신다. 더러운 고철들 따위로 내 길을 막을 순 없을 것이야.”

고오오오-!

‘숲의 대전사 이안’의 대사가 끝나자, 그의 주변으로 강렬한 초록빛 빛무리가 퍼져 나간다.

이어서 그 빛들은 전장으로 퍼져 나갔고 셀라무스 전사들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셀라무스의 전사들에게 ‘대지의 축복’이 내립니다.

-모든 대지의 성물 효과가 10%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더욱 강력해진 셀라무스의 전사들을 둘러보며, 흡족한 표정이 된 이안.

하지만 피켄로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 ‘더러운 고철’들에게 지배당하는 주제에,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고오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정령계 놈들은 입만 살아 있어.”

쿠쿵- 콰아아아-!

피켄로의 대사와 함께, 검붉은 거대한 기운이 협곡을 뒤덮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셀라무스의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파괴의 군단에도 강력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파괴의 군단’의 동력 에너지가 강화됩니다.

-모든 ‘파괴의 군단’ 병사들의 공격력이 25%만큼 강력해집니다.

-모든 ‘파괴의 군단’ 병사들의 동력 회복량이 2배로 증가합니다.

……후략…….

이안을 향해 마지막으로 히죽 웃어 보인 피켄로는 다시 기계 로봇의 조종석 안으로 들어갔고.

위이잉- 철컹-!

이어서 피켄로의 로봇이 더욱 거대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기잉- 기기기깅-!

“……!”

그리고 그것을 관조하던 이안.

이안의 AI가 아닌 ‘진짜’ 이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하였다.

‘뭐, 뭐야, 변신 로봇도 아니고!’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화려한 기계들의 움직임이 맞물리며, 단지 커다랗고 못생긴 로봇이었던 피켄로의 로봇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되기 시작하였다.

둔하고 육중해 보이기만 했던 등짝에는 커다란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으며.

촤아앙-!

몸통에 기다란 목이 돋아나더니 사나운 드래곤 같은 느낌의 머리가 그 위에 만들어졌다.

철컥-!

이어서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 위로 시뻘건 불빛이 번뜩이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의 눈에, 드래곤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글자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파괴의 기계 드래곤/Lv165

* * *

선봉대를 전부 잃고 돌아온 루칼은 죄인처럼 힘없이 군단으로 복귀하였다.

피켄로를 설득하여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이었는데,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으니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하지만 복귀한 그에게 피켄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을 보였다.

“흠, 꼴을 보아하니, 전멸당했군.”

“죄, 죄송합니다, 군단장님.”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보라.”

보자마자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뛸 것이라 생각했던 피켄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담담한 표정으로 루칼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부 끝난 뒤, 오히려 고개를 주억거리며 루칼을 격려해 주었다.

“역시 숲의 대전사…… 지금껏 기계 군단들이 패전했던 이유가 있었군.”

“……?”

“너무 상심 말라, 루칼. 비록 선봉대를 잃긴 했으나, 얻은 것도 없지는 않으니.”

마치 루칼이 이렇게 될 줄, 이미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루칼의 입장에서는 그간 찰리스의 마탑에 쌓아 놓은 공헌도가 깎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고무적이었으니 말이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온 느낌이랄까.

“물론 공과 과를 따지자면 과실이 더 크긴 하나, 죄를 묻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겠다.”

“가, 감사합니다!”

“대신 앞으로의 활약을 지켜보도록 할 것이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루칼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피켄로와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띠링-!

-특수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지막 기회(히든)(에픽)’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퀘스트를 수령하시겠습니까? (Y/N)

생각지도 못했던 퀘스트의 발동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피켄로.

‘이런 퀘스트라니!’

퀘스트의 내용은 간단했다.

전장에서의 활약상에 따라, 메인 퀘스트의 보상과 페널티가 더욱 크게 변동된다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피켄로가 A등급 이상의 전공을 올린다면, 유예된 페널티가 전부 사라질 것이며, 오히려 더욱 많은 공헌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피켄로가 C등급 이하의 전공을 올리는 데 그친다면, 유예된 페널티는 더욱 증폭되어 커질 것이다.

‘후우…….’

퀘스트를 전부 읽은 피켄로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가 보기에 이 퀘스트는 독이 든 성배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퀘스트를 거부한다면, 피켄로가 분노하겠지.’

사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한들, 루칼의 선택이 바뀌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숲의 대전사! 저놈만 피해 다니면 돼. 일반 병사들을 차근차근 잡으면서 공헌도를 쌓는다면…… A등급도 불가능한 수준은 아닐 거야.’

그리하여 퀘스트를 수령한 루칼은 다시 파괴의 군단 선봉에서 검을 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는 지금 이 순간.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정령계 놈들은 입만 살아 있어.”

피켄로의 대사가 끝남과 동시에, 루칼의 입에 함지박만한 웃음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역시! 카일란 기획팀이 밸런스를 망쳐 놨을 리 없지!’

기계 드래곤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피켄로의 전투 로봇이, 어마어마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저 괴물이라면, 숲의 대전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미 사망해 버린 길드원들이 더욱 아쉬워지기 시작하였다.

‘괜히 무리해서 선봉으로 나서지 말고, 얌전히 시키는 전투나 할 것을…….’

만약 길드원들이 전부 살아 있어서 피켄로의 기계 드래곤을 등에 업고 전장에 참여했다면, 훨씬 더 막대한 공헌도와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을 수밖에 없는 법.

피켄로는 한 길드를 이끌어 온 수장답게,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후회가 아닌 최선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메인 에피소드가 종료됩니다.

-마타야 협곡, ‘파괴의 전장’이 개전(開戰)되었습니다.

마지막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고.

“건방진 정령계 놈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라!”

“더러운 고철들을 전부 부숴 버리자!”

커다란 함성과 함께, 루칼 또한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전투에 뛰어들기보단, 전황을 살피며 확실히 포지션을 잡으려는 것.

‘이제 시작이다. 실수는 용납할 수 없어.’

하지만 잠시 후, 전장을 두루 살피려던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강제로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

숲의 대전사와 파괴의 군단장.

전장의 중심에서, 두 거물의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파괴의 군단과 셀라무스의 전사들.

두 강력한 군대의 전쟁이 벌어지는 마타야 협곡은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북부에서 진입하는 초입에야 단순히 좁고 가파른 협곡이었으나, 전장이 열린 가장 깊숙한 지역의 구조는 무척이나 복잡했으니 말이었다.

기본적으로 널따란 대지에 지그재그로 절벽이 솟아 있었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높다란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었으니,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해 놓은 대칭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전력으로도 완전히 다른 전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복잡한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 구조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이 전쟁을 직관하고 있는 유일한 유저, ‘마크 올리버’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긴 공연장으로 치면 RR석쯤 되는 것 같은데.”

협곡의 서쪽 봉우리에 앉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전장을 내려다보는 한 마법사.

흑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멋들어진 로브를 걸친 남자, 마크 올리버는 무척이나 만족스런 표정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캬, 이게 얼마만의 제대로 된 직관이냐. 역시 하린 님에게 열심히 조공하길 잘했어.”

몇 달간의 노력 끝에 하린과 친해진 올리버는 어느새 그녀와 공생 관계가 되어 있었다.

올리버는 인 게임에서 하린은 오프라인에서.

서로 이안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상부상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린 : 올리버 님, 진성이 언제 로그아웃할 것 같아요?

-마크 올리버 : 한 7시간 뒤……?

-하린 : 오늘은 양호한 편이네요. 장이나 좀 보고 와야지.

그리고 그 덕에 올리버는 하린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이렇게 완벽한 로열 좌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흐흐, 오늘은 영상도 제대로 찍어야지. 심심할 때마다 돌려 보려면 앵글도 잘 잡아야겠어.”

어차피 개인 소장용 영상이었지만, 어지간한 프로만큼이나 공을 들이는 올리버.

“다른 건 찍을 필요 없겠지? 이안갓이랑 기계 드래곤 위주로 앵글을 잡으면 될 테니 말이야.”

그런데 흥미롭게 전장을 관찰하던 올리버의 얼굴에, 잠시 후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

전장 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으니 말이었다.

‘저기 저 마족 놈, 좀 수상한데?’

모두가 전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이 시점, 유일하게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서는 한 남자.

그를 살피던 올리버의 두 눈이, 점점 더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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