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0화 3. 암살자 요르간드 (3) >
* * *
기사단장이자 파티 내 최강자였던 요르간드가 무참히 당한 뒤.
다크블러드 길드의 남은 길드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빠르게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무식하게 강력한 이안을 상대로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요르간드의 암살을 믿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이제 그 일말의 가능성이 사라졌으니 더 무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빠, 빨리 본진으로!”
“뛰어! 뭐 해!”
하지만 이안이 도주하는 인원을 그대로 둘 리 만무하였고, 아이언을 타고 매섭게 추격한 이안이 다크블러드의 랭커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어딜 도망가?”
“너, 내 공헌도가 되어라!”
심판 검을 휘두르며 순식간에 기계 병사들을 처치하고, 충전된 ‘심판의 번개’로 광역 전기 찜질을 시전하는 이안.
쿠릉-.
쿠과과광-!
떨어져 내리는 심판의 번개에 길드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녹아 내렸으며.
“끄아아아!”
“젠자아아앙!”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서른 명의 선봉대 또한, 싹 다 전멸하고 말았다.
그르륵-.
“너무 강한 인간이다!”
그리하여 선봉대에 길드원들까지 총 마흔에 육박하는 인원들 중, 살아서 도주를 성공한 인원은 고작 세 명.
“후우우…….”
그중 하나인 루칼은 그야말로 침통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손실이라니!’
루칼의 표정이 흙빛으로 변한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 주력 길드원들의 전멸로 인해 길드 에이스들의 평균레벨이 1레벨 감소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전장에서 공헌도를 쌓는 것도 완전히 물 건너가 버렸으니 말이었다.
군단장 피켄로에게 쫓겨나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인 수준.
이안이 등장했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은 것이다.
‘젠장, 쿼드라 에스급 난이도의 퀘스트였는데…… 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루칼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빠르게 본진으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어마어마한 손실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라도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레벨 업을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영으로 복귀하는 와중에도 루칼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숲의 대전사라…… 과연 피켄로가 그 만큼 강력할까?’
떠올리기만 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는 괴물 같은 전투력을 가진 숲의 대전사.
어쨌든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그의 복귀가 의미 있는 것인데, 그를 막아 줄 인물이 없다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것 같아 보였으니 말이다.
포지션으로 따지면 파괴의 군단장 피켄로가 숲의 대전사와 같은 급의 NPC라 할 수 있으니, 그가 숲의 대전사를 막아 줘야 하는 것.
‘후우, 기획팀이 생각이 있다면, 밸런스를 파괴해 놓진 않았겠지.’
루칼은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 피켄로가 숲의 대전사만큼이나 강할 것이라고 믿으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 * *
세 자루의 심판 검을 전부 손에 넣은 그 시점 이후, 이안은 이미 탈 랭커급 전투력을 갖게 된 것이 맞았다.
애초에 혼자 독식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궁극의 무기들을 혼자서 다 가져가 버린 데다, 그것을 누구보다 효율 좋게 사용할 수 있는 클래스인 ‘서머너 나이트’의 능력들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안이 만들어 낸 상황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안이 강해도 다크블러드 길드는 글로벌 5위 안에 들어가는 최강의 길드들 중 하나였고, 이안의 손에 박살 난 랭커들은 하나같이 다크블러드의 에이스들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완전히 공평한 상황에서 방금과 같은 싸움이 벌어졌다면, 아무리 이안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박살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다만 이런 언밸런스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안이 가지고 있는 대지의 성물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성물들로 인해 이안의 전투력은 거의 1.5~2배 가까이 강력해진 것이었으니까.
‘크, 이거, 이거. 아주 짭짤하잖아?’
이안은 시야 구석에 떠올라 있는 활약 랭크를 보며,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현재까지 전장 활약 등급 : SSSS+
지금까지의 모든 적 처치가 이안 혼자의 전공이었으니, 활약 등급이 천장을 뚫고 올라간 것이다.
게다가 전장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경험치도 무척이나 짭짤했으니, 이안의 입에 웃음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작 좋고!’
쉬이익-.
하여 기분 좋게 돌아온 이안은 자연스레 대열에 합류하였고,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크로네가 안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 금방 돌아오셨군요, 이안 님. 매복해 있다던 적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이안이 갑자기 사라지고 난 뒤, 가장 걱정이 많았던 인물이 바로 크로네였다.
그는 셀라무스의 절대자가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이안이 직접 싸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지휘관이 매복을 저지하러 그것도 혼자 움직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크로네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안이 크로네의 그런 걱정을 헤아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었다.
“없어졌습니다.”
“네?”
“없어졌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이안.
이어서 이안은 다시 부대에 지시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전열은 최대한 빨리 움직여 적진을 파악하고, 후열은 그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
매복까지 깔끔히 제거한 이안의 오더는 이제 거침이 없었다.
이미 카카를 통해 시야까지 확보해 놨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를 더 이동하였을까?
협소하고 구불구불했던 협곡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멀리서부터 커다란 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둥-둥-둥-.
이어서 협곡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이안의 눈앞에 거대한 장관이 펼쳐졌다.
“……!”
높다랗게 솟아있는 절벽과, 그 위에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수백의 기계 병사들.
쿵-쿵-!
그들 중 가장 거대한 기계 로봇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커다란 기계음이 전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만나는군.”
“……!”
“네놈이 바로 숲의 대전사로구나!”
그의 정체는 바로 파괴의 군단장.
찰리스 학파의 고위 기계공학자 중 하나인 피켄로였다.
* * *
한국 서버와 함께 카일란에서 가장 강력한 서버로 꼽히는 미국 서버.
‘발러’길드는 그런 미국 서버에서도, 인간계 진영 길드랭킹 1위에 랭크되어 있는 강력한 길드였다.
물론 마계 진영 쪽의 랭킹 1위이자 대전사 카이가 속해 있는 ‘칼데라스’보다는 조금 떨어진다는 평이 많았지만.
어찌 됐든 ‘최고’라는 수식어가 충분히 어울리는 탑 티어의 길드였던 것이다.
-인간 진영에서는 로터스에 비벼볼 만한 유일한 길드가 발러 아닐까?
-그러게. 사실 발러도 로터스급이라기엔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인간 진영 다른 길드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클래스가 높으니까.
그리고 이 발러 길드를 이끄는 두 명의 랭커가 있었으니, 빛의 궁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아르케인’과 미국 서버 최고의 마법사 랭커인 ‘마크 올리버’가 바로 그들.
그중에서도 마크 올리버는 그 어떤 랭커들보다도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다.
발러 길드의 공식 행사에도 잘 등장하지 않았을뿐더러, 심지어 이번 기사 대전에서도 단 한 번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올리버는 신비주의 랭커로 통하였다.
-크, 이제 리그전 시작되면 로터스랑 발러도 만날 텐데. 레미르랑 올리버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비등비등하지 않을까? 사실 인지도야 올리버가 더 높지만, 이번 기사 대전에서 레미르가 보여 준 실력을 보면…….
-최근에 올리버가 싸우는 걸 봤어야 비교를 해 보지.
-하긴 그것도 그래. 기사 대전에 딱 한 번 나와서 마법 한 번 쓰고 들어간 게 전부니…….
-올리버는 진짜 신비주의 콘셉트 잘 잡은 듯. 이렇게 귀신같이 숨어 다니기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 올리버만큼 언론에 노출 안 되면서 인지도 높은 랭커는 사실 유일무이할 듯.
하지만 그를 추종하는 팬들도 알 수 없는 사실이 두 가지 있었으니.
그 첫 번째는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 콘셉트는 올리버 본인의 의도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올리버는 단지 혼자 게임하길 좋아하는 솔플러였을 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밖으로 드러날 일이 없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올리버가 최근에 있었던 발러 길드의 공식 행사에 한 번도 나타나지 못한 이유였다.
“마스터, 올리버 님은 이번에도 참석 안 하신대요?”
“당연하지. 걔가 오겠냐.”
“올리버 얼굴 본 지 오래됐는데…… 한번 불러올 수 없나?”
“한국에 가 있는 애를 무슨 수로?”
“…….”
“지난번에 들어 보니 이안 옆집 샀다고 좋아하던데. 이안이랑은 좀 친해졌는지 모르겠네.”
“그 형은 길드 파티 사냥이나 나오라고 좀 해 줘요, 마스터. 오프에서 보는 건 이미 예전에 포기했으니까.”
“다음엔 나온다는데…….”
“그게 벌써 몇 번째임.”
외부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올리버는 이미 한국에 정착(?)한 지 오래였고, 단지 그것이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였으니 말이었다.
물론 길드 모임을 귀찮아하는 그의 성향도 한몫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올리버가 한국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으니까 좋네. 길드 모임 안 나가도 될 핑계도 확실하고 말이지.’
오늘이 길드 정기 모임 날짜인 것을 확인한 올리버는 흡족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만약 길드 모임에 나가야 했다면, 지금쯤 게으름과 사투를 벌이고 있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하루 종일 솔로 플레이만 주야장천 하다가, 가끔 이안의 전투를 구경하는 것이 낙인 마크 올리버에게.
이안의 옆집 생활은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었던 것.
오늘도 이안이 대규모 전장에 참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하린에게 전해 들은 올리버는 미리 마타야 협곡에 도착하여 자리를 깔고 구경 중이었다.
‘이안갓의 라이브를 직관하는 것이야말로, 옆집 팬의 특권 아니겠어.’
경쟁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팬의 눈빛으로 전장을 구경하는 올리버.
이렇게 게으르고 승부욕 없는 그가 어떻게 아직까지 톱랭커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발러 길드의 길드원들조차도 모르는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었다.
“크, 오늘은 기계 군단도 막강하네. 오랜만에 재밌겠어, 아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올리버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 그가 상상조차 못 한 계획이 수립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올리버가 참석하지 않은 발러 길드의 길드 모임에서 말이다.
“우리 언제 한번 길드 모임 한국에서 여는 건 어때요?”
“오?”
“올리버 형이 아무리 게을러도, 한국까지 가서 모인다는데 설마 안 나오진 않겠지.”
“올리버 하나 때문에…… 우리가 전부 한국까지 가자고?”
“이안 데리고 나오라고 하면 안 돼? 이안까지 볼 수 있으면 난 비행기 탈 용의 있는데.”
“나도.”
“저도요.”
“…….”
“우리 그럼 기사 대전 끝나고…… 단체로 한국 한번 갈까?”
그리고 농담처럼 시작된 발러 길드원들의 계획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