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7화 2. 매복을 만나다 (3) >
* * *
협소하고 깊은 계곡은 대규모 인원을 통솔하기에 아주 부적합한 지형이다.
일단 부대가 갖출 수 있는 진영부터가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지형을 이용한 기습이나 전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반대로 말하자면,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최적화된 지형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안이 혼자 움직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만약 이곳이 탁 트인 평원과 같은 전장이었더라면, 아무리 이안이라 하더라도 서른 명의 매복 병력을 상대로 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초월 120레벨에 육박하는 녀석들이 서른이나 된다면 이안에게도 부담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지형 안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봉인 해제된 칭호 덕에 대지의 성물 버프까지 받은 지금, 소규모 교전으로 잘라먹는 정도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스륵-.
‘여차하면 공간 왜곡으로 빠져나와야지. 뭐, 그럴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말이야.’
공간 왜곡을 발동시키기 위해 뿍뿍이의 좌표를 확인해 둔 이안은 거침없이 어둠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드래곤 중에는 가장 몸집이 작고 날렵한 아이언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지형을 통과하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펄럭-!
이어서 잠시 후, 이안은 곧 매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흐, 역시 아직 있군.’
어둠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안은 어렵지 않게 매복병들을 찾을 수 있었다.
애초에 좌표 정보를 가지고 들어온 데다, 서른 명이나 되는 인원 때문인지 기척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쉽게도 적들의 레벨까진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안은 일단 자리에 멈춰 섰다.
더 다가갔다가는 이안또한 발각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한번, 사냥을 시작해 볼까?’
화륵-!
석굴 구석에 자리를 잡은 이안이 조심스레 마그번을 소환하였다.
-불렀는가, 주인.
“쉿!”
이어서 마그번이 떠들지 않도록 재빨리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댄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위치가 노출되면 안 돼.”
-알겠다.
“사냥감들이 도망가 버리면 안 되니 말이야.”
-흠, 저들인가?
“그래.”
이안이 추정하는 매복병들과의 거리는 대략 100미터 정도.
위이잉-!
-‘약점 포착’ 고유 능력을 발동하였습니다!
-대상의 약점을 포착합니다.
이어서 어둠 속에 떠오른 붉은 점들을 향해, 이안이 왼손을 치켜들었다.
화르륵-!
그러자 둥글게 말아 쥔 그의 손 위로 불타는 화염의 장궁이 소환되었다.
-정령 마법, ‘지옥의 화염시’를 발동합니다.
끼이익-.
이어서 자연스레 시위를 당긴 이안의 입꼬리가 히죽 말려 올라갔다.
‘일단 본격적인 사냥 전에…… 전력이나 좀 파악해 볼까?’
붉은 점을 정확히 조준한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고.
핑- 피핑-!
이내 시뻘건 화염을 머금은 불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쏘아지기 시작하였다.
* * *
“후후, 역시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군.”
“그러게. 적어도 이 자리는 한 번쯤 확인할 줄 알았는데……. 역시 NPC들이라 그런 건가?”
“이러면 우리야 아주 땡큐지.”
협곡 측면의 어두침침한 골짜기.
바위 사이로 길목을 지켜보던 요르간드와 루칼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그들이 예측했던 시간대에 정확히 정령계의 군대가 협곡으로 진입하였고, 정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들이 매복해 있는 바로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물론 대충 봐도 강력해 보이는 전력이었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었다.
두 사람이 이끌고 온 선발대 또한 전부 강력한 인원들이었으며 어차피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 목적이었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선발대에는 NPC들 외에도 다크블러드 길드의 에이스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니, 루칼과 요르간드는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렇게 협곡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을 향해 기계 병사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르륵-.
“언제 공격할 건가, 대장.”
“기다려라. 아직 일러.”
“먹음직스런 녀석들이다. 참기 힘들다.”
파괴의 군단 기계 병사들 중에는 ‘생기 흡수’라는 고유 능력을 가진 녀석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 고유 능력은 바로 상대가 가진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
생명력은 물론 상대의 스텟까지도 일부 흡수할 수 있는 고유 능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고레벨의 셀라무스 전사들은 먹음직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녀석들보다도 더욱 몸이 달아올라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다크블러드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요르간드, 너 혼자 너무 독식하지 말고, 적당히 양보도 하고 그래야 돼?”
“후후, 받아먹는 거야 니들 역량이지. 그것까지 내가 챙겨 줘야 하는 거야?”
그들의 입장에서 셀라무스 전사들은 100레벨도 훨씬 넘는 고레벨의 에픽 몬스터나 다름없었고, 이런 녀석들이 얼마나 막대한 보상을 떨구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랭커들이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여 여느 때보다 더욱 흥분된 분위기인 다크블러드 길드의 길드원들.
“기사단장님이 당연히 단원들을 챙겨 주셔야지.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니오. 흐흐.”
“그러게 말이야. 요르간드 저 녀석, 욕심은 정말 알아줘야 해.”
하지만 이들의 행복 회로는 그리 오래 굴러가지 못하였다.
“딱 30초만 더 기다리면 되겠어. 후방을 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허리를 찌르고 빠지는 게 좋아 보이니까.”
“오케이, 마스터. 오더만 기다리고 있겠수다.”
“좋아, 준비는 이미 다 끝났다고!”
본격적인 기습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피융- 슈슈슉-!
어디선가 시뻘건 불화살이 날아와 길드원 하나의 머리통을 터뜨려 버렸으니 말이었다.
파파팍-!
퍼엉-!
한 발도 아니고 거의 열 발에 가까운 불화살이.
정확히 한 사람의 머리통에 쏟아지듯 틀어박혀 버린 것.
띠링-!
-파티원, ‘휴고르’ 유저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파티원 ‘휴고르’ 유저가 게임에서 아웃되었습니다.
-‘휴고르’가 파티에서 탈퇴하였습니다.
방금까지 신이 나서 떠들던 길드원 하나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으니, 흥분되었던 분위기는 싸늘히 식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누, 누구냐!”
“기습이야!”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크블러드 길드원들의 등줄기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방금 사망한 유저는 전사 클래스의 유저였고, 어느 정도 탱킹 능력이 되는 딜탱 포지션의 길드원이었는데.
아무리 기습적인 헤드샷이라 하더라도 한순간에 녹아 버린 것이 믿어지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특히 방금 전까지 그와 대화하던 요르간드는 놀람으로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한자리에 정확히 다 틀어박혔어. 이 정도면 가이드 애로우(Guide Arrow) 수준의 명중률인데…….’
가이드 애로우는 목표물을 따라 움직이는 유도 화살을 말하는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유도 화살 계열의 스킬들은 파괴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 연사 공격 한 번에 초월 80레벨대의 랭커가 사라져 버렸으니, 눈앞에서 본 요르간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아웃된 건 나였겠지.’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킨 요르간드는 화살이 날아든 어둠 속을 향해 안력을 집중시켰다.
기습 공격이 한 번으로 끝날 리는 없었으니 추가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안티 애로우 준비해!”
“알겠어, 요르간드.”
안티 애로우는 스킬명만 봐도 예측이 가능했지만, 투사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실드 스킬이었다.
실드량 자체는 다른 실드 스킬에 비해 높지 않았지만, 방어 타입이 공성 타입인 탓에 화살을 막아 내는 데 최적화된 스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르간드가 이러한 오더를 내린 이유는 당연히 추가 사격을 대비하기 위한 것.
우우웅-!
그의 예상대로 불화살은 계속해서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슈슉-.
대체 몇 명이 쏘아 보내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어둠을 수놓는 수십 발의 불화살들!
퍼퍼펑-!
하지만 요르간드를 비롯한 다크블러드 길드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콰아앙-!
그것은 바로, 불화살들의 파괴력이 평범한 화살 수준이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뭐야!”
“실드가 깨졌어! 피해!”
적어도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 정도는 벌어 줄 줄 알았던 안티 애로우 실드가,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었다.
* * *
다크블러드의 길드원들은 당황했지만, 그들 못지않게 당황한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뭐, 이게 뭐야?’
그의 정체는 아이러니하게도, 화살을 쏘아 보낸 장본인인 이안.
‘이렇게 약할 수가 있다고? 최소 120레벨 이상이?’
그가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안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전력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날린 화살이었는데, 그것만으로 한 놈이 그대로 증발해 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화살이 정확히 약점에 틀어 박혔고 화염시의 표식까지 터진 것은 맞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한 놈이 픽 죽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초월 120레벨대의 피통은 평범한 몬스터라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 말이었다.
“뭐야, 그냥 화살로 다 잡아 버려도 되겠는데?”
하여 잠시 주춤하였던 이안은 계속해서 화염시를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쐐애애액-!
화염시는 소환 마력만 충분하다면 조건부 무제한 스킬이었기 때문에, 이안이 마음먹고 속사를 구사한다면 수십 발 이상 퍼붓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퍼펑- 퍼퍼펑-!
화살을 막아 내는 실드가 소환되었지만, 그것은 이안에게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못하였다.
평범한 화살과 달리 이안의 화살은 ‘정령 마법’이었고, 때문에 공성 타입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딱히 대미지 감소 효과가 크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파파파팍-!
오히려 이안에게는 화염시 스텍을 쌓기 더 편하게 만들어 준 샌드백일 뿐.
퍼엉-!
하지만 불화살을 쏟아붓던 이안은 잠시 후 화염시를 소환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생각보다 기민하게 대처한 탓에 더 이상 화살의 궤적이 닿지 않는 지점으로 진영을 이동시켰으니 말이었다.
‘어쭈, 빠른데?’
덕분에 추가로 녀석들의 숫자를 더 줄이지는 못하였지만, 이안은 별로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개체 하나를 암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대 이상의 성과였으며, 그것과 별개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역시 극단적으로 탱킹 능력이 떨어지는 녀석들이 섞여 있는 거였어. 역시 120레벨 기계 군단이 이렇게 쉽게 녹아 버릴 리 없지.’
물론 약간의 오해(?)가 있기는 하였지만 처음 계획했던 대로 적들의 전투력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투 AI가 생각보다 더 높아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순식간에 쓸어 버릴 수 있겠군.’
하여 화염시를 해제한 이안은 등에 메고 있던 검 한 자루를 스르릉 뽑아 들었다.
띠링-!
-‘심연의 심판대검’ 장비를 착용하였습니다.
-강력한 심연의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아이언을 타고, 전방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쐐애액-!
‘보아하니 저놈이 지휘관이군. 먼저 잘라 버리는 게 편하겠어.’
이안의 시야에 진영의 후방에서 열심히 오더를 내리는 루칼의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하여 이안은 거침없이 루칼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다른 녀석들이 이안의 경로를 막아섰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표식 쌓아서 몇 대 두들겨 주면…….’
심판 검의 표식을 터뜨리며 폭딜을 박아 넣으면, 일반 병사들 정도는 순식간에 삭제해 버릴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응……?’
이안은 또 한 번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해야만 했다.
콰앙-!
-파괴의 군단 병사 ‘???’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의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몇 대 두들겨 주면 터질 줄 알았던 기계 문명의 병사 하나가, 검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