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6화 2. 매복을 만나다 (2) >
* * *
마타야 협곡의 위치는 당연히 ‘마타야 산맥’의 지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샤이야 산맥의 남부에서 마타야 산맥으로 이어지는 험준하고 골이 깊은 협곡이 바로 마타야 협곡.
그 때문에 이제 슬슬 샤이야 산맥의 끝자락에 다다른 이안과 셀라무스의 전사들은 전장을 코앞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순찰대는 본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시야를 확보하라.”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전장이 가까워진 탓인지 이안의 명령도 점점 더 신중해지기 시작하였다.
‘기습이라도 당하면 곤란하니 말이지.’
‘전장’의 성격을 띤 전투와 평범한 필드 던전의 가장 큰 차이는 상대에게도 ‘전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필드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난이도 높은 던전이라 해도 몬스터들이 전략을 가지고 움직이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강력한 함정이나 복잡한 트릭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전략과 성격이 달랐다.
적어도 던전의 장치들은 상대에 따라 가변적으로 움직이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리 NPC들이라 해도 카일란의 AI 수준이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니까.’
하여 이안은 앞으로 전진 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적의 전략을 간파해 내기 위함과 동시에, 반대로 효율적인 전략을 구상하기 위해서 말이었다.
‘이 복잡한 지형을 이용할 방법을 구상하면 좋겠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
이안의 눈에 뭔가 흥미로운 전조(前兆)가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 * *
‘좋아, 성공이군.’
요르간드는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루칼과 함께 짠 계획의 첫 번째 단추가 성공적으로 끼워졌으니 말이었다.
띠링-!
-파괴의 마도공학자 ‘피켄로’가 당신에게 지휘권을 일부 부여합니다.
-이제부터 추가 명령이 있기 전까지, 선봉A-1 부대를 지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짠 계획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전장이 열리기 전 피켄로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하고, 각자 선봉대의 한 개 소대 이상의 지휘권을 얻어 낸 뒤 마치 별동대처럼 그들을 운영하며 최대한 많은 전공을 쓸어 담는 것이었다.
루칼과 요르간드는 지금껏 수많은 전장을 함께 누벼 온 듀오였고, 둘이 손발을 맞춰 가며 별동대를 운용한다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무런 지휘권 없는 상태로 참전하는 것보다, 지휘관으로 참전하는 것이 보상 측면에 있어서도 배 이상은 유리하였다.
-루칼 : 요르간드, 성공했어?
-요르간드 : 당연하지! 형은?
-루칼 : 나도 물론.
-요르간드 : 좋았어.
그리고 이 첫 번째 단추가 맞춰진 다음, 둘의 계획은 간단하였다.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 최대한 많은 공헌도와 경험치를 갉아 먹어야 해.’
일단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고 나면 참전한 유저의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렇게 NPC들에 비해 월등하게 레벨이 부족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물론 그 한정된 보상만 해도 충분히 막대한 양일 터였지만, 요르간드와 루칼은 그에 만족하지 못했다.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움직이며 선제적으로 싸울 수 있는 선봉대를 노린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루칼 : 다시 얘기하지만 제발 무리하지 마, 요르간드. 어디까지나 제일 중요한 건, 최소한의 피해로 지속적인 이득을 보는 거니까.
-요르간드 : 나도 알고 있어, 형. 위험하다 싶으면 귀신같이 빠질 테니까 걱정 말라고.
암살자 클래스인 요르간드는 물론 루칼 또한 기동성에 특화되어 있는 클래스였다.
클래스 자체는 전사 클래스였으나 히든 스킬과 고유 능력들 중에 마치 레인저나 암살자 느낌이 나는 것들을 많이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두 사람의 전략은 다름 아닌 ‘게릴라’ 전략.
-루칼 : 제일 효율 좋은 건, 지휘관급 하나 따고 빠지는 거야. 소대장급 하나만 따도, 일반 병사 너덧 잡은 것만큼 경험치를 주더라고.
-요르간드 : 오케이, 알았어. 그럼 이렇게 하자.
-루칼 : 어떻게?
-요르간드 : 지휘관으로 보이는 녀석 찾으면, 형이 내 부대원들까지 데리고 어그로를 끌어 줘.
-루칼 : 그 다음엔?
-요르간드 : 내가 기회 봐서 녀석을 암살하면, 그 틈에 몇 놈 더 잡고 나오는 거야.
-루칼 : 심플하지만 나쁘지 않은 계획이네.
그리하여 미리 계획을 맞춘 두 사람은 각자의 부대를 이끌고 마타야 협곡의 초입을 향해 이동하였다.
군단의 정찰대로부터 받은 정보에 따르면 곧 정령계의 군대가 협곡으로 진입할 테니, 매복을 하여 기회를 엿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10분 정도를 움직였을까?
“……!”
선봉에서 신속하게 이동하던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 멈춰 섰다.
한눈에 보아도 너무 완벽해 보이는 캠핑(Camping) 자리가 나타난 것이다.
곧바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다시 서로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루칼 : 아무래도 여기가 좋겠지?
-요르간드 : 캬, 여기……! 아주 기가 막히네.
동시에 메시지를 보낸 뒤, 곧바로 협곡의 안쪽으로 이동하는 두 사람.
그들은 지형을 살펴보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루칼 : 근데 조금 찜찜하긴 해.
-요르간드 : 뭐가?
-루칼 : 너무 대놓고 매복하기 좋은 곳이라서 말이지.
-요르간드 : 그게 왜?
-루칼 : 내가 적이라면, 여긴 무조건 한번 확인하고 움직이겠어.
-요르간드 : 하긴, 그것도 일리는 있는 말이네.
-루칼 : 그렇지?
루칼은 뛰어난 랭커이기도 했지만 그에 앞서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다.
카일란 영국 서버가 오픈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벌써 몇 년 동안 유럽 최고의 길드를 이끌어 온 길드 마스터였으니 말이다.
지금껏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던 그는 이런 상황에서 노련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러한 역발상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요르간드 : 하지만 너무 걱정 마, 형. 어차피 상대 지휘관도 NPC일 것 아냐.
-루칼 : 우리처럼 유저가 섞여 있을 수도 있잖아?
-요르간드 : 있다고 하더라도, 총 지휘관일 리는 없지.
-루칼 : 하긴. 그건 그러네.
-요르간드 : 아마 일반 병사 직책으로 참전했을 확률이 높겠고, 끽해야 우리처럼 소대장급 정도 되겠지.
-루칼 : 네 말이 맞아.
-요르간드 : 물론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이 좋은 자리를 포기하는 것도 손해라고 생각해.
-루칼 : 그래. 경계는 할 필요가 있겠지만, 처음부터 버릴 필요도 없겠지.
결국 적들이 이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고 해도, 미리 대비만 하고 있으면 손해 볼 것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요르간드 : 빨리 진영 세팅해. 곧 놈들이 나타날 거라고.
-루칼 : 알겠어, 요르간드.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각자의 병력에게 신속히 명령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라밀, 너는 이쪽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놈들이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소대장.”
“에이트, 너는 미리 마법을 캐스팅해 두고 있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곧바로 발동시켜.”
“그긍-! 알겠다!”
이어서 그렇게 숨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둘은 긴장된 표정으로 협곡을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전투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퀘스트 난이도도 난이도였지만 파괴의 군단 병력의 수준만 보아도 상대 병력이 얼마나 강력할지 정도는 추측이 가능했다.
-요르간드 : 발각된 거 같으면 바로 말해. 지체 없이 런하자고.
-루칼 : 내가 할 소리야, 요르간드.
그리고 그렇게 다시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척- 척- 척-.
협곡의 바깥쪽에서부터 두 사람이 기다리던 발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 * *
“카카.”
“왜 부르냐, 주인.”
“저 안쪽을 스캔해 줘.”
“저 어두운 동굴 말하는 거냐, 주인?”
“그래. 알면서 왜 또 물어.”
“저기 깜깜하고 무섭다, 주인.”
“헛소리 하면 맞는다.”
“힝…….”
마타야 협곡의 전반적인 지형은 기암괴석이 즐비했던 비자르 협곡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비자르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전체적인 규모.
높이나 깊이는 비자르 협곡만큼이나 깊숙하였지만, 마타야 협곡은 훨씬 더 좁고 조악한 좁은 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지금 이안의 눈에 들어온 협곡은 성인 다섯 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게 형성되어 있었다.
마치 깔때기 모양처럼 말이다.
‘적장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여긴 분명 뭐라도 심어 놨을 거야.’
홀쭉하게 들어간 협소한 골짜기 좌우에는 깎아지듯 가파른 절벽들이 솟아 있었고, 벽면에는 마치 아귀의 이빨처럼 어두운 동굴들이 작고 날카롭게 숭숭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동굴에는 두셋 이상이 매복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공간이 있었으니, 적을 기습하기에 이만큼 좋은 지형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알겠다, 주인. 다녀온다.”
“매복이 있는지 없는지만 확인하면 돼. 괜히 가까이 가서 놈들한테 걸리지 말고, 기척이 확인되면 바로 돌아와.”
“알겠다.”
포롱- 포롱-.
카카가 작은 날개를 흔들며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크로네가 조심스레 이안에게 물었다.
“매복을 대비하시는 겁니까?”
이어서 그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크로네 님.”
이안의 답을 들은 크로네는 의아한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확실히 이해되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본대는 여기서 멈추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이대로 조금 더 이동하면, 매복병들이 충분한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매복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크로네의 말에도 이안은 별다른 동요 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크로네가 한 생각을 이안이 하지 못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매복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있다 하더라도 곧바로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
“그리고 녀석들은 결국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마치 선문답 같은 이야기에, 크로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안은 에오스의 인정을 받은 셀라무스의 절대자였고, 이 이상의 참견은 월권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크로네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이안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매복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선 허리를 자르거나 후방을 쳐야만 하지. 여기서 곧바로 대가리를 들이 밀면 매복 자체가 의미 없어질 테니 말이야.’
좁다란 협곡 초입의 지형 때문에, 지금 이안의 부대는 일 열로 길게 늘어선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허리가 잘린다면, 부대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안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포롱포롱 날아갔던 카카가 이안에게 다시 돌아왔다.
“있다, 주인아.”
“얼마나?”
“한 서른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렇군.”
카카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크로네를 향해 작게 입을 열었다.
“매복이 있다는군요.”
“……!”
“다녀오겠습니다.”
“어딜요?”
“매복을 없애야지요.”
“예……?”
스슥-.
어이없는 표정이 된 크로네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이안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