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5화 2. 매복을 만나다 >
제니스는 당황했다.
아니, 당황을 넘어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사실 카일란을 플레이하다 보면, 게임 내 스토리에 의해 캐릭터의 통제권일 잃게 되는 경우는 제법 자주 있는 일이다.
때문에 제니스가 당황한 것은 단지 캐릭터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카일란의 히든 스토리에 진입하여 캐릭터 통제권을 잃게 만든 ‘주체’가 NPC가 아닌 ‘유저’라는 점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지금껏 이런 경우는, 들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었으니까.
‘워낙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니, 어떻게 보면 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한데…….’
게다가 그녀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셀라무스 부락 내의 자잘한 퀘스트들을 클리어하며, 이안이 보여 준 비상식적인 전투력.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그녀의 눈앞에 떠올라 있는 퀘스트 창이, 그녀의 혼돈에 마침표를 찍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파괴의 군단 섬멸전(에픽)(히든)>
-고대의 기계 전쟁 시절부터, 라카토리움의 가장 강력한 군단 중 한 곳으로 꼽히는 파괴의 군단. 파괴의 군단의 주인인 마도공학자 찰리스는 ‘대지의 성물’을 빼앗기 위해 그들을 정령계로 파견하였다. ……중략……. 하여 지금 셀라무스의 절대자는 전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려 한다. 셀라무스의 소환술사로서 이 전장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부족에 기여하도록 하자.
-퀘스트 난이도 : 측정 불가(Unknown)
*측정 불가 난이도의 퀘스트는 진행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퀘스트 조건 : ‘셀라무스의 전사’ 자격을 갖춘 유저, 셀라무스 부락에 머무는 동안, ‘전장’ 이벤트가 발동할 것.
-제한 시간 : 없음
*전장이 종료되기 전에 사망하더라도 획득한 공헌도를 수령할 수 있습니다.
*셀라무스의 군대가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퀘스트는 완료할 수 있습니다.
*셀라무스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모든 보상이 2배로 증가합니다.
<보상>
-명성(초월) 5천, ‘용맹스러운 셀라무스의 전사’ 칭호 획득
-셀라무스 부족 공헌도 15,000~???(획득 가능 공헌도는 전장에서 활약한 등급에 비례하여 증가합니다.)
<전장 특별 보상>
*활약 랭크 B+ 등급 이상일 시
-셀라무스 전사의 전투 복대(영웅)(초월)
*활약 랭크 A등급 이상일 시
-셀라무스 전사의 전투 두건(영웅)(초월)
……중략…….
*활약 랭크 S등급 이상일 시
-셀라무스 전사의 황금 갑주(신화)(초월)
(전장 특별 보상은 하위 등급의 보상까지 전부 획득 가능합니다.)
퀘스트 창을 읽어 내려가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제니스.
‘이안은 사실, 유저가 아니라 LB사에서 만든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기획팀에서 들었다면 억울함에 부들부들 떨었을지도 모를 이야기였지만, 제니스는 진심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이 납득하기 너무 힘들었으니 말이었다.
‘측정 불가 난이도는 대체 뭔데? 심지어 진행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니…….’
이제는 하다하다 퀘스트 창의 메시지로부터 협박을 받는 제니스.
‘아무래도 이 퀘스트는 패스하는 게 여러모로 이롭겠지?’
제니스는 퀘스트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계속해서 갈등하였다.
이성적으로는 쳐다보지 말고 꺼 버려야 할 퀘스트 창이었지만, 협박(?)까지 받자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퀘스트 창의 하단부를 확인한 제니스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퀘스트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해야 돼.”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출정까지 남은 시간 : 24분 38초
-셀라무스 부족의 ‘전투 막사’에서 자동으로 ‘참전 신청’이 승인되었습니다.
-‘파괴의 군단 섬멸전(에픽)(히든)’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셀라무스 군대의 활동 반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파괴의 군단 섬멸전(에픽)(히든)’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셀라무스 절대자’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수행하지 않을 시, 그에 따른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후략…….
그녀가 퀘스트를 수락한 이유는 단 하나.
‘아니, B+ 랭크만 달성해도 영웅 등급 초월 장비라니. 이건 못 먹어도 고야.’
전장 특별 보상 목록에 있는 아이템들이 그녀에게는 너무 황홀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은 알고 있지만, 활약 랭크 S 등급이라도 달성하는 날엔 신화 등급의 초월 갑주까지도 획득할 수 있는 퀘스트.
어쨌든 그녀 또한 랭커의 피(?)가 흐르고 있는 몸이었으니, 이런 퀘스트에서 뒤로 뺄 수는 없는 것이다.
‘최대한 생존에 집중하면, 적어도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
시야의 한쪽 구석에 떠 있는 ‘출정까지 남은 시간’을 보며, 제니스는 마른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 * *
이안을 필두로 한 셀라무스의 병력은 빠르게 샤이야 산맥을 벗어나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동 과정에서 적지 않은 기계 괴수들을 만나야 했지만.
고작(?) 초월 80레벨밖에 되지 않는 일반 몬스터들은 강력한 셀라무스의 전사들 앞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뿐이었다.
스르릉-!
“더러운 기계 놈들! 단칼에 베어 주마!”
촤아악!
“모조리 부숴 주겠다!”
콰쾅-!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안은 평소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본인이 앞장서 검을 휘둘러 댔을 텐데, 지금은 다른 전사들에게 명령만 내리며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았으니 말이었다.
“흐음…….”
물론 헬라임과 카이자르 등의 가신들이나 소환되어 있던 소환수들은 앞장서 싸우고 있었지만, 이안의 본신은 얌전히 아이언의 위에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안이 얌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검투병들은 대충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되겠고…….’
지금 이안은 새로이 얻은 병력을 꼼꼼히 살펴보며 전투 방식을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금 기사들이 확실히 가장 탱킹 능력이 좋군. 백인장급 기사는 거의 그락투스 정예병 수준이야.’
처음 전장 퀘스트를 수령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이안은 셀라무스의 전사들이 이렇게 다양한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었다.
평전사는 그냥 다 같은 평전사인 줄 알았으며, 십인장이나 백인장 등의 계급에 의해서만 달라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대를 편성해 보니,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심지어는 같은 클래스의 전사들 안에서도 등급이 존재했으며, 개중에 뛰어난 녀석들은 확실히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같은 계급 내에서 초월 레벨은 비슷했지만 같은 초월 레벨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제각각 다 다른 NPC였던 것.
그래서 지금 이안은 ‘공부’ 중이었다.
그냥 시스템이 짜 놓은 기본 진영을 가지고 전투해도 어느 정도 효율은 나오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면 이안이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이대로 쭉 내려가면, 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대충 1시간 정도 걸릴 테고…… 시간은 그 정도면 충분하지.’
300명이 넘는 셀라무스 전사들의 고유 능력과 전투 스텟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지속적으로 전투 편성을 변경하는 이안.
“솔킨, 너는 2분대로 이동해.”
“명을 받듭니다, 절대자님.”
“5분대는 전부 마법 병단으로 구성한다. 분대 위치를 중단으로 옮겨.”
“옙, 마스터!”
그리고 그런 이안의 옆에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지켜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과연……! 이렇게 파격적인 변화라니!’
그는 다름 아닌, 셀라무스 부족의 지도자 크로네.
크로네는 지금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이안의 전투 편성에서 특별함을 느낄 수 없을 테지만, 누구보다 셀라무스 전사들 하나하나에 대해 잘 아는 그로서는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오늘 처음 출정하시는 분이 맞는 것인가! 대단한 통찰력이구나.’
전사들 하나하나의 능력치를 날카롭게 판단해서 전투 편성을 하는 이안의 모습이 그로서는 믿기지 않았던 것.
물론 ‘정보 창’의 존재를 모르는 NPC이기 때문에 더 놀란 것도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안의 지휘력은 정말 탁월한 것이었다.
“좋아.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생존률을 더 높일 수 있겠어.”
“……!”
“이렇게 하니까 확실히 기동성이 살아나는군.”
“과연……!”
그리고 그렇게 1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그 과정에서 열댓 번의 자잘한 전투를 겪은 이안의 셀라무스 군단은 처음과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평범한 사각편대였던 진영의 구성 자체가 훨씬 더 다채롭고 복잡한 모양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좀 만족스럽군요.”
“그렇습니까?”
“슬슬 적응도 좀 되는 것 같고 말이지요.”
“대단하십니다!”
크로네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이안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신이 생기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전력이야. 군단을 잘만 활용하면,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쓸어 담을 수 있겠어.’
평균 레벨 120레벨 정도의 셀라무스 전사들이었지만 이안이 가진 세 가지 성물 덕에 훨씬 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그들.
덕분에 전장이 가까워질수록 이안의 입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 * *
“빨리 움직여라! 놈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셀라무스 놈들의 위치가 포착되었다! 모두 서둘러!”
온통 시뻘건 불길과 칠흑 같은 연기로 둘러싸여, 마치 지옥의 군대를 연상케 하는 기계 문명 ‘파괴의 군단’.
파괴의 군단을 통솔하는 지휘관인 ‘피켄로’는 지금 무척이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눈을 시뻘겋게 뜨고 찾고 있었던, ‘숲의 대전사’를 드디어 포착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었다.
‘놈, 역시 대지의 부족들과 합류하기 위해 남하하는군. 길목을 지키고 있길 잘했어.’
찰리스 학파의 수석 마도공학자인 피켄로는 무려 초월 레벨 150이 넘는 강력한 NPC였다.
게다가 다른 마도공학자들과 달리 그는 상당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전투계열의 공학자였기 때문에, 비슷한 레벨의 마법사만큼이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번에도 녀석을 놓친다면, 마스터께서 폭발하실 터. 어떻게든 대전사 놈을 저지하고 대지의 성물들을 회수해야만 한다.’
피켄로는 비장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봤을 때 대전사의 능력이 대단한 것은 확실했지만, 그동안 라카토리움에서 파견된 병력들의 구성이 허술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단 선봉대를 꾸려, 셀라무스 전사들의 전력 구성을 파악해 봐야겠지. 매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하여 피켄로는 전장에 참전한 기계 전사들을 대상으로 선봉을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전면전과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주력 병력들은 배제할 생각이었다.
“너, 너. 그리고 너. 이쪽으로.”
“예, 피켄로 님!”
드르륵- 그르르륵-!
그런데 피켄로가 이렇게 병력을 편성하던 그때.
그의 옆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스르륵 하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발견한 피켄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넌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마족이군.”
“그렇습니다, 피켄로 님.”
“너도 선봉대에 포함되고 싶은가?”
“기회를 주신다면,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새카만 묵빛 두건에, 적갈색의 핏빛 망토를 두른 남자.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요르간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