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2화 1. 절대자 시험 >
일전에도 언급됐던 적이 있지만, 카일란의 퀘스트 난이도는 가변적으로 책정된다.
같은 퀘스트라도 어떤 유저가 받느냐에 따라, 퀘스트 난이도 표기가 변동된다는 뜻이다.
유저의 초월 레벨과 전투력, 지금까지 클리어해 온 퀘스트 등.
해당 유저의 히스토리와 정보를 반영하여, 난이도가 설정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안과 제니스의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난이도는 서로 완전히 다른 표기를 보이고 있었다.
퀘스트 적정 레벨이 115레벨인 것이야 비슷했지만, 제니스에게는 쿼드라 S등급으로 보이는 퀘스트 난이도가 이안의 눈에는 다음과 같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B-
B- 등급의 난이도라면, 이안에게는 식후 운동거리조차 되지 않는 수준!
‘일단 시작은 무난하네.’
이안은 덜덜 떨고 있는 제니스와 함께, 부락 입구의 셀라무스 경비병을 향해 다가갔다.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선, 녀석에게 말을 걸어야 했으니 말이다.
“혹시 저희가 도울 만한 일이 있습니까?”
“오오, 마침 잘되었군. 손이 부족하던 참인데…….”
이안과 제니스를 한 차례 훑어본 경비병이, 살짝 놀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런데 말이야.”
“예?”
“이방인에게서 어찌 셀라무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그야 저 또한 셀라무스의 힘을 계승했으니까요.”
“오호, 그런가……?”
이어서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우리 셀라무스 부족의 두 번째 절대자께서도 이방인이셨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하하.”
“그리고 무엇보다, 전사의 눈은 진실만을 보여 주니 말이야.”
이안과 눈이 마주친 경비병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그가 ‘전사의 눈’이라고 한 것이, 이 황금빛 눈동자를 뜻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던 이안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셀라무스의 두 번째 절대자라 함은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 경비병은 알아보지 못하나 보군.’
이안은 더욱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이전에 그가 진행했던 셀라무스의 퀘스트들과 확실한 연결 고리가 느껴졌으니 말이다.
“여하튼 잘되었어. 지금 족장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귀찮은 일들이 생겨났거든.”
“귀찮은 일이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부락의 주변으로 오염된 기계 괴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네.”
“아하, 그렇군요.”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녀석들을 혼내 주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들을 쫓아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렇지. 자네, 말이 잘 통해서 마음에 드는군.”
띠링-!
경비병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퀘스트 내용이 갱신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와 함께 퀘스트 창을 확인한 이안은 B-라는 낮은 등급의 난이도가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거의 몸 풀기 퀘스트네. 이러니까 난이도가 이것밖에 안 되지.’
물론 옆에 있던 제니스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었다.
‘미친……! 초월 110레벨이나 되는 기계 괴수들을 열 놈이나 처치하라고? 이게 말이나 되는 퀘스트야?’
그렇게 제니스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이안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 * *
대지의 힘을 회수하고 트로웰을 깨워 내기 위한, 세 번째 퀘스트이자 마지막 퀘스트인 ‘대지의 결의’ 퀘스트.
마지막 퀘스트여서 그런지 이 대지의 결의 퀘스트는 이전의 두 퀘스트보다 더 방대하고 많은 양의 빌드업을 필요로 하였다.
부락에 도착했다고 바로 본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 이것저것 자잘하고 귀찮은 퀘스트들이 많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안의 입장에서는 보상도 딱히 별 볼 일 없는 데다, 단순 노가다에 가까운, 귀찮기만 할 수도 있는 퀘스트들.
하지만 그 귀찮음도 잠시뿐, 이안은 곧 이러한 퀘스트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셀라무스 전사들과의 본격적인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기 전, NPC들과의 친밀도를 쌓고, 유저가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퀘스트들이었던 것이다.
“오, 이렇게나 빠르게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다니. 자네, 생각보다 더 뛰어난 전사였구먼.”
띠링-!
-셀라무스의 돌격 전사 ‘라로토’와의 친밀도가 +8만큼 상승합니다.
-‘라로토’가 당신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흠흠, 이 정도야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여튼 고생했네. 자네의 용맹은 대단하군.”
띠링-!
-셀라무스의 수비대장 ‘아이타’와의 친밀도가 +12만큼 상승합니다.
-‘아이타’가 당신의 용맹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잘한 퀘스트들 중 어떤 특정 퀘스트를 클리어할 때에는, 셀라무스 부락 내의 한정 콘텐츠가 열리기도 하였다.
“자네만큼 검을 잘 다루는 전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자네라면 우리 셀라무스 전사들의 혼이 깃든, 연무장을 사용할 충분한 자격이 있겠어.”
띠링-!
-이제부터 ‘셀라무스 부락’의 ‘연무장’ 시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연무장’에서는 셀라무스 전사들과의 실전 훈련을 통해, 각종 셀라무스 부족의 무예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 자네, 자연의 힘을 정말 훌륭하게 사용하는군.”
“그렇습니까?”
“좀 더 정순한 자연의 힘을 다루기 위해, 때로는 자네의 정령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도 좋을 거야.”
“휴식……요? 그건 어떻게…….”
“부락 동쪽에 있는 ‘자연의 쉼터’에 한번 가 보시게. 그곳에 정령들을 풀어 두면, 아마 무척 좋아할 걸세.”
띠링-!
-이제부터 ‘셀라무스 부락’의 ‘자연의 쉼터’ 시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쉼터’에는, 소환 마력 소모 없이 정령을 소환해 둘 수 있습니다.
-일정 시간 이상 자연의 쉼터에 소환해 두면, 해당 정령의 전투력과 회복력이 일시적으로 극대화됩니다.
……후략…….
“오오……!”
그리고 이런 퀘스트가 하나하나 클리어될 때마다, 옆에서 혼미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안 님은 대체 레벨이 몇인 거야?’
그녀는 당연히, 이안의 파티원인 제니스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렇게 되면 내가 랭커 타이틀 달고 있는 게 너무 부끄럽잖아.’
파티원으로서 함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나눠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안에게 미안할 지경인 제니스.
“저, 이안 님……?”
“예?”
“제가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요…… 죄송해요…….”
“아뇨. 별말씀을. 방금도 정령목 채집은 제니스 님이 다 하셨잖아요?”
“그, 그거야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무튼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빨리 다음 퀘스트나 하러 가죠. 이런 자잘한 퀘스트 얼른 다 깨고, 메인 퀘스트 시작해야 되니까요.”
“아, 네넵.”
“아마 남은 선행 퀘스트 다 깨야 족장인지 뭔지가 돌아오나 본데…… 우리 빨리 끝내 버리죠.”
“알겠습니닷!”
그리고 이쯤 되자 제니스는 이안의 놀라운 인성(?)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 님은 게임만 잘하는 게 아니라, 인성도 거의 천사였어……!’
그렇게 제니스는 점점 더 이안의 마수(?)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 * *
이안은 사악한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제니스의 생각처럼 그렇게 착한 인물 또한 아니었다.
제니스는 이안이 자신을 도와준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이안은 단지 별다른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채집 퀘 진짜 극혐인데. 대신해 줄 사람 있으니까 좋네.’
만약 그녀가 짐처럼 느껴진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손절(?) 가능한 인물이 이안인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안이 아무 이유 없이 제니스를 데리고 다니는 것 또한 아니었다.
이안이 그녀를 굳이 데리고 다니는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에오스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건 꼭 확인해 보고 싶은데.’
그가 ‘셀라무스의 절대자’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얻었던 전직서.
그것에 대해 에오스가 이야기했던, 의미심장한 이야기들.
-혹시 믿을 만한 실력자가 있다면, 전직서를 그에게 주어도 괜찮을 것이야.
“그건 어째서입니까?”
-자네가 ‘절대자’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한, 그가 자네의 손발처럼 움직여 줄 것이기 때문이지.
과연 이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이었는지, 이안으로서는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이렇게 전직서의 주인을 우연히 만났으니, 그 정도는 확인해 보는 게 예의 아니겠어?’
그리고 이안은 이 셀라무스의 부락 안에서, 분명히 그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연무장이나 자연의 쉼터와 같은 셀라무스 부락만의 콘텐츠 중에 분명 전직서의 비밀이 담겨 있는 콘텐츠도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이다.
하여 이안은 퀘스트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며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셀라무스 부락의 퀘스트는 해가 중천을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흠, 이제 어지간한 NPC들은 한 번씩 다 거쳐 온 것 같은데. 부족장인지 뭔지는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나?’
그리고 이안이 그렇게, 슬슬 지루함을 느껴 갈 때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셀라무스 부락’의 최소 공헌도를 달성하였습니다.
-‘대지의 결의’ 퀘스트의 메인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간결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이안의 눈앞에 떠오름과 동시에, 부락 안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뿌우우- 뿌우-!
널따란 부락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커다란 뿔피리 소리!
“이게 무슨 소립니까, 아이타 님?”
“하하, 자네는 이 소리를 처음 듣나 보군.”
“저야 당연히…….”
“부족장께서 부락에 복귀하실 때, 불어 올리는 뿔피리 소리라네.”
“아……!”
“이번에도 역시 승전을 올리셨나 보군.”
셀라무스의 족장이 복귀한다는 소리에,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그를 만나 ‘대지의 결의’를 회수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곧바로 대지의 결의를 얻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퀘스트의 본론이 시작되겠지.’
하여 이안은 부락의 입구 쪽으로 나와, 부족장이라는 인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서브 퀘스트들도 전부 다 마무리한 지금, 더 시간 끌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으니 말이었다.
뿌우-!
저벅- 저벅- 저벅-!
나팔 소리와 함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벅저벅 걸음을 맞추며 천천히 부락 안으로 들어오는 셀라무스의 전사들.
이안은 그들 중에 어렵지 않게 부족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홀로 말을 타고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고 특별한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다른 전사들 사이에 있던 이안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걸어 나왔다.
그에게 트로웰의 전언을 전하고, 곧바로 퀘스트를 진행할 생각으로 말이다.
“당신이 셀라무스 부족의 지도자입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셀라무스의 부족장과 마주친 뒤의 상황이, 그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다, 당신은……!”
이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셀라무스의 부족장이, 돌연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의 앞에 고개를 숙여 보인 것.
“셀라무스의 절대자를 뵙나이다!”
그의 목소리는 부락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그것을 시작으로 부락 안에 있던 모든 NPC들이 이안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