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9화 7. 뜻밖의 만남 (2) >
* * *
포털이 열리자, 이안과 제니스가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움직인다.
포털이 열리니, 어쩐지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 탓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열린 포털 안에서, 불쑥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으니 말이었다.
“오랜만이군. 이안, 그리고 제니스.”
살짝 굽은 등에 커다란 뿔.
독특한 실루엣을 가진 노인이,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두 사람 또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니, 정령계에서 일정 수준 이상 퀘스트를 진행한 유저라면, 모를 수가 없는 NPC라고 할 수 있었다.
“샬론, 오랜만이네요.”
“샬론……? 여긴 어떻게?”
정령 수호자 샬론과 마주한 이안과 제니스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야 다른 서브 퀘스트들과 정령계의 메인 스토리를 통해 정령 수호자의 역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제니스의 경우에는 정령 수호자가 단지 마을을 지키는 NPC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놀란 제니스와 달리, 이안으로서는 정령 수호자 샬론의 등장이 딱히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
‘어차피 고대의 정령술 퀘스트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샬론을 한번 찾아가야 했었는데…… 시간을 아낄 수 있겠어.’
이어서 상반된 표정의 두 사람을 향해, 샬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내가 이곳에 소환되었다는 건, 잊힌 셀라무스의 안배가 전부 모였다는 말이겠군.”
“셀라무스 부족의 흔적들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렇다네, 이안. 그것은 셀라무스 부족에서 남긴 흔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정령왕들의 남긴 안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걸세.”
이안과 샬론의 대화를 듣던 제니스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는지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잠깐, 지금 샬론이 분명…… 이안이라고 한 것 같은데?’
NPC인 샬론이 이안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인물의 캐릭터 네임이 정확히 이안이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도 이안이 진짜 그녀가 아는 그 ‘이안’이라고 생각지 않고 있었던 제니스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는 사건.
하지만 제니스가 놀라든 말든 샬론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쨌든 두 영웅들 덕분에, 이렇게 고대의 안배가 깨어날 수 있었군.”
“고대의 안배라…….”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어. 이제는 정말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겠지.”
샬론의 말이 이어질수록, 제니스는 더욱 혼란스런 표정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본인이 가진 히든 클래스의 티어 상승 퀘스트를 진행 중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의 이야기가 샬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뭐야? 갑자기 안배는 또 무슨 말이야? 난 그냥 셀라무스의 부락을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하지만 혼란스런 것과 별개로 퀘스트는 분명히 클리어되었고, 이안과 샬론의 대화가 충분히 흥미로웠기 때문에, 일단 제니스는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녀 또한 최상위권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높은 수준의 랭커였으니, 차원계의 메인 스토리와 관련되어 보이는 내용에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이어지면서 이안 또한 자신이 궁금했던 부분들을 묻기 시작하였다.
“셀라무스의 부락을 찾아가야 합니다, 샬론 님. 그들의 부락이 유적지 안에 있는 게 맞습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일 테지만…… 이곳은 단지 고대 정령 마을들의 유적지일 뿐일세.”
“역시…….”
“셀라무스 부족의 부락은 비터스텔라의 최북단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
샬론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그의 말처럼 이안 또한, 이곳에 셀라무스의 부락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겠지. 트로웰 님께서 남긴 마지막 대지의 힘을 그들이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야.”
“샬론 님께서 저희를 인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이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샬론이 두 사람을 향해 주름진 손을 내밀었다.
“따라오시게, 이안. 그리고 제니스.”
“……!”
“셀라무스의 부락을 찾기 위해서는, 자네들이 가진 그 ‘정령왕의 머리 장식’을 완성해야 할 테니 말이야.”
샬론이 손을 내밀자, 이안과 제니스의 걸음이 자연스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띠링-!
두 사람의 눈앞에 퀘스트 정보 창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프뉴마 마을의 비밀 (에픽)(선행)(연계)’>
-고대의 정령계에는 사대 속성의 힘을 가진 정령 마을들이 존재했었다. 동쪽, 불의 성소를 지키는 마을인 ‘퓌라’마을과 서쪽, 바람의 성소를 지키는 마을인 ‘프뉴마’마을. 남쪽, 땅의 성소를 지키는 마을인 ‘페돈’마을과, 마지막으로 북쪽, 물의 성소를 지키는 마을인 ‘휘도르’마을까지. 하지만 고대에 정령계 침공에 성공했던 기계문명은 가장 먼저 사대 정령 마을을 공격했었고, 그 결과 바람의 마을인 프뉴마 마을만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바람의 정령왕 에실론의 희생을 통해, 프뉴마 마을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 정령 마을이 지키던 사대 속성의 힘은 정령 수호자들에 의해 프뉴마 마을로 옮겨졌다. 성소에 담긴 힘들마저 기계문명에 전부 빼앗긴다면, 자연 부족들의 힘이 너무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뒤늦게 마을로 돌아온 땅의 정령왕 트로웰은 에실론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폐허가 된 세 곳의 마을에 각기 자신의 안배를 남겨 놓았다. 당시 그를 도와 기계문명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던 셀라무스의 전사들에게 부탁하여, 폐허 속에 자신의 안배가 담긴 금속 조각들을 숨겨 놓은 것이다. ……중략……. 당신은 트로웰이 남긴 그 모든 안배들을 전부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하여 프뉴마 마을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하나의 조각을 얻는다면, 비로소 셀라무스 부족 부락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령 수호자 ‘샬론’을 따라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자. 당신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그는 기꺼이 ‘정령왕의 머리 장식’ 마지막 조각을 내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C+
-퀘스트 조건 :‘정령왕의 머리 장식 조각’ 3개 이상 보유, ‘셀라무스 부족’의 인정을 받은 자
-제한 시간 : 없음
*진행 중인 퀘스트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가변 퀘스트입니다.
-보상 : 명성(초월) 3,000, ‘트로웰’과의 친밀도+5 상승, ‘엘리샤’와의 친밀도+5 상승, 정령왕의 머리 장식 네 번째 조각
* * *
이안과 제니스는 곧바로 프뉴마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령 수호자 샬론이 나타난 그 포털로, 함께 다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프뉴마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먼저 ‘고대의 정령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물 속성의 서브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얻은 고대 정령술의 유물을, 정령 수호자인 샬론에게 건넨 것이다.
“샬론 님, 혹시 이 유물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이, 이것은……!”
“고대의 정령술과 관련된 유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네의 말이 맞다네. 이것은 엘리샤 님께서 남기신 유물인 듯하군.”
“역시 그렇군요.”
“유실된 고대 정령술의 유물들은 고대의 강력한 정령술을 연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그렇다면 이 유물을, 샬론 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네. 이것으로 많은 부분 연구가 진척될 테니 말이야.”
“별말씀을요.”
그리고 퀘스트 내용에 쓰여 있던 것처럼, 이안은 ‘고대의 정령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정령술’의 하위 카테고리. ‘고대의 정령술’ 슬롯이 오픈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고대의’ 수식어를 가진 정령 마법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고대의’ 수식어를 가진 정령을 소환할 시, 해당 정령의 모든 전투 능력이 5%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크, 역시 물 속성 서브 퀘를 선택하길 잘했어. 훈이 녀석에게는 다음에 밥이라도 한 끼 사 줘야겠군.’
하지만 새로 얻은 ‘고대의 정령술’에 대한 탐구는, 조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안에게 조각탑을 받아 간 샬론이, 곧바로 퀘스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자네들이 트로웰 님의 안배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 정령 수호자들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도록 하겠네.”
“준비라면……?”
“프뉴마 제단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사대 속성의 성소들을 다시 꺼내어 복원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라네.”
“그렇군요.”
“하니 북쪽으로 가기 전, 우리를 조금만 도와주시게나.”
그리고 난이도 C등급의 퀘스트답게, ‘프뉴마 마을의 비밀’ 퀘스트는 무척이나 손쉬운 것이었다.
“어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바람 속성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속성의 중급 정수들을 각각 20개씩 구해다 주시면 된다네. 그 정도의 속성 에너지라면, 꺼져 있는 성소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과거 정령 수호자들은 불, 물, 땅 속성의 성소를 가져와 프뉴마 제단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
기계문명의 눈을 속이기 위해, 모든 기능을 정지시킨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려 하니, 더 이상 기계문명을 속일 필요가 없어졌다.
하여 이안이 트로웰의 안배를 이행하는 동안, 꺼져 있던 세 개의 성소를 다시 피워 올리려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기꺼이 구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 부탁은 이안에게 정말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상급이나 최상급도 아니고 중급이라면…… 20개가 아니라 200개라도 전혀 어렵지 않지.’
이안에게는 처음 정령계에 입성했을 때 찰리스로부터 강탈한(?) 기계 채굴장이 있었고, 그 채굴장은 P-77호 덕에 아직까지도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오, 고맙네, 이안. 이 정도면 충분하군.”
하여 이안은 순식간에 속성 정수들을 구해 왔고, 덕분에 연계 퀘스트는 곧바로 진행되었다.
파티원인 제니스는 뭔가 해 볼 겨를도 없이 말이다.
“주, 중급 정수를 총 60개나…… 제가 너무 업혀 가는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제니스 님. 퀘스트를 빠르게 진행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정 미안하시면, 다음 연계 퀘스트에서 몸으로 떼우……. 아니, 더 열심히 해 주시면 됩니다.”
“그야 물론이죠!”
그렇게 이안의 자본력(?) 덕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마지막 선행 퀘스트.
띠링-!
-‘프뉴마 마을의 비밀 (에픽)(선행)(연계)’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을 3,000만큼 획득하였습니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과의 친밀도가 +5만큼 상승하였습니다.
-물의 정령왕 ‘엘리샤’와의 친밀도가 +5만큼 상승하였습니다.
-정령왕의 머리 장식, 마지막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후략…….
이어서 모든 조각이 모인 정령왕의 머리 장식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자, 이안. 그리고 제니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네.”
“그렇습니까?”
“이 물건이 그대들을 셀라무스의 부락으로 인도해 줄 걸세.”
완성된 머리 장식을 받아 든 이안은, 조심스레 아이템의 정보 창을 오픈해 보려 하였다.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하는 물건인지 아직 감이 오지 않았으니, 일단 정보 창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
“엇……?”
이안과 제니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건이 충족되어, ‘정령왕의 머리 장식’ 아이템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퀘스트를 공유 중인 모든 파티원의 좌표가 자동으로 이동됩니다.
돌연 머리 장식의 주변으로 커다란 기운이 뿜어 나오기 시작하더니, 두 사람을 감싸 버렸으니 말이다.
“무운을 빌도록 하겠네. 이안, 제니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게야.”
이어서 칼칼한 샬론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띠링-!
-샤이야 산맥 북측, (1982, 27798) 좌표로 이동되었습니다.
-‘셀라무스 부족의 부락’을 최초로 발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