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9화 4. 이라한의 설계 (2) >
* * *
띠링-!
-비자르 협곡의, ‘호루스 요새 C-1’ 구역을 돌파했습니다.
-퀘스트 진척도가 13%만큼 증가합니다.
-‘그락투스’일족의 공헌도가 37,520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비자르 협곡의, ‘호루스 요새 B-3’ 구역을 돌파했습니다.
-퀘스트 진척도가 17.5%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카이자르와 헬라임을 위시한 이안은, 정말 거침없이 호루스 요새를 격파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이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신속하게 그락투스의 부락으로 도착하는 것.
그 때문에 이안 일행의 이동 경로는 거의 직선에 가까웠다.
앞을 막는 적들만을 빠르게 처치하고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으니 말이다.
‘사방에 득실거리는 경험치 덩이들이 아깝긴 하지만……. 무리하지 말자. 어차피 조금 뒤로 미루는 것뿐이니까.’
물론 이안이 모든 소환수를 전부 소환한 뒤 작정하고 싸운다면, 요새 하나 정도를 전멸시키는 건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비자르 협곡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요새의 스펙은 점점 더 높아졌고,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시간을 끄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선택도 없었으니.
일단 그락투스 부락에 도달하여 지원군을 얻는 것이, 이안의 입장에서는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이다.
“좋아, 좌표상으로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고…… 저 마지막 요새만 넘으면 그락투스의 부락에 도달할 수 있겠군.”
순식간에 또 하나의 요새를 돌파한 이안이, 미니맵을 확인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퀘스트 진행이 수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퀘스트에 책정된 난이도에 비해 너무 쉬운데…… 저 안에 뭔가 변수가 있으려나?’
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시야에 나타난 커다란 요새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띠링-!
이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락투스 일족의 부락을 찾아서 (에픽)(연계)’ 퀘스트의 진척도를 90% 이상 달성하였습니다!
-퀘스트의 마지막 페이즈가 오픈됩니다.
“마지막…… 페이즈라고?”
-기계 문명 고대의 소환진이 작동을 시작합니다.
-기계 군단 지원군이 도착하였습니다.
이어서 높다랗게 솟아 있는 비자르 협곡의 기암괴석들이, 굉음을 뿜어내며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쿠쿵-쿠쿠쿠쿵-!
* * *
마족 진영의 길드들 중, 이라한의 마수(?)에 걸려든 길드는 총 세 곳이었다.
바로 퀘스트 시작부터 이안에게 몰살당한 ‘소브레’길드와, 패자부활전에서 소브레의 상대로 대진이 짜여 있는 스키노카케 길드.
마지막으로 당장 다크루나와 패자부활전에서 만나게 될 길드인, 그라탄 길드까지 말이다.
이 세 길드는 모두 ‘에픽 퀘스트’라는 먹음직스런 떡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고, 그것은 사실 정해진 운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닌 그 누구였다 하더라도, 차원계의 메인 에픽 퀘스트를 덥석 물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특히 최전방에 투입되었던 소브레 길드와 그라탄 길드의 길드원들은, 거의 영문도 모른 채 전멸하였다.
단지 ‘숲의 대전사’라는 이름의 버그성(?) NPC의 이름만이, 그들의 뇌리에 남았을 뿐이었다.
“으아! 이거 깨라고 만들어 놓은 퀘스트 맞아?”
“제기랄, 그냥 욕심 부리지 말고 패자부활전이나 준비할걸…….”
“젠장, 이 퀘스트 물어 온 놈 누구야? 당장 자수해!”
만약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이라한이 이들의 좌절을 라이브로 보았더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터.
모든 상황이 자신의 설계대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는 것이니 말이었다.
“으드득! 기사 대전 그냥 기권해 룽바오.”
“하, 하지만……!”
“최고 레벨 다섯이 빠진 상태로 참전해서, 대체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크윽……!”
특히나 자력으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던 그라탄 길드와의 일전에서, 공짜 승리를 가져가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꿀맛이라 할 수 있었다.
-마족 진영의 ‘그라탄’길드가, 기권을 선언하였습니다.
-패자부활전 B조의 경기에서는, ‘다크루나’길드가 자동으로 부전승 처리됩니다.
글로벌 메시지를 확인한 뒤, 거의 축제 분위기에 빠진 다크루나 길드!
“정말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대로 됐군요!”
“마스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후후, 내가 뭐라 했나? 우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니까 그러네.”
“크, 대박입니다, 마스터. 이렇게 되면 패자부활도 충분히 가능하겠어요!”
“우린 딱 세 번째 경기만 철저히 준비하면 돼. 2경기까지도 거의 거저먹을 수 있을 거야.”
아직 패자부활전이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지략(?)으로 1승을 챙긴 이라한은, 무척이나 기세등등한 표정이 되었다.
‘그라탄이 기권한 걸 보니, 퀘스트는 이미 실패. 지금쯤 다른 두 곳도 전부 박살이 나 있겠고…… 후후.’
하지만 그 의기양양한 표정의 속에는, 안도의 표정 또한 숨겨져 있었다.
그가 판단을 잘못했더라면, 지금쯤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되어 있었을 테니 말이다.
‘휴, 만약 상대가 이안이라는 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기권패를 하는 것은 우리 길드가 되었었겠지.’
이안의 얼굴이 떠오르자, 순간 아찔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이라한.
‘내가 이안에게 고마워할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라한의 예상과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스키노카케’ 길드의 상황이었다.
이라한의 예상대로 이미 게임 아웃된 두 길드와 달리, 스키노카케는 아직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으니 말이었다.
* * *
스키노카케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킨노스케는, 지금 무척이나 설레는 중이었다.
‘이런 행운이 뜬금없이 찾아올 줄이야. 타이밍까지 정말 완벽하군.’
시작부터 아웃된 소브레길드와 그라탄길드의 랭커들과 달리, 그는 아직 전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게다가 킨노스케는, 처음부터 올리비아나 쿠거와 많이 다른 입장이었다.
이번 퀘스트 전까지 명계 쪽의 퀘스트만 진행하여 사실상 기계 문명 차원계의 진척도가 전혀 없었던 다른 두 길드 랭커들과 달리, 킨노스케를 비롯한 스키노카케의 길드원들은 처음부터 찰리스 학파에 쌓아 놓은 공헌도가 제법 많았으니까.
그 때문에 퀘스트에 투입된 위치와 역할 또한, 다른 두 길드들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킨노스케가 찰리스로부터 받은 퀘스트는, 그가 이전에 진행하고 있던 퀘스트와 연계되기까지 한 것이다.
퀘스트의 진행을 기다리던 킨노스케는, 정확히 1시간쯤 전에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오호,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기계 공학의 정수를 완성하였군.
“그렇습니다, 기계 문명의 지도자시여. 이것이라면 분명, 강력한 전투 병기를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후, 훌륭하군. 그대와 같은 인재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되었어.
띠링-!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기계 공학의 정수 Ⅲ’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에픽)(연계)퀘스트가 신규로 활성화됩니다.
“……!”
-기계 공학의 정수를 완성한 자네라면, 분명 건방진 자연의 종족들을 섬멸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기계 문명의 지도자시여.”
-그대에게 전투 군단 하나를 맡길 테니, 건방진 ‘그락투스’ 녀석들을 소탕하도록 하라.
“그락투스…… 말입니까?”
-그래. 태초의 정령계부터 존재해 왔던 자연의 일족이자, 고대 거인들의 조상과도 같은 존재들.
“고대 거인들의 조상……!”
-내 임무를 완수하고 그들이 가진 고대의 힘을 손에 넣는다면, 아마 5티어의 기계 병기를 완성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야.
“그,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자네가 가진 그 기계 공학의 정수에 그락투스 일족이 가진 거인의 힘을 융합한다면, 5티어가 아니라 6티어 이상의 고대 병기가 완성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고대 거인의 힘을 찾아서(에픽)(히든)(연계)’ 퀘스트를 수령하셨습니다.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생성된 퀘스트입니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생성되지 않는 퀘스트입니다.
“크으……!”
-단, 그락투스 녀석들이 숨어 있는 위치를 찾기 위해선, 먼저 ‘대지의 눈’을 손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건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마스터?”
-지금쯤 아마, ‘숲의 대전사’라는 녀석이 가지고 있을 터. 그 또한 그락투스의 부락을 찾고 있을 테니, 먼저 그를 처단하고 대지의 손에 넣도록.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나의 전투 군단과 함께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야.
우우우웅-!
마법진이 작동하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킨노스케는, 시야 상단에서 반짝이는 퀘스트 정보 창을 기분 좋게 응시하였다.
‘숲의 대전사라…… 그놈만 잡으면 된다는 거지?’
퀘스트의 난이도가 트리플S이긴 했지만, 킨노스케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클리어에 성공하기만 하면 6티어 이상의 기계 병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찰리스로부터 받은 전투 군단의 평균 레벨이 110레벨이야. 이정도 전력이면, 아무리 어려운 퀘스트라도 해볼 만하지.’
킨노스케가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그의 눈앞에 있던 거대한 마법진에 새하얀 빛이 가득 들어찼다.
고오오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킨노스케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법진이 작동하기까지, 30초 남았습니다.
-시간 내에 마법진에 올라서야,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킨노스케를 비롯한 스키노카케 길드의 길드원들은, 망설임 없이 마법진에 올라섰다.
“기사 대전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
“어떻게든 이 퀘스트만 클리어하면, 기사 대전에서 우승한 것보다도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다.”
비장한 킨노스케의 이야기에, 길드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6티어 전투 병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으니, 킨노스케의 이야기에 공감한 것이다.
쿠구궁-!
-소환마법진이 작동을 시작합니다.
-잠시 후, ‘비자르 협곡’으로 이동됩니다.
이어서 킨노스케를 비롯한 길드원들의 시야가, 순식간에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아예 다른 차원계로 이동하는 최상급 텔레포트 마법이어서 그런지, 더욱 요란하고 웅장한 이펙트가 시야 가득히 퍼져 나간 것이다.
“흐으읍……!”
그리고 잠시 후, 킨노스케의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절곡.
띠링-!
-‘비자르 협곡’에 도착하셨습니다.
-‘고대 거인의 힘을 찾아서(에픽)(히든)(연계)’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킨노스케는, 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시야부터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숲의 대전사’라는 녀석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지형부터 파악해야 할 테니 말이었다.
“지형이 생각보다 복잡한데……? 숨어 있으면 찾기 힘들겠어.”
하지만 잠시 후, 킨노스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위치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었다.
“뭐야, 여기도 왜 이렇게 쪼랩이 끼어 있어?”
정수리 위쪽.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또렷이 들려오는, 이죽거리는 목소리.
“……!”
킨노스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그와 동시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찾던 ‘숲의 대전사’라는 녀석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으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