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이밍 마스터-877화 (881/1,027)

< 877화 3. 대지의 힘을 찾아서 (3) >

* *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특히 자신과의 연관성이 적은 대상일수록, 그에 대한 기억은 더 빨리 희석된다.

카일란 글로벌 팬들의 머릿속에서, 이안의 존재감이 점점 희석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였다.

어떤 공식적인 랭킹 콘텐츠에 이안이 등장하지 않은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물론 한국 서버의 팬들이나, 해외 서버에서도 이안의 팬 카페에까지 가입되어 있는 ‘진성’팬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안이 어서 기사 대전에 출전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게임 내에서 이안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이들의 이야기 또한 아니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안을 경험해 보았다면, 그것은 잊을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 아닐 확률이 높았으니 말이다.

다만 막연히 이안을 ‘소환술사 랭킹 1위’ 정도로 기억하는 대다수의 팬들.

그들의 머릿속에 이안의 존재감은, 어느덧 희석되어 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근데 말이야, 로터스에선 대체 왜 이안을 엔트리에 넣지 않는 걸까?

-이안이 최근 폼이 많이 떨어진 거 아닐까?

-맞아. 사실 소환술사가 PVP 한정으론 최약체나 다름없는 클래스잖아. 예전에야 그냥 피지컬로 압도했을지 몰라도, 폼이 조금만 떨어지면 다른 랭커들보다 나을 게 없을걸?

-에이, 설마.

-이분들, 이안을 잘 모르시네. 신의 말판에서 카이를 상대로도 이긴 게 이안인데…….

-신의 말판이야 피지컬보단 뇌지컬 싸움이잖아요. 그리고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아니, 이안 진짜 소환술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너무 고평가 되어 있는 거 아님?

-고평가는 무슨. 아마 리그전에 이안이 작정하고 출전하면, 선발로 나와서 혼자 다 쓸어 담고 퇴장할 텐데.

-저거 분명 한국 놈이다.

-기사 대전 너무 노잼 될까 봐, 우리 이안갓이 자체적으로 밸런스 조절해 주는 건데. 그걸 아직도 모르겠음?

-이안 훌리들 또 설치기 시작하네.

시간이 제법 지난 탓에, 개인의 경험에 따라 이렇게 극명하게 갈리기도 하는 이안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로터스 길드원들보다도 더 뼈저리게 이안을 경험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크루나 길드의 마스터, 이라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이랑 싸우느니, 차라리 카이 류첸이랑 2 : 1을 뜨고 말지.’

이라한은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가만히 있어도 입가에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

“흐흐.”

그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완벽한 방법으로,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었다.

심지어 그냥 살아난 것도 아니었다.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렇게 와 닿는 상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옥과 천당을 오갔으니까.

“아마 지금쯤, 킨노스케랑 올리비아도 신나서 마탑으로 향했겠지?”

이라한이 말하는 ‘킨노스케’는, 스키노카케 길드의 길드마스터이자 일본 서버의 랭킹 1위 암살자였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소브레 길드의 기사단장이자 스페인 서버의 마법사 랭킹 1위 유저.

그들의 공통점은 기사 대전에서 다크루나길드와 같은 조에 속해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같은 조에 속한 길드에서, 최고의 에이스인 것이다.

‘크! 장하다, 이라한!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돼, 머리를!’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면서, 더 없이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라한.

의자에 등을 푹 파묻고 반쯤 누운 이라한은, 거만한 표정으로 퀘스트 창을 오픈하였다.

순식간에 천당과 지옥을 경험시켜 준, 애증의 퀘스트 창을 말이다.

띠링-!

-‘호루스 특수임무기지 지원 (에픽)(히든)’ 퀘스트를 오픈합니다.

-수비대 소집 시간까지 남은 시간 (00 : 01 : 34)

-제한 시간 내에 마탑의 ‘워프 게이트’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퀘스트의 보상이 감소하게 됩니다.

……후략……

퀘스트 창을 오픈한 이라한의 시선은, 내용을 스윽 훑고 내려가 정보 창의 최하단에 고정되었다.

이라한이 확인한 것은 퀘스트의 보상 목록.

보상 목록은 처음 이라한이 퀘스트를 받았을 때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이라한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크, 기본 보상 말고는 거의 남은 게 없네, 이제.”

여러 랭커들에게 퀘스트를 공유했기 때문에, 보상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라한은 대체 왜, 줄어든 보상을 보고 흡족한 표정이 된 것일까?

“바이, 짜이찌엔. 친구들, 명복을 빌어 줄게.”

띠링-!

-정말 퀘스트를 포기하시겠습니까?

-퀘스트를 포기할 시 불이익을 얻게 됩니다.

-한 번 포기한 퀘스트는 다시 수령할 수 없으며…….

……중략……

-‘호루스 특수임무기지 지원 (에픽)(히든)’ 퀘스트를 포기합니다.

-페널티로 인해 기계 문명의 지도자 ‘찰리스’와의 친밀도가 –15만큼 하락합니다.

-페널티로 인해 찰리스 학파에서 쌓은 공헌도가 –53,500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카일란에서 퀘스트 포기로 인한 페널티는, 해당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보상에 비례한다.

즉, 퀘스트 공유로 인해 보상 자체를 줄여 버리면, 포기로 인한 페널티도 그만큼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지옥행 급행열차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라한이 생각해 낸 묘책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

만약 이라한이 그냥 탈주했더라면 찰리스와의 친밀도는 제로까지 수렴했을 것이고, 공헌도 또한 수십만 이상 깎여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희생양(?)들을 구한 덕에, 손실을 반에 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손해를 보긴 했지만, 이라한은 행복했다.

그보다 얻은 게 훨씬 더 많았으니 말이다.

‘흐흐, 그라탄도 보냈고, 킨노스케에 올리비아까지……. 거기다 각 길드 주력들도 제법 들어갔을 테니, 패자부활전은 프리 패스인가?’

득의양양한 표정이 된 이라한은, 탁자에 놓여 있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가 아는 이안이라면 저 무지몽매한 오랑캐(?)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터.

아마 패자부활전이 열리는 내일 오전쯤, 그들은 캡슐 밖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들이 퀘스트에 성공한다 해도 나쁠 건 없어. 어차피 상처뿐인 성공일 테고……. 놈들이 성공했단 얘기는 이안이 실패했단 이야기일 테니 말이지.’

고작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끙끙 앓던 사람이 맞는 것인지, 표정에 활력이 넘치는 이라한.

“아무나! 이겨라!”

그렇게 이라한의 카일란 인생에, 모처럼의 황금기가 찾아오는 듯하였다.

* * *

처음 이안의 계획은, 또다시 균열 버프를 이용하여 기계 군단을 농락하는 것이었다.

샤트라 부락 퀘스트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그락투스 일족의 부락 위치만 찾아 놓은 상태에서, 균열로 향하려 했던 것이다.

기계 문명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으니, 그들 병력을 어렵지 않게 균열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

균열에서 최대한 기계 군단의 병력을 줄여 놓은 뒤 다시 비자르로 이동하면, 퀘스트가 훨씬 수월해질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대지의 눈’의 능력이 개방되고 나자, 이안의 계획은 재구성되었다.

정확히는 ‘그 순서’가 조금 바뀐 것.

‘이거, 버프가 너무 사기잖아?’

능력이 개방된 ‘대지의 눈’의 고유 능력인 ‘대지의 통찰’.

이 버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가장 고효율의 전투가 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쿨감(재사용 대기 시간 감소) 절반에 버프, 치유 효과가 두 배 라니. 이런 사기 패시브가 어디 있어?’

만약 이안의 소환수들이 대지 속성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더라면, 대지의 눈이 개방되고 나서도 계획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균열 버프까지 더해서, 더욱 압도적으로 기계 군단을 썰어 버리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의 소환수들 중, 이 패시브 효과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빡빡이 하나뿐이었다.

물론 단일 무적 스킬인 ‘절대방어’나 피해전이 스킬인 귀룡의 가호, 거기에 광역 도발기인 귀룡의 포효까지.

빡빡이가 가진 고유 능력들만 패시브 효과를 받아도 전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이안의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자연의 부족들과 함께 싸워야겠네.’

트로웰의 힘을 보관하고 있는 부족들의 공통점은, ‘대지’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숲의 엘프인 샤트라 부족이나, 암석의 골렘들인 그락투스 부족은, 당연히 이 버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게다가 내 감이 맞다면, 아마 대지의 심장에도 분명 비슷한 버프가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안의 첫 번째 목표는, 그락투스의 부락에 최우선으로 도착하는 것이 되었다.

퀘스트 정보 창에 명시되어 있듯, 최대한 빠르게 말이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퀘스트 기획 의도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 맞겠어.’

목표를 정한 이안은 다시 빠르게 비행하기 시작하였다.

대지의 눈 덕에 심장의 위치까지 알 수 있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불용아, 가자!”

“호루스의 기계들이 계곡을 지키고 있다, 주인.”

“다 때려 부수지, 뭐.”

“……!”

“좌표 찍어 준 데 보이지?”

“보인다, 주인.”

“그대로 직진이야.”

타탓-!

불용이의 등에서 뛰어오른 이안은, 바로 아이언을 소환하여 옮겨 탑승했다.

순식간에 호루스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선 최고조로 전투력을 끌어 올려야 했고, 그러려면 불용이의 안락한 등판(?)을 포기하고라도, 아이언의 일체화 효과를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쐐애액-!

이어서 아이언에 탑승한 이안은, 쏜살같이 협곡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나머지 가신들과 소환수들이 빠르게 따라 붙었다.

* * *

소브레 길드의 기사단장 올리비아는, 유럽 서버에서 무척이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원소 마법들 중 흔치 않은 바람 속성 계열의 마도사이면서도, 유럽 쪽에서는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유럽 연합 길드이자 마족 진영에서는 최강으로 꼽히는 ‘다크 블러드’길드에서도,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수차례 러브콜을 보냈을 정도.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매력적인 러브콜을 전부 거절하였고, 그 때문에 자국 서버인 스페인 서버에서 더욱 높은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다크 블러드가 유럽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뿌리는 영국에 있는 영국 서버 길드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관능미 넘치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또한, 그녀가 가진 인기의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후훗, 역시 소브레에 남길 잘했어. 용의 꼬리가 되는 것 보단, 뱀의 머리가 여러모로 나은 것 같단 말이지. 다크블러드가 용이 될 수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고 말이야.’

하여 최근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그녀의 자신감은, 가히 하늘을 찌를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유럽 연합인 다크블러드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유럽 최강 길드의 자리에 소브레를 올려 놓을 꿈까지 꾸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 기사 대전이 중요한 건 아니야. 이번에는 가능성을 본 것으로 충분해.’

그리고 그런 올리비아에게 이라한이 흘린 떡밥은, 무척이나 달콤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라한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정말 우연히 그 퀘스트가 발견된 것처럼 연출하였고.

무려 ‘에픽’, ‘히든’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메인 에피소드의 퀘스트는, 판단력을 흐리게 할 만큼 강력한 떡밥이었으니 말이다.

‘이건 정말…… 길드의 전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에 최고의 소스야. 무조건 잡아야 해.’

하여 올리비아는, 패자부활전조차 포기한 채 득달같이 마탑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입장에서 명예뿐인 기사 대전보다는, 실리가 훨씬 중요했으니까.

이어서 마탑에 도착한 올리비아는, 곧바로 수비대장에 임명되었다.

-뛰어난 마법사로군. 그대라면 호루스의 수비 기지를 잘 지켜 낼 수 있겠어.

“감사합니다, 찰리스님!”

그리하여 찰리스의 명을 받아 기계 군단을 이끌고, 곧바로 워프를 통해 호루스 기지에 도착한 올리비아.

‘정령계라니! 이거 두근두근하는데?’

지금껏 라카토리움과 명계에서만 활동했던 그녀는, 이렇게 쉽게 새로운 차원계에 온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분되기 시작하였다.

‘자연의 종족이라고 했던가? 다 쓸어 주겠어. 마리당 공헌도가 천 단위니까, 공헌도 10만 정도는 순식간에 쌓을 수 있겠지.’

게다가 수비대에 속한 기계 괴수들을 확인한 올리비아는, 더욱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오더에 따라 움직여 줄 병력의 초월 레벨이, 전부 다 100이 넘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전투를 준비하라, 제군들. 오늘 이곳 수비 성채를, 단 한 놈도 지날 수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르륵-!

-명령을 이행하겠다, 대장.

-삐리릭-!

이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올리비아는, 의욕적인 표정으로 적들을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적이 나타나면 곧바로 발동시킬 수 있도록, 강력한 공격 마법들도 미리 캐스팅해 두었다.

우우웅-!

그렇게, 그녀가 요새에 도착한 지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드디어 그녀가 지키고 있는 계곡의 안쪽으로, 적으로 보이는 그림자들이 등장하였다.

-적, 적이다 대장!

-삐리리릭-! 드래곤이다!

“전투준비!”

이어서 미리 공격 마법을 캐스팅해 두었던 올리비아는, 선두에서 날아드는 그림자를 향해 곧바로 마법을 발동시켰다.

“썬더 스피어……!”

그녀가 가진 단일 공격 마법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9서클의 마법인 썬더 스피어.

‘좋았어!’

그리고 마법이 터지는 것을 확인한 올리비아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확신하였다.

아무리 마법의 일족인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미리 캐스팅 된 강력한 단일 마법에 적중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분 좋은 표정은, 채 3초도 지속될 수 없었다.

콰지직-치지지직-!

썬더 스피어가 정면으로 적중됨과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숲의 대전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숲의 대전사’가 ‘무기 막기’를 발동하였습니다.

-피해량이 급격히 감소합니다.

-‘숲의 대전사’의 생명력이 953만큼 감소합니다!

‘이, 이걸 반응했다고?’

그녀의 전력에 가까운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최강의 공격마법 썬더 스피어.

그것이 만들어 낸 피해량이, 고작 세 자리 숫자에 불과했으니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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