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3화 2. 16강전 그리고 나비효과 (2) >
* * *
샤트라 일족의 부락은, 밖에서 느낀 것 보다 훨씬 더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였다.
그 때문에 작은 야영지 같은 느낌을 상상하고 들어왔던 이안으로서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프뉴마 마을이랑 비슷한 규모인데?’
마치 유목민처럼, 자연의 힘을 따라 매번 터전을 옮긴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견고하고 완성도 높게 만들어진 샤트라 일족의 터전.
작은 잡화 상점부터 시작해서, 대장간, 용병 길드 등등.
어지간한 마을에 있어야 할 콘텐츠들은 전부 다 있어 보였던 것이다.
‘샤트라 부족의 공헌도가 어디에 쓰는 건가 했더니…….’
부락 내부를 걷던 이안은, 더욱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균열 전투에서 기계 군단을 몰아내고 얻었던 17만의 공헌도를, 여기서 쓸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마치 공짜로 얻은 상품권을 들고, 백화점에 들어온 기분이었던 것.
여하튼 그렇게 엘프들의 안내를 받아 부락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이안은, 곧 지도자 ‘솔루미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30~40분 전부터 이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정령왕의 사자여.”
“당신이 솔루미엘…….”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샤트라 일족의 지도자, 솔루미엘이지요.”
묘한 표정으로 이안을 향해 인사한 솔루미엘은, 이안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자연의 부족이 아니었군요?”
솔루미엘의 물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이안.
“전 걍 사람인데요……?”
하지만 이안이 당황하든 말든 솔루미엘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무리 중간자라고는 하나, 인간의 몸으로 이런 거대한 자연의 힘을 품을 수 있다니!”
“……?”
“대자연의 신께서 당신께 ‘숲의 대전사’ 칭호를 내리신 이유가 있었군요.”
“예?”
“확실히 당신이라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솔루미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안의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
띠링-!
-샤트라 부족의 지도자, ‘솔루미엘’과 조우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샤트라 일족의 부락을 찾아서 (에픽)(연계)’ 퀘스트의 연계 퀘스트 진행을 위해, 스토리 모드로 전환됩니다.
-유저의 캐릭터 통제가 잠시 제한됩니다.
……후략……
이어서 이안의 시야가, 점점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 * *
정령산의 남쪽에는 ‘정령의 성소’가 있다.
그리고 그 성소의 서쪽에 있는 정령의 마을이 바로, 현재 수많은 정령계 뉴비들의 거점이 된 프뉴마 마을이다.
그리고 이안의 시야에 나타난 풍경은, 그 프뉴마 마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작은 정령들이 폴폴거리며 날아다니고, 따뜻한 녹음(綠陰)이 내려앉아 있는, 평화로운 마을.
하지만 관찰력이 뛰어난 이안은, 이곳이 그가 아는 프뉴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반적인 분위기야 빼다 박은 듯 비슷하였으나, 결정적인 한 가지가 달랐으니 말이다.
‘정령탑의 속성이 화염이잖아? 프뉴마 제단의 속성이 바뀌었을 리는 없는데…….’
프뉴마 마을의 공터에는, ‘정령탑’이라 불리는 제단이 솟아 있다.
그리고 이 제단의 속성은, ‘바람’속성.
하여 프뉴마 정령탑의 꼭대기에는 바람 속성을 상징하는 심볼이 탑의 꼭대기에 걸려 있었는데, 지금 이안의 눈앞에 나타난 제단에는 화염의 상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여긴 대체 어디 있는 마을이지?’
그 때문에 이안의 두 눈은 더욱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마을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임이 분명했고, 어떤 방향이든 새로운 콘텐츠의 발견은 이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눈을 반짝이는 동안, 마을 전체를 보여 주던 시야가 점점 더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이어서 잠시 후, 이안의 눈 앞에는 웬 낯선 외모의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확히는 ‘남자’라는 수식어보다는, ‘남성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둘.
‘누구지? 평범한 유저나 NPC는 당연히 아닐 테고…….’
호기심 어린 표정이 된 이안은, 특이한 차림새를 한 두 남자를 꼼꼼히 살피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듯 한, 묵직한 중갑을 두른 거구의 남자.
그리고 타는 듯이 붉은 화염의 갑주에 시뻘건 뿔. 그리고 불타는 언월도를 등에 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이안의 그 호기심은, 두 남자의 대화가 시작된 순간 바로 풀릴 수 있었다.
그들은 이안이 오늘 처음 봤을지언정, 이미 알고 있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트로웰,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인가, 라그나로스?
-엘리샤가 차원의 균열을 넘어, 라카토리움으로 갔다는 사실 말이오.
-크흠, 그 이야기는 어디서…….
-에실론에게 들었소이다.
-에실론, 이 바보같은 녀석이……!
‘트로웰과 라그나로스……! 정령왕들의 이름이잖아?’
이안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정령계의 과거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퀘스트 진행을 통해 제법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히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라그나로스와 에실론이 살아있을 때인가 보네. 잘하면 둘이 왜 죽었는지도 알 수 있겠군.’
이안은 둘의 대화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듯, 더욱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정보를 알아내야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엘리샤의 행방이야. 이 스토리를 잘 쫓다 보면, 지금 엘리샤가 있을 곳도 추측할 수 있겠지.’
사실 이미 소멸한 불의 정령왕 라그나로스와 바람의 정령왕 에실론은, 이안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성운을 밟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만나야만 하는 엘리샤.
이안에겐 그녀에 관한 정보가 가장 중요할 뿐이었다.
-나도 가야겠소.
-안 된다는 걸 잘 알 텐데, 라그나로스.
-이대로 그녀를 희생시킬 수는 없어.
-그렇다 하여 너까지 희생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차라리 끝까지 함께하겠소.
-미련한……!
-엘리샤를 막지 못한, 트로웰 그대의 잘못이오.
-…….
이야기를 듣던 이안은, 문득 궁금한 점들이 생겼다.
‘상황을 보니, 정령왕들 중 엘리샤가 홀로 라카토리움에 간 것 같은데……. 대체 혼자 뭘 하러 갔던 걸까?’
라카토리움은 정령왕의 입장에서 적진의 한복판과 같은 곳.
그런 곳에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직접 발을 들여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그나로스와 에실론은, 그녀를 구하려다 소멸된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금증들.
그러한 궁금증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이안은 더욱 집중에서 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모든 것을 떠나, 영상 자체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재밌기도 했고 말이다.
-반드시 엘리샤와 함께 돌아오겠소. 그때까지 정령계를 부탁하오 트로웰.
-하아, 결국 나는 두 번의 실수를 하게 되는구나.
-……미안하오. 하지만 이 또한 예견하셨던 일이 아니오.
쓴웃음을 지어 보인 라그나로스는, 등에 메고 있던 언월도를 들어 허공에 주욱 내리 그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공간이 찢어지며, 시커먼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나와 에실론의 힘으론, 버텨 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야.
-알고 있소.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
-노력하겠소.
우우웅-!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한 라그나로스가, 까만 균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의 그림자는 오간 데 없이 사라졌으며, 그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불꽃들이 가볍게 튀어오를 뿐이었다.
-하아, 기왕 이렇게 된 것…… 조화의 결정을 어떻게든 찾아와야 할 텐데…….
라그나로스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트로웰.
이어서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안의 시야가 다시 하얗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에피소드와 관련된 다른 시점의 영상이, 연달아 이어진 것이다.
‘……!’
그리고 이안의 눈앞에 펼쳐진 영상들은, 한두 가지로 끝나지 않았다.
균열을 지나 라카토리움으로 넘어간 라그나로스 시점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기계 문명과 혈전을 벌이는 트로웰과 에실론의 이야기까지.
하지만 그 모든 스토리들 중 이안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준 것은, 역시 엘리샤의 스토리였다.
이안은 영상을 통해, 드디어 엘리샤의 행방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후후, 기어코 여기까지 왔군, 정령왕이여.
-간악한 놈. 내가 직접 올 줄은 생각지 못하였겠지.
-간악하다니. 나는 정당한 거래를 했을 뿐.
-더러운 탐욕 때문에 차원의 조화와 균형을 무너뜨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엘리샤가 찾아간 곳은 이안도 잘 알고 있는 곳인, 라카토리움의 대도시 루탄.
그 안 어딘가의 찰리스 학파의 거점, 기계로 만들어진 거대한 탑이었다.
그리고 그 탑의 꼭대기에 고고하게 떠 있는 거대한 푸른빛의 수정.
그것을 발견한 이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게 조화의 결정…… 이라는 물건인가?’
조화의 결정 앞에 선 엘리샤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계 괴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레벨 정보는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보아도 최상위 티어의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기계 로봇들.
푸른 물빛을 휘감은 정령왕 엘리샤는, 그 가운데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은 고고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온 용기는 가상하나, 네년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정령계는 멸망할 것이다.
-그릇된 선택이라…… 과연 그럴까?
-설마 혼자의 힘으로 우리 전부를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글쎄.
-여기는 정령계가 아니다, 엘리샤. 곧 그 오만함을 후회하게 될 것이야.
-웃기는군.
콰아아아-!
조화의 결정 앞에 선 엘리샤는, 허공을 향해 하얗고 고운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납고 거대한 물의 기운이, 전장에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콰아아-콰아아오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지금껏 이안이 보아 왔던, 그 어떤 정령 마법보다도 화려하고 강력했으니 말이었다.
이안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말이다.
쿠구궁-!
콰앙-! 퍼퍼펑-!
하지만 엘리샤의 어마어마한 위용에도 불구하고, 기계 문명의 괴수들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물론 많은 희생이 있긴 하였으나, 결국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끝이다 엘리샤.
-허억- 허억-.
-내 손으로 직접 소멸시켜 주마.
-할 수 있다면…… 한번 해 보든가.
-허세는……!
찰리스가 타고 있는 거대한 기계 괴수가, 엘리샤를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쐐애액-!
그리고 이미 힘이 다 빠진 듯 보이는 엘리샤는, 누가 보아도 그 공격을 막지 못하고 소멸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콰앙-!
-……?
찰리스는 당황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공격이 떨어져 내린 자리에, 엘리샤가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찰리스는 더욱 경악하였다.
-이런, 미친……!
허공으로 흩어진 엘리샤의 기운이, ‘조화의 결정’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아, 안 돼……!
이어서 엘리샤의 힘을 흡수한 탓인지, 사방으로 폭풍 같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조화의 결정.
콰콰콰콰-!
차가운 한기를 담은 강력한 기운에, 기계 괴수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쩌정- 쩌저정-!
이어서 조화의 결정 주변으로, 두꺼운 빙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이것이 목표였나, 엘리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찰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신음하였다.
애초에 엘리샤의 목표가 조화의 결정을 회수하는 것이 아닌, 봉인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엘리샤. 어차피 조화의 힘이 없다 하여도, 정령왕의 힘이 무너진 정령계 정도는 수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지.
기이잉- 철컹-!
찰리스의 낮은 목소리를 끝으로, 이안의 시야는 다시 하얗게 변하였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영상은, 엘리샤를 구하기 위해 떠난 라그나로스의 소멸.
-크윽, 엘리샤…… 나의 부족함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모든 영상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천천히 뜨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