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1화 1. 균열의 수문장 (2) >
이안의 판단은 옳았다.
균열에서의 전투가 치열해지고 이안이 더 많은 기계 괴수들을 파괴할수록, 퀘스트에 명시된 시간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도로교통상황의 변화 때문에 계속해서 늘어나는, 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시간처럼 말이다.
*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
-02 : 01 : 15
-02 : 45 : 27
-03 : 53 : 09
……후략……
하여 마지막 변수까지 깔끔하게 제어되는 것을 확인한 이안은, 더욱 적극적으로 날뛸 수 있었다.
여기 이 균열 안에 있는 녀석들만 마크하면 부락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거리낄 것이 전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전장이 치열해지기 시작하자, 상황은 더욱 술술 풀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기계 괴수들과의 전투 난이도부터가 생각보다 더 수월했으니 말이다.
‘차원마력 추댐이 생각보다 더 많이 박히잖아?’
좁은 통로를 이용하면 충분히 상대할 만 할 것이라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박살을 낼 수 있을 줄은 이안도 몰랐던 것.
그렇다면 이안은 어떻게 초월 100레벨대의 기계 괴수들을 이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계 괴수들이 차원마력 디버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차원마력 디버프에 영향받지 않는 기계 괴수들은 당연히 차원마력 저항력이라는 스텟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이안의 검에서 펑펑 터지는 차원마력 대미지를, 저항할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방어력을 무시하는 데다 아무런 대미지 감소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 말 그대로 ‘폭딜’이 펑펑 터지는 것.
물론 상위 기계공학으로 넘어가면 저항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공격대에 포함된 기계 병사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거 참 흥미로운 시스템이란 말이지. 어설프게라도 저항력을 갖춘 마족들한테 오히려 대미지가 덜 박히니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안을 기쁘게 하는 것은, 녀석들이 드롭하는 경험치와 전리품들 또한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 막대한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먼저 경험치부터 살펴보면…….
띠링-!
-‘기계파수병’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계파수병’의 내구도가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기계파수병’을 파괴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92레벨이 되었습니다!
……중략……
-‘기계중대장’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계중대장’을 파괴하였습니다.
-대규모 전장에서 막대한 공헌을 하여, 추가적인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93레벨이 되었습니다!
……후략……
균열에 들어오기 전 91레벨이었던 이안의 레벨이, 무려 두 단계나 오른 93레벨에 이른 것이다.
‘초월 90레벨 대에서 폭업이라는 게 가능할 줄이야.’
물론 91레벨이었던 이안의 경험치는, 처음부터 90% 가까이 차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번의 전투로 레벨이 두 단계나 올랐다는 것은, 이안조차도 상상치 못했던 수준의 쾌거.
에픽 퀘스트라는 특수한 상황이 경험치를 증폭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레벨 업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기계 괴수들이 드롭하는 전리품들은, 이안을 더욱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금씩 드롭하는 차원코인들도 쌓이기 시작하자 무시 못 할 액수가 되었으며…….
-‘15차원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27차원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19차원코인’을…….
가끔 드롭되는 잡화 아이템은, 이안조차 놀랐을 정도로 가치 있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기계파수병’을 파괴하였습니다!
-‘마력이 담긴 기계파편’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기계중대장’을 파괴하였습니다.
-‘마력이 담긴 동력 장치’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마력이 담긴 동력 장치
분류–잡화
등급–???(초월)
강력한 마력이 담긴 동력 장치입니다.
기술력 있는 기계공학자가 재가공한다면, 담겨 있는 마력을 추출하여 마력원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카토리움의 대도시에 있는 ‘리사이클 센터’에서, 일정량의 차원코인을 지불하여 재가공할 수 있습니다.
*재가공에 성공할 시, 3~5티어의 마력원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1~2티어의 마력원으로 재가공이 가능한 ‘기계파편’과, 2~3티어의 마력원으로 재가공이 가능한 ‘기계뭉치’.
마지막으로 가장 희귀하지만 무려 ‘5티어 마력원’이라는 포텐을 가지고 있는 동력 장치까지.
‘최하 티어의 마력원만 해도 경매장에서 500코인씩 하던데……. 5티어라도 하나 건지면 최소 1만 코인 이상 줍는 거라도 봐도 되겠는데?’
마력원은 기계 설비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었고, 때문에 마력원으로 재가공 가능한 잡화 아이템들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안에게는 제법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기계공학자 인맥(?)도 하나 있었으니.
마력원을 추출하는 데에 필요한 수수료까지도, 상당 부분 아낄 수 있을 터였다.
‘켄토에게 의뢰하면 싸게 해 주겠지. 의뢰비를 마력원 한두 개로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안이 처음 라카토리움의 땅을 밟았을 당시 우연히 알게 된 기계공학자인 켄토.
덕분에 이안은 심판검으로 기계 괴수들을 두들겨 패는 와중에도 히죽히죽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고.
그런 이안의 모습은, 기계 괴수들의 ai마저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르륵! 미, 미친 인간이다!
-삐릿-!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도망쳐!
기계 괴수들이 회군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후방으로 따라붙으며 최대한 녀석들을 괴롭혔다.
막대한 경험치와 차원코인을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배고팠으니 말이었다.
“카이자르, 헬라임! 좌측으로 붙어서 놈들을 추격해!”
“알겠다, 주인.”
“그리하겠나이다, 폐하!”
“루랑 엘은 우측을 맡아 주고.”
“알겠어요, 아빠!”
“그러도록 하지.”
다섯 갈래의 통로에서 일제히 튀어나온 이안의 소환수들과 가신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끝까지 기계 군단을 추격하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녀석들의 진영 가운데 포위되지 않도록,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미 기계 군단이 전의를 상실하긴 하였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숫자에 포위되면 순식간에 당할 수 있었으니까.
“피올란 님, 도주 경로에 슬로우 좀 빡빡하게 묻혀 줘요!”
“옙!”
“쥬르칸, 너는 광역 도발 쓰면서 지속적으로 어그로 좀 끌어 주고.”
“오케!”
그리고 그렇게,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쿠르릉-!
길게 이어진 균열의 통로가 어느새 끝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끝은, 라카토리움 방면으로 이어진 반대편 끝자락이었고 말이다.
일렁이는 통로의 끝에서, 새하얗게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줄기.
그것을 발견한 이안은, 아쉬운 표정이 되어 입맛을 다셨다.
‘젠장, 절반도 넘게 놓쳤네.’
기계 병사들과 괴수들에게 차원코인을 맡겨 두기라도 한 것인지, 악착같이 검을 휘두르는 이안.
콰콰쾅-!
하지만 아무리 기세등등한 이안이라 하여도 균열 바깥까지 기계 군단을 쫓아가는 것은 자살행위였기에.
추격은 곧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그극……! 찰리스 님께서 네놈을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퍼어엉!
이어서 균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괴수가 처치된 순간.
띠링-!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수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샤트라 일족의 부락을 찾아서 (에픽)(연계)’ 퀘스트의 내용이 변경됩니다.
-다음 연계 퀘스트 한 개 항목이 삭제됩니다.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퀘스트의 보상 내역이 상향됩니다.
-한계를 초월한 공헌도를 달성하셨습니다!
-모든 ‘엘프’부족과의 친밀도가 20만큼 상승합니다.
-‘샤트라’부족의 부족 공헌도를 172,546만큼 획득하였습니다.
-‘샤트라 일족의 부락’에 도착하면,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후략……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의 양쪽 입꼬리는, 귀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저의 변칙 공략으로 인해 퀘스트가 수정될 시, 보상이 배 이상으로 강화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 * *
샤트라 부족의 지도자이자, ‘태고의 하이엘프’라는 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솔루미엘.
수식어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그녀는 이미 수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엘프였다.
하지만 솔루미엘은 그러한 세월이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그녀에겐 수명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샤트라의 세계수를 지탱하는 자연의 힘이 건재한 이상, 그녀는 늙지 않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죽어서는 안 되는 몸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무너지면 샤트라의 일족이 무너지고, 샤트라는 비터스텔라의 기둥과도 같은 자연의 일족이었으니까.
-이 성스러운 정령산에서 모든 기계들을 몰아내고, 중간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여 신의 은총에 보답하리라…….
그리하여 솔루미엘과 숲의 하이엘프들은, 오랜 시간 비터스텔라의 구석에서 힘을 키워 오고 있었다.
기계 문명에 패퇴하였던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소중한 자연의 힘을 지켜 내기 위해서 말이다.
한데, 그러던 어느 날.
100년도 넘게 잠들어 있던 숲의 제단에, 오랜만에 신탁이 내려왔다.
[기계 문명의 야욕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였노라. 정령왕의 사자와 함께, 그들의 탐욕을 저지하도록 하라.]
신탁은 무척이나 간결하였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지혜로운 솔루미엘은 신탁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놈들이 트로웰님의 힘을 노리는 것이로군.’
현재 비터스텔라에 남아 있는 정령왕은 트로웰 하나뿐이었으니 정령왕의 사자라 함은 트로웰의 사자일 것이었고.
그와 함께하라는 이야기만으로도, 신탁의 의미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내었으니, 이번에는 놈들에게 쓴맛을 보여 줄 차례로다.”
하여 솔루미엘은, 숲의 전사들을 모아 강력한 군대를 구성하였다.
정령왕의 사자가 도착하는 즉시, 트로웰의 뜻에 따라 기계 문명과 맞서기 위해서 말이다.
부락의 방비를 단단히 하고, 적들을 맞을 준비를 마친 솔루미엘과 숲의 엘프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생각지도 못했던 신탁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신탁은, 수백 년이 넘게 살아온 솔루미엘조차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기계 군단의 선봉을 무너뜨린 그대들을 치하하노라. 하나 그들의 야욕은 이제 시작일 뿐. 그들이 더 강력한 군대를 끌고 오기 전에, 사자(使者)를 도와 트로웰을 깨우도록 하라.
“……?”
혹시 제단이 고장이라도 난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솔루미엘.
하지만 그녀의 당황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숲의 제단에서 연달아 추가적인 신탁이 내려왔으니 말이었다.
-전장의 영웅이자 정령왕의 사자인 ‘이안’에게, ‘숲의 대전사’ 직위를 부여하노라.
-또한 그에게 ‘대자연의 목걸이’를 하사하여, 더 뛰어난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노라.
……후략……
신탁이 내려옴과 동시에, 제단 위로 떨어져 내리는 새하얀 빛의 줄기들.
그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숲의 보물들이 소환되고 있었으니, 솔루미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인 것이다.
우우웅-!
하지만 제단 위에 나타난 신기(神器)들을 확인한 그녀는, 적어도 제단이 고장 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고장난 제단 위로 이렇게 강력한 아티펙트들이 나타날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
하여 신탁이 끝날 때 까지 굳어서, 멍한 표정으로 제단을 응시하던 솔루미엘.
그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육성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대체…… 이안이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