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8화 8. 대격변의 시작 (1) >
-플로아스와 옵스큐르, 기대 이하의 성적에 팬들은 실망했다?
-10 : 1, 그리고 10 : 2. 압도적인 스코어를 보여 준 로터스와 칼데라스는 16강전에서도 그 기세를 이어 갈 수 있을 것인가.
-로터스와 칼데라스, 그리고 천웅 길드의 독주.
-16강, 그리고 점점 그 윤곽이 드러나는 8강 라인업.
……후략……
옵스큐르 길드는, 프랑스 서버의 랭킹 1위 길드이다.
그냥 1위도 아니고 다른 길드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압도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마치 한국 서버의 로터스 같은 존재인 것.
때문에 많은 프랑스의 카일란 팬들은 이번 기사대전을 무척이나 기대하였다.
비록 프랑스가 후발 서버 중 하나이지만, 그래도 옵스큐르 길드만큼은 세계무대에서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기대는 처참히 뭉개져 버렸다.
리그전도, 16강도 아닌 32강에서, 가장 처참한 성적으로 떨어진 길드 중 한 곳이 바로 옵스큐르였으니 말이다.
-칼데라스 vs 옵스큐르 – 10 : 2
-옵스큐르 길드, 32강 탈락.
옵스큐르는 32강 대전에서 무려 10 : 2라는 스코어로 처참하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쉽게 말해 엔트리 열 명이 전부 출전하여 상대 팀의 단 두 명밖에 잡아내지 못한 것이다.
옵스큐르의 수많은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결과.
때문에 프랑스 서버의 카일란 공식 커뮤니티는, 하루 종일 초상집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것은 상대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한 곳인 칼데라스였다는 사실 정도.
-하, 10 : 2라니. 아무리 상대가 칼데라스였다고 해도 이건 너무…….
-그래도 옵스보다 더 처참하게 깨진 플로아스도 있잖음. 그거 보면서 위안 삼지 뭐.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심? 10 : 2나 10 : 1이나. 대체 뭐가 다른 거임?
미국 서버의 전체 랭킹 1위이자, 대전사 카이가 기사단장으로 있는 길드인 칼데라스.
로터스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팀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칼데라스였기에, 그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이다.
-근데 칼데라스가 진짜 강하긴 강하더라. 선두로 나와서 여섯 잡고 들어간 전사 클래스가 아마 카이 아니었을까?
-글쎄, 그건 아닐 듯. 냉정하게 카이가 처음에 나왔으면, 10 : 0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헐, 님 프랑스 유저 아니죠?
커뮤니티의 민심(?)을 쭉 훑어보던 ‘루 카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접어 내렸다.
딸깍.
옵스큐르의 기사단장이자, 프랑스 서버의 마족 랭킹 1위.
이번 기사대전에서 홀로 2승을 따낸 옵스큐르의 에이스 루 카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한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 그나마 칼데라스에 져서 망정이지. 이름 없는 동남아 길드 같은 곳에 졌으면 커뮤니티 완전 폭발했겠어.”
카셀은 옵스큐르 길드를 프랑스 1위 길드로 만들어 놓은, 옵스큐르의 최고 에이스 유저였다.
그리고 본인이 키워 낸 길드나 다름없는 만큼 옵스큐르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카셀은 별로 우울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기사대전에서의 광탈까지도 별로 아쉽다고 생각지 않는 듯하였다.
아니, 오히려 이 최악의 결과가 무척이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뭐, 우리로선 최선의 결과였어. 대진표를 짠 담당자한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칼데라스라는 최강의 적을 첫 경기에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대진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카셀.
프랑스 팬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가 판단하기로 기사대전에 참전한 길드들 중에서 옵스큐르가 이길 수 있는 상대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렇다면 그냥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적을 만나서 깔끔하게 져버리는 것이 오히려 잘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16강에 오르지 못할 바에야 가장 강한 적에게 명예로운(?) 패배를 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라고 판단한 것.
물론 팬들이야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카셀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패자부활전에서 발리토어나 아타르 정도 만나면 완벽하겠네. 부활이야 못 하겠지만, 1승이라도 챙기면 좀 더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카셀이 기사대전에서의 광탈을 환영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이 기사대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퀘스트가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16강에 올라갔다면 오늘이 대전일이었겠지. 그럼 이 꿀 같은 퀘스트를 진행하지 못했을 테고 말이야.’
띠링-!
-홍채 인식 완료. ‘루 카셀’님 카일란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카일란에 접속한 카셀은, 히죽 웃으며 퀘스트 창을 오픈해 보았다.
그리고 퀘스트 창의 가장 상단에는 두 줄의 간결한 문구가 황금빛 글씨로 반짝이고 있었다.
-‘정령계 침공 지원(에픽)(히든)’ 퀘스트
-퀘스트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 – 00:37:12
“크, 시간 맞춰 들어왔군.”
기사대전에서 완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설레게 만들어 주는 히든 에픽 퀘스트.
실용주의자인 카셀에겐. 승리해 봐야 명예 말고는 남는 게 없는 기사대전보다, 버스 탑승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평균 초월 100레벨대 NPC 버스를 탈 수 있게 되다니. 안전벨트만 잘 매면, 못해도 2~3레벨은 순식간에 올릴 수 있겠어.’
지금 그의 눈앞에 떠 있는 ‘정령계 침공 지원’ 퀘스트는 정말 운 좋게 받게 된 퀘스트였다.
라카토리움에서 얻은 히든 퀘스트들이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면서, 본래의 퀘스트 진행도에서는 받을 수 없었던 상위 티어의 퀘스트에 한 발 걸치게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초월 레벨 80 초반인 카셀의 입장에서 100레벨대의 대규모 전투는 그야말로 경험치 노다지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로 낙오하지 않는다. 안전벨트 단디 메야지.’
하지만 이때만 해도 카셀은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었다 하더라도, 사고가 너무 크게 나면 벨트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 * *
띠링-!
-‘북부 균열’ 지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차원의 균열로 인해 생성된 거대한 차원 마력이 온몸을 엄습합니다.
-차원 마력에 대한 적응 능력이 한계 이상을 달성하여, ‘마력 충전’ 효과가 발동됩니다.
-차원 마력의 힘을 받아들여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마력 충전
-모든 움직임 가속 +25퍼센트 (+10퍼센트)
-모든 종류의 마력 회복 속도 +50퍼센트 (+20퍼센트)
-일반 공격 시 25퍼센트(+25퍼센트)의 확률로 공격력의 100퍼센트만큼의 차원 마력 피해를 추가로 입힙니다.
-차원 마력 공격은 대상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후략……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들이 이안의 눈앞에 주르륵 하고 펼쳐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 줄 한 줄 음미(?)하는 이안의 표정은, 무척이나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으흐흐. 그래, 이거지. 바로 이거야.’
물론 이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 되었지만 말이다.
“아니, 이안 님, 설마 이 안에서 싸우시려는 건 아니죠?”
“이안아, 기계들은 차원 마력 디버프 안 받는 거……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이제 균열이라는 콘텐츠는 상위 랭커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이 균열 안의 차원 마력 디버프가 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제법 알려진 것이다.
특히 용천과 엘라시움을 잇는 균열의 경우 로터스의 주력 길드 사냥터 중 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안의 파티 세 사람은 균열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던 것.
다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균열의 디버프가 강력한 버프로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님들, 설마 여기서 아직도 디버프 받음?”
“……?”
“길드 파티로 그렇게 사냥을 했는데, 아직도 저항력 풀 스텍 못 채운 거야?”
오히려 반문하는 이안을 보며 이번에는 카노엘이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저항력 많이 올려 두긴 했는데, 그래도 디버프 아직 조금은 남았어, 형.”
피올란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우리가 전부 이안 님 같은 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하다고요.”
두 사람에 비해 균열 경험이 더 적은 쥬르칸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 디버프를 저항력으로 줄일 수도 있는 거였어? 이안이 너는 그럼 아예 디버프 영향 안 받는 거야?”
세 사람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닫았다.
어차피 그들의 역할은 서포팅이었기 때문에 굳이 이 이상 설명해 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시간도 없었다.
‘어디 보자,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 볼까?’
천천히 균열 안으로 걸어 들어간 이안은 먼저 퀘스트 창에 명시된 잔여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
-00:28:52
‘균열에서 부락까지가 약 10분 거리니까, 대충 15~20분 안에 여기에 나타나겠네.’
거리와 이동 시간까지 역산해 보며, 전투가 벌어질 타이밍을 예측하는 이안.
‘다수를 상대하기 가장 좋은 지형은 아무래도 거기겠지.’
머릿속으로 모든 시뮬레이팅을 마친 이안은 거침없이 균열 안쪽으로 진입하였다.
이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통로가 총 다섯 갈래의 길로 나뉘는 좁은 지역.
전투를 준비하는 이안의 입가에 히죽히죽 웃음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 * *
“제3분대는 이쪽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균열을 빠져나간다!”
기깅- 기기깅-!
어두운 동굴 안에서, 듣기 거북한 기계음들이 연신 울려 퍼진다.
그르르륵!
일반적인 성인 남성만 한 크기의 인간형 기계부터 시작해서, 골렘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거대한 크기의 위압적인 기계 괴수까지.
쿵- 쿵-.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계 괴수들이 어두운 균열을 뚫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들의 한복판에서 커다란 기계 골렘의 어깨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좋아. 좌표는 찍혔고, 저 위치에 있을 엘프 부락 하나만 수복하면 된다는 거지?”
남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류첸.
류첸은 천웅 길드의 길드 마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열릴 16강전에 참전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없어도 16강까지는 문제없다는 계산이 기저에 깔려 있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중간계의 메인 시나리오와 연결되는 이 퀘스트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심지어 류첸은 이 대규모 공격대의 지휘관 중 하나로 임명되기까지 하였으니, 퀘스트 보상은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크, 엘프 부락인지 뭔지 싹 쓸어버리고, 그 자리에 길드거점이라도 세우면 최고의 시나리오인데 말이지.’
그리고 이 대규모 전장의 중심에서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 이는 류첸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류첸은 이 공격대에서 자신이 유일한 유저인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 전장 구석에 다른 마족 유저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전장을 주도하는 류첸과 달리, 버스 승객(?)일 뿐인 카셀.
그는 구석에서 류첸의 존재도 확인하였고, 때문에 더욱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흐흐, 버스기사가 류첸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하이패스겠는데?’
류첸은 흑마법사 클래스 중 사실상 전 세계 1위로 꼽히는 유저였다.
때문에 그가 메인이 되어 진행하는 퀘스트라면, 성공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류첸이 통솔하는 군대라면, 엘프 부락 정도는 순식간에 삼켜 버리겠지?’
물론 아무리 류첸이라 하더라도 초월 100레벨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투력만 놓고 본다면 평균 레벨 100이 넘는 이 군대의 전투력에서 류첸의 지분은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류첸의 포지션이 지휘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레벨과 별개로 그의 통솔력과 게임 센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고, 그런 그가 이 강력한 군대를 움직인다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 줄 수 있을 테니까.
‘좋아, 가즈아!’
꿈과 희망이 가득한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카셀!
그런데 잠시 후.
전방을 주시하던 카셀의 두 동공이 조금씩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뭐, 뭐지?”
그가 속한 분대가 이동하던 좁은 길목의 끝에 웬 커다란 드래곤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