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7화 7. 트로웰의 부탁 (3) >
* * *
이안의 예상대로 엘프인 아렌은 ‘숲의 하이엘프’라는 샤트라 일족에 대해 제법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 탓에 조금 잡스러운(?) 이야기들도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와, 주군. 샤트라 일족을 어떻게 아세요?”
“트로웰의 하수인이 알려 줬거든.”
“트로웰이라면…… 대지의 정령왕님?”
“그래.”
“헉, 대지의 정령왕님을 만나 보신 건가요?”
“그건 아니야. 하지만 그로부터 임무를 받았지.”
“우, 우와!”
“임무만 잘 끝나면 트로웰을 만날 때 널 데려가도록 할게.”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까 빨리 샤트라 일족을 좀 찾아 줘 봐.”
“그건……! 맡겨만 두세요!”
아렌의 이야기에 의하면, 샤트라 일족이 머무는 곳은 비터스텔라 네 개의 산맥 중 ‘호른’ 산맥이었다.
정확히는 호른 산맥의 최남단.
호른 산맥의 남쪽지역은 비터스텔라의 영역 가장 외곽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고, 그와 동시에 고도가 낮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었다.
특이점이라면 낮은 분지에 무척이나 빼곡한 숲이 형성되어있다는 정도.
‘숲의 엘프라더니, 어울리는 곳에 부락이 있네.’
하여 아렌을 앞세운 이안 일행은 곧바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였다.
쐐애앵-!
목적지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비터스텔라에서도 남쪽지대에 속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안 일행은 금방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언과 불용이라는 훌륭한 운송수단 덕을 본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왜 자꾸 나를 부르는 거냐, 주인아?
“뭐가 또 불만인데.”
-신나게 싸울 때 부르는 것도 아니고, 왜 매번 탑승용 소환수로 날 써먹느냔 말이다.
“불용이, 네가 제일 넓어.”
-……?
“네 등판이 제일 넓다고.”
-크윽……!
제법 불만스런 표정의 불용이를 뒤로한 채, 목적지에 내려 주변을 살피는 이안.
이안의 관심사는 오직, 퀘스트에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렌, 이 근처에 샤트라의 부락이 있다는 거지?”
“네. 아마 맞을 거예요, 주군.”
이안은 곧바로 맵을 열어 위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호른 봉우리건 다른 어떤 봉우리건, 이미 비터스텔라의 대부분 지역들이 이안에게 들쑤셔진 상태였기 때문에 맵을 열어 밝혀진 지도를 확인하면, 더 손쉽게 부락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흠, 여기 어쩐지 낯이 익은데.’
지역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으로 이동한 이안은 두리번거리며 숲의 지형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가 눈에 익은 동네인데, 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이지.”
거기가 거기 같은, 나무들이 빼곡한 이 숲속에서 대체 어떤 지형이 눈에 익는다는 것인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안.
주변 지형을 전부 눈에 담은 이안이 다시 아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렌,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는 거야?”
“샤트라 일족의 부락에요?”
“그래, 거기.”
“오래전에 가 본 기억이 있기는 한데, 의미 없어요.”
“기억이 안 나?”
“아뇨, 그건 아니고…… 샤트라 일족은 숲의 정기가 가장 강한 곳으로 1년에 한 번씩 부락의 터를 옮기거든요.”
“오호, 그래?”
“정령수가 많이 자라 있는 곳으로 가면 샤트라 일족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어서 아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안의 눈앞에 간결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샤트라 일족의 부락을 찾아서(에픽)(연계)’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계되는 퀘스트 창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샤트라 일족의 부락을 찾아서 (에픽)(연계)’
엘프의 일족으로부터 숲의 하이 엘프에 대한 정보를 얻은 당신은 그들이 오랜 기간 머물러 온 터전의 인근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리고 획득한 정보에 의하면 ‘가장 숲의 정기가 강한 곳’에 샤트라 일족의 부락이 있을 터.
숲의 정기가 강한 곳에서 자라는 특성이 있는 정령수(정령의 나무)들의 분포를 토대로, 샤트라 일족의 부락을 찾아보도록 하자.
대지의 힘을 노리는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보다 한발 빠르게 찾아내야 할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B+
퀘스트 조건 : 파티에 80레벨(초월) 이상의, 정령술을 배운 ‘소환술사’ 클래스 유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파티에 ‘용암’, ‘삭풍’, ‘빙혼’ 중 하나의 인정을 받은 유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파티원이 ‘트로웰의 부탁 Ⅰ (에픽)(히든)’퀘스트를 진행 중인 상태여야 합니다.
모든 파티원이 ‘정령왕의 사자(대지)’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한 시간 : 없음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
-01 : 39 : 51
(대략적인 예상 시간이며, 남은 시간은 어떤 변수에 의해 변동될 수 있습니다.)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부락의 안에 입장해야 다음 연계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샤트라 부락 수성’ 퀘스트)
보상 : 명성(초월) 2만
‘샤크라’ 부족과의 친밀도 +10
오픈된 퀘스트 창을 보며 이안의 동공은 점점 더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
왜 이 지역이 유독 낯익게 느껴지는지 퀘스트 내용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균열 바로 근처잖아?’
물론 균열의 위치는 비터스텔라의 바깥쪽이다.
하지만 퀘스트가 발생한 이 지역은 비터스텔라에서도 외곽지였고, 여기서 협곡을 따라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기계문명과 이어진 균열의 입구가 나오는 것이다.
‘이거 이러면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데?’
머릿속으로 퀘스트의 전개가 떠오른 이안의 입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계 문명의 군대라면 균열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을 거고…….’
이안의 시선이 다시 퀘스트 창을 살짝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이 고정된 곳은…….
*기계 문명의 침략자들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
-01 : 39 : 51
(대략적인 예상 시간이며, 남은 시간은 어떤 변수에 의해 변동될 수 있습니다.)
퀘스트 창의 하단에 있는 부가 정보 페이즈였다.
‘남은 시간이 변수에 의해 변동될 수 있다면, 그 변수를 만들어 주면 되는 거잖아?’
퀘스트라는 것이 꼭 기획 의도대로만 진행할 필요는 없는 것.
‘약간 도박수이기는 하지만…….’
이안은 두뇌를 풀가동하여 최대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 *
이안의 충실한 가신 1, 2호인, 카이자르와 헬라임.
오랜만에 주군의 호출을 받은 두 가신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동 중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헬라임?”
“글쎄. 폐하께서 호출하신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그들의 표정이 복잡한 이유는 간단했다.
두 가신들을 호출한 이안의 대사가 의미심장했으니 말이다.
-헬라임, 카이자르, 보내 준 좌표로 이동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폐하!
-무슨 일이냐, 주군.
-오랜만에 신나게 한번 싸워 볼 거다.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한번 증명해 봐.
-……!
-일인분 못 하는 놈은 나랑 같이 지옥 훈련 시작할 각오 하고.
하지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이안의 대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신들이 마냥 불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 같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도 무척이나 컸으니 말이다.
그간 평범한 필드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사냥을 해 왔기 때문에 너무 따분했던 것.
물론 그 전투라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함도 제법 컸지만, 그 때문에 생각이 많은 표정들인 것이다.
“신나게 때려 부술 일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근질거리는 표정으로 검병을 만지작거리는 카이자르를 보며, 헬라임이 한마디 하였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군.”
“흐흐, 그런가?”
“폐하께서 우리 둘까지 부르셔야 할 정도라면 필히 강력한 적들과 싸우실 상황일 테니 말이다.”
헬라임의 대사에 카이자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안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둘은 그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까망이와 핀에 각각 올라탄 채 빠르게 정령산을 질주하는 두 가신들.
오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한 두 가신들은,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하고는 활짝 미소 지었다.
“여, 루가릭스, 오랜만이야.”
“카르세우스도 있고 라이도 있고, 전부 다 모였네.”
정령계의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이안의 모든 소환수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 * *
이쯤 되면 이미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안의 계획은 무척이나 무식하고 간단한 것이었다.
원래의 퀘스트 의도대로라면 먼저 샤트라 일족의 부락을 찾고, 그곳에서 엘프들과 함께 기계 문명의 공세를 막아 내야 했지만, 이안은 그러한 기획 의도를 깡그리 무시한 채 전장을 다른 곳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숲의 하이 엘프들이라는 강력한 지원군도 포기하고, 수성전의 이점까지도 포기한 채 단독으로 기계 문명의 대군과 싸우려고 하는 것.
그렇다면 이안은 대체 어떤 이득을 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바로 ‘균열’이라는 특수한 전장에 있었다.
균열이야말로 이 모든 이점을 포기해도 될 만큼, 이안에게 유리한 전장이었으니 말이다.
‘균열의 버프를 이용하고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제대로 기습만 성공시키면, 엘프 부족의 지원 없이도 충분히 싸워 볼 만할 거야.’
물론 기계문명 군대가 얼마나 많은 숫자일지는 예상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균열의 지형은 그리 넓지 않은 통로였고, 강력한 버프에 이 좁다란 지형적 특성만 이용한다면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막아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만 되면, 정말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파밍할 수 있겠지.’
NPC들이 유저들보다 경험치를 조금 가져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독식과 분배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전투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안은 안전장치까지 철저히 해 두었다.
‘엘프 부락의 위치는 미리 찾아두었으니까.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그쪽으로 빠르게 후퇴해야지 뭐.’
대마법사 급인 피올란의 매스 텔레포트를 언제든 발동시킬 수 있도록, 철저히 보험까지 들어 둔 것.
하여 이안은 오랜만에 흥분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쩐지 이번 전투는, 근래 들어 가장 짜릿하고 화끈한 전투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