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6화 7. 트로웰의 부탁 (2) >
* * *
정령계에는 많은 자연의 종족들이 존재한다.
정령계의 시작 마을이나 다름없는 프뉴마 마을 등 콘텐츠 초반부에서부터 자주 접할 수 있는 고랄 종족부터 시작하여, 정령계를 배반하고 기계문명으로 넘어간 파프마 일족 그리고 이안의 가신 아렌과 같은 엘프들까지.
지금까지 유저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종족은 대여섯 종이 넘는 수준이었고, 그들은 각각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안은 대지의 힘을 회수하기 위하여, 모든 종족들을 전부 찾아다니며 뒤져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트로웰의 부탁 퀘스트는 그렇게 무식하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숲의 하이엘프, ‘샤트라’ 일족을 먼저 찾아가 보시게. 세 가지 대지의 힘 중 ‘대지의 눈’을 그들 종족이 보관하고 있으니 말이야.
“샤트라 일족이라…….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의 터전이 지금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이 비터스텔라의 안에 존재할 걸세.
“아하.”
-대지의 힘을 가진 종족들은, 비터스텔라의 성역을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니 말일세.
“그렇군요.”
-만약 엘프의 일족들 중 도움 받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훨씬 더 찾기 수월할 것이네.
인도자의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그에게는 충실한 가신이자 엘프의 일족인 ‘아렌’이 있었으니 말이다.
‘아렌을 불러서 같이 움직이면 되겠어. 지금쯤 소환수들 레벨은 많이 올려 놓았으려나.’
이안은 아렌을 가신으로 들인 뒤 지금껏 아주 유용하게 부려먹고(?) 있었다.
뛰어난 정령술사이자 소환술사인 그녀의 클래스를 자신의 소환수들을 더 효과적으로 육성하는 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아렌은, 정령계 각지에서 사냥 중인 소환수들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던 것.
그 덕에 아렌의 레벨도 상당히 높아졌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숲의 하이 엘프라는 종족들은 아렌의 도움을 빌려서 찾으면 될 것 같고. 나머지 두 종족들에 대한 정보를 물어봐야겠는데…….’
이어서 이안은 궁금한 모든 것들을 인도자에게 물어보았고, 인도자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두 번째 힘인 ‘대지의 심장’은, 고대 자연의 종족 중 하나인 그락투스 종족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힘인 ‘대지의 결의’는 강력한 전사의 일족인 셀라무스 일족이 보관하고 있지.
그락투스 종족과 셀라무스 종족은, 정령계를 진행하는 랭커들 사이에서도 아무런 정보도 알려지지 않은 종족이었다.
이안의 에픽 퀘스트로 인해, 최초로 등장하는 종족인 것.
하지만 그중 마지막에 등장한 이름은 이안에게 무척이나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셀라무스라고?’
고대의 일곱 사막 부족 중 하나이자 소환술사인 이안의 전투력을 지금의 수준에 이르게 해 준 부족.
그리고 물의 정령왕 ‘엘리샤’와의 첫 만남을 주선(?)해 준 인연 깊은 부족의 이름을 이안이 잊을 리 없는 것이다.
‘셀라무스는 고대 사막의 부족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안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정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그는,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셀라무스라는 이름을 가진 부족이 정령계에 또 하나 있을 경우의 수.
두 번째는 이안이 알고 있는 그 셀라무스 부족이 사막의 부족임과 동시에 자연의 부족일 경우의 수.
-‘대지의 눈’을 손에 넣는다면, 나머지 두 힘이 어디에 있는지는 자연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네. 대지의 눈은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니 말이야.
“그……렇군요.”
-샤트라 일족을 찾아 어서 움직이시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네.
인도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곧바로 월드 맵을 열어 보았다.
정령산의 한가운데 광활하게 펼쳐진 비터 스텔라의 영역.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이미 절반도 넘게 밝혀진 맵을 보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여러 퀘스트들 때문에 비터 스텔라를 헤집고 다녔고, 때문에 이미 대부분의 지역이 머릿속에 훤했다.
‘그래도 일단 발로 뛰기 전에, 아렌부터 불러들여야겠어. 그에 더해 수호자에게도 정보를 좀 얻을 수 있겠지.’
아렌과 더불어 친분이 있는 고랄 종족의 수호자들을 떠올린 이안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제한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은 퀘스트였으나, 오히려 제한 시간이 있는 퀘스트보다도 더 시급을 다투는 것일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기계 문명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까.’
대지의 요람을 나선 이안 일행의 목적지는 정령산의 남단, 프뉴마 마을이었다.
* * *
전 세계 수많은 길드들이 활약하고 있는 사실상 글로벌 통합 서버인 중간계.
처음 업데이트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중간계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느낌이 강한 곳이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지나 많이 대중화된 상태였다.
한국 서버에서만 해도 이제는 백 군데가 넘는 많은 길드들이, 중간계로 넘어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제는 최상위권을 넘어 평범한(?) 상위권의 길드들 까지도, 제법 중간계로의 이주를 시작한 상황.
하지만 중간계로 넘어갔다 해도, 그 안에서의 격차는 또 다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초월 70~80레벨에 육박하는 최상위권과, 초월 30레벨 미만의 뉴비 사이에는,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으니까.
“와, 기사 대전 경기 보니까 진짜 살벌하더라. 무슨 지상계도 아니고 중간계에서 대미지가 몇만 단위로 뜨네.”
“몇만은 무슨, 십만 단위도 보이더라.”
“크, 난 풀 버프 받고 스킬 써도 5천 띄우기도 힘든데…….”
하여 한국 서버에서도 글로벌 톱 티어라고 불릴 만한 길드는, 도합 네 곳에 불과하였다.
인간 진영의 로터스, 타이탄 길드와 마족 진영의 호왕, 다크루나 길드.
이 넷을 제외한 다른 길드들은 글로벌 50위권 안에도 발을 들이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중간계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번 기사 대전에 미국이나 중국은 거의 일곱 팀 정도 들어간 것 같던데, 한국 서버는 딱 넷뿐이네?”
“그러게. 확실히 전체 파이가 커서 그런지, 물량으로는 미국이나 중국을 이길 수 없겠어.”
때문에 한국 서버의 카일란 팬들은, 로터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의 길드들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로터스의 선전과 더불어 다른 길드들도 기사대전의 10위권 안쪽에 들어가 준다면, 카일란 종주국의 유저로서 더욱 어깨에 뽕(?)을 집어넣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리그전 시작할 때 한국 팀만 넷이면 진짜 대박이겠다.”
“크, 그럼 국뽕 제대로 들어가겠지.”
하지만 기사대전의 32강 경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한국 팬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최종 스코어
-타이탄(한국) : 세인트라이언(독일) – 6 : 10
-세인트라이언 길드가 승리하였습니다!
-세인트라이언 길드가 16강에 진출합니다!
호왕이나 다크루나보다도 오히려 더 기대주였던 타이탄 길드가 첫 경기에서 미끄러져 버렸으니 말이었다.
심지어 스코어마저도 압도적으로 밀린 수준.
“미친, 6 : 10이라니. 타이탄에 몰빵했는데!”
“쯧, 내가 말했잖아. 세인트라이언이 유럽 서버에서는 1티어 길드라고. 난 세인트라이언에 몰빵해 뒀지, 후후.”
“이런 매국노……! 애국 배팅 모르냐, 애국 배팅?”
“그나저나 세인트라이언 진짜 대박이네. 이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압도할 줄은 몰랐어.”
로터스가 말도 안 되는 성적을 거둔 것이지, 사실 6 : 10 정도만 해도 일방적인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
세인트 라이언의 출전자들이, 타이탄 랭커들과의 싸움에서 평균 2인분 정도를 해낸 셈이니 말이다.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다크루나와 호왕 길드가 나란히 16강에 진출했다는 정도.
-호왕(한국) : 카르토스(인도) – 10 : 7
-크리쳐(미국) : 다크루나(한국) – 9 : 10
특히 9 : 7의 스코어에서 반전의 3연승으로 승리를 차지한 다크루나의 경기는, 한국 팬들 사이에서 로터스의 경기만큼이나 회자되고 있었다.
“크, 마지막 3연승, 이라한 작품이겠지?”
“캬, 아직 죽지 않았구나, 이라한. 한때 한국 서버 랭킹 1위답네.”
“솔직히 운도 좀 따라 줬지만, 실력이 있으니까 운도 의미가 있는 거지.”
“크리쳐 미국에서도 최상위권 길드로 알고 있는데, 대박 났네.”
그리고 이번 기사대전으로 인해 호왕 길드 또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구 스플랜더 길드와 림롱의 세력 등 다양한 마족 진영 길드들이 연합하여 탄생한 호왕 길드.
여러 뿌리가 한데 합쳐진 탓에 한동안 내부의 알력 다툼이 많았던 호왕 길드는 한동안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팬들도 호왕 길드의 잠재력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32강 경기에서 그 저력을 보여 주며 깔끔하게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16강에 한국 팀만 셋이라……. 타이탄이 미끄러진 건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히 훌륭한 성적이네.”
“세 팀 다 8강 가즈아!”
그런데 이쯤 되자 기사대전을 관전하던 카일란의 팬들은,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16강 경기가 끝나면 당연히 여덟 팀만이 생존하게 되는데, 리그전은 총 열 팀으로 진행된다고 처음부터 명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팬들의 궁금증을 이미 짐작하기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카일란 공식 홈페이지에 향후 일정표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16강전이 끝난 이후. 기사대전에 참전하여 탈락한 스물 네 팀 중 패자부활전으로 두 팀을 선발합니다.
-패자부활전은 기존의 기사대전과 달리 3 vs 3 구도로 진행되며…….
물론 이 새로운 소식을 접한 카일란 팬들은 새롭게 늘어난 볼거리에 환호했고 말이다.
“타이탄 다시 떡상 가즈아!”
그리고 그렇게, 기사대전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을 무렵.
아직까지도 기사대전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안 형, 우리 16강 일정 잡혔어.”
“이번엔 참전하실 거죠, 이안 님?”
“나? 내가 왜?”
“……?”
“에? 이번에도 우리끼리 하라고?”
“당연하지. 보니까 스코어 1점 주고 대승했던데……. 나 없어도 16강까진 문제없이 이길 듯.”
“이번에는 독일 서버 1위 파블로프 길드가 상대라고 형.”
“독일 서버 1위는 세인트라이언 아니었어?”
“거기는 사실상 유럽연합이니까.”
“아무튼 안 가. 훈이랑 유신이가 캐리해 주겠지, 뭐.”
“켁.”
그의 이름은 당연히 이안이었다.
‘결승이면 모를까, 퀘스트 끝나기 전엔 절대 움직일 수 없지.’
아렌과 고랄 종족으로부터 정보들을 수집한 뒤 신이 나서 샤트라 일족을 찾아 이동 중이던 이안.
‘게다가 이렇게 재밌는 정보를 얻었는데 말이야.’
이안 일행은 지금, 차원의 균열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