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5화 7. 트로웰의 부탁 (1) >
사실 대지의 인도자가 나머지 두 가지의 흔적을 찾아 주는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원래의 퀘스트 설계대로라면 인도자는 요람 내의 길을 안내할 뿐, 나머지 피스들의 위치까지 알려주지는 않도록 되어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런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한번 요람을 나가면 다시 진행할 수 없는 퀘스트이다 보니 기획자들이 나름의 배려를 해 놓았던 것이다.
요람에 입장한 파티가 흔적들을 찾아내는 데 기획 의도 이상으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경우, 첫 흔적을 찾은 위치에서 대지의 인도자가 나타나 나머지 두 피스를 찾을 수 있도록 안배해 두었던 것이다.
이안 같은 요상한 의도를 가진 유저가 있을 줄은 그 어느 기획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
‘젠장.’
그래서 결국 대지의 인도자의 방해 덕분에 이안 일행은 금방 나머지 흔적들을 전부 찾아낼 수 있었다.
-트로웰의 두 번째 흔적을 찾으셨습니다!
-정령의 성소, ‘대지의 심장’을 발견했습니다.
-발견한 트로웰의 흔적 - (2/3)
……중략……
-트로웰의 세 번째 흔적을 찾으셨습니다!
-정령의 성소, ‘대지의 결의’를 발견했습니다.
-발견한 트로웰의 흔적 - (3/3)
-모든 흔적을 발견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전부 완수되자, 어두침침하던 대지의 요람에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지의 요람을 가득 채우던 수 많은 정령들이 스르륵 하고 무너져 땅밑으로 녹아 내렸다.
물론 그 광경을 보는 이안을 제외한 세 사람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가 가득하였다.
“크, 행복하다!”
“이렇게 빨리 지옥에서 탈출하다니.”
“인도자님, 감사해요.”
퀘스트의 난이도와 등급을 생각했을 때, 사실 보상 자체는 무척이나 짠 편이었다.
초월 명성 5만 정도와 대지의 수호자 칭호. 그리고 트로웰과의 친밀도 10이 보상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대지의 수호자 칭호가 그나마 전설 등급의 초월 칭호이기는 하였으나, 대지의 정령을 사용하는 정령술사가 아니라면 그다지 의미가 없었던 것.
그러나 이안의 파티원들은, 그 어떤 퀘스트를 클리어했을 때보다도 더욱 기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최고의 보상은 노가다 지옥에서의 해방이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능력은 정말로 대단하군.
그리고 퀘스트의 강제 진행으로 당황했던 이안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듯했다.
그래도 하루 내내 최초 버프 경험치를 받으며 제법 흡족한 수준의 파밍을 하였고, 이렇게 된 이상 퀘스트를 빠르게 진행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이안의 물음에, 대지의 인도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어서 나무의 질감 탓인지 거칠게 주름진 그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용암의 힘을 가진 자여.
“……?”
-그대들의 도움 덕분에, 왕께서 깨어나셨네.
“왕이라면, 대지의 정령왕?”
-그렇다네.
잠시 뜸을 들인 인도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왕께선 아직, 그대들을 만날 수가 없다네.
“그건 어째서……?”
-의식은 깨어나셨으나, 육신은 아직 몽마 속에 잠겨 계시기 때문이지.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대지의 정령왕은 정령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비터스텔라에 묻고 잠들었다.
오랜 기간 정령계의 수호자들과 정령들은 그 힘의 도움을 받아 기계 문명과 싸워 왔으며, 그리하여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때문에 지금 정령왕 트로웰의 육신은, 모든 힘을 잃고 봉인되어 있는 상태.
-왕께서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령계에 빌려주었던 대지의 힘들을 회수하셔야 한다네.
“그건 어떻게 회수할 수 있는데?”
곧바로 이어진 이안의 반문에, 인도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대답하였다.
-자네들이 지금까지 찾은 세 곳의 성소. 그곳들이 다시 가동할 수 있도록, 대지의 눈, 대지의 심장. 그리고 대지의 결의를 되찾아 와야 하지.
트로웰의 흔적을 찾는 퀘스트에서, 이안 일행이 찾아낸 세 곳의 성소.
눈과 심장, 그리고 결의는 그곳들의 이름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정령계의 종족들에게 빌려준 세 가지 ‘대지의 힘’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지금 성소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빈껍데기들일 뿐.
‘그것들을 되찾아 와서, 세 곳의 성소에 각각 끼워 넣어야 하는 것이겠군.’
이어서 이안 일행의 눈 앞에 한 줄의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정령왕의 사자(대지)’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계 퀘스트의 퀘스트 창이 주르륵 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트로웰의 부탁 Ⅰ (에픽)(히든)’
당신은 대지의 요람에 들어서, 트로웰의 세 가지 흔적을 성공적으로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사실 정령왕 트로웰의 ‘시험’과도 같은 것.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정령왕의 사자’가 되어야만 하고, 때문에 대지의 가디언들을 통해 그 자격을 시험한 것이다.
결국 당신은 트로웰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여 ‘정령왕의 사자(대지)’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이제 사자의 자격으로 정령계의 종족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빌려주었던 대지의 힘을 되찾아 오자.
세 가지 힘을 되찾아 원래의 자리인 대지의 요람으로 가져온다면, 정령왕 트로웰이 깨어날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S+
퀘스트 조건 : 파티에 80레벨(초월) 이상이며 정령술을 배운 ‘소환술사’ 클래스 유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파티에 ‘용암’, ‘삭풍’, ‘빙혼’ 중 하나의 인정을 받은 유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파티원이 ‘트로웰의 흔적을 찾아서 (에픽)(돌발)’퀘스트를 클리어한 상태여야 합니다.
모든 파티원이 ‘대지의 수호자’ 칭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한 시간 : 없음
*세 가지 대지의 힘 중 하나라도 기계 문명에 빼앗긴다면 해당 퀘스트에 실패합니다.
보상 : 명성(초월) 20만
‘트로웰’과의 친밀도 30 상승
대지의 정령 마법서 ??? (신화)(초월)
* * *
전 세계 카일란 팬들의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종료된 기사대전의 개막식.
그리고 이 개막식에서 펼쳐진 두 경기의 개막전들은, 밤 늦게까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레미르의 7연승이 나온 인간 진영의 경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제법 팽팽했던 다크블러드와 그라탄의 경기도 충분히 기대 이상의 재미를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캬, 레미르가 혼자 다 해먹는 경기도 재밌었지만, 쫄깃한 맛은 이쪽이 더 있었던 듯.
-맞음. 사실 일방적으로 한쪽이 압살해서 끝난 경기보다는 끝까지 팽팽했던 마족 진영 개막전이 나는 더 재밌었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족진영의 개막전에서 승리한 팀은, 다크블러드였다.
스코어는 10 : 8로, 제법 팽팽한 수준.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이었던 인간 진영의 경기와 달리 역전에 역전이 거듭된 마족 진영의 개막전은 팬들의 입장에서 재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기 양상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팬들의 관전 포인트도 완전히 상이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인간진영의 경기를 관전한 팬들의 관심이 거의 9할 이상 레미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면…….
-레미르가 착용하고 있던 장비, 대체 무슨 등급일까?
-전설 아니면 신화인데……. 설마 신화 등급은 아니겠지?
-한 피스면 몰라도 풀 세트로 보이던데. 벌써 초월 장비로 신화 풀 세트 착용하는 건 무리가 있는 듯.
-크, 인페르노 히드라였나? 그 마법은 대체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거지?
-카일란 접기 전에 한 번만 써 볼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서라. 그거 9서클 마법이라던데. 7서클도 못 찍은 주제에 꿈만 커 가지고.
마족 진영의 경기를 관전한 팬들의 관심은 출전 기사들의 ‘정체’를 추측하는 데에 쏠려 있었다.
-마지막에 2연승 때리고 결승점 올린, 다크블러드의 암살자 클래스가 누구일까?
-아무래도 요르간드 아닐까? 영국 애들은 요르간드라고 거의 확신하는 것 같던데.
-정말 그러려나? 요르간드가 피지컬이 대단하긴 하지만, 아직 초월 레벨이 많이 낮을 것 같은데…….
-사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음. 다크블러드에 암살자 랭커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라탄 세 번째 출전자는 아마 쿠커겠지? 쿠커 말고는 그런 피지컬을 보여 줄 수 있는 랭커가 그라탄에 없을 테니 말이야.
-그건 거의 확실함. 사실 그 친구가 3연승 박아 줘서 그라탄이 이만큼이라도 성적 뽑은 거니까.
하지만 여러 가지 관전 포인트와 재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막전이 끝난 시점에서 유저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는 톱 티어 길드들의 다음 경기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대전사 카이의 길드인 칼데라스와, 중국서버 최강자 중 하나인 류첸의 천웅(天雄) 길드.
그리고 미국 서버 인간 진영 1위 길드이자 마크 올리버가 소속되어 있는 ‘발러’ 길드와 같은 최강의 길드들 말이다.
한국의 카일란 팬들은, 로터스를 제외한 다른 한국 길드들이 그들을 상대로 얼마나 선전할지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었다.
-국내에서야 동급으로 취급되지만, 아마 호왕이나 다크루나는 칼데라스 만나면 바로 광탈이겠지?
-그건 당연한 거고. 솔직히 둘 중 하나가 다크블러드라도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임. 이번 경기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
-타이탄은 어떰? 발러한텐 좀 힘들 것 같은데, 스콜피온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음……. 진짜 그건 뚜껑 열어 봐야 알 듯.
그리고 그런 국내 팬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남아 있는 32강 경기의 모든 대진표가 공개되었다.
칼데라스(미국) vs 옵스큐르(프랑스)
발러(미국) vs 발리토어(영국)
……중략……
타이탄(한국) vs 세인트라이언(독일)
호왕(한국) vs 카르토스(인도)
……중략……
크리쳐(미국) vs 다크루나(한국)
……후략……
* * *
드르륵- 철컹- 철컹-!
촤라라라락-!
고막이 멍해질 정도로 커다란 기계음과 함께 새하얀 은빛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떨어져 내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은백색의 철갑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하고 찬란한 외형을 가진 기갑병기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바로 고대의 기갑병기…….”
눈앞에 나타난 위압적인 존재의 모습에 류첸은 전율하였다.
그는 중국 최고의 길드 중 하나인 천웅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기사대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기사대전의 32강보다는 지금 진행 중인 이 에픽 퀘스트가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쿠웅-!
황홀한 표정으로 기갑병기를 올려다보는 류첸.
그런 그를 향해, 웅혼한 기계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고, 류첸의 몸은 AI의 통제 안으로 자연스레 잠식되었다.
카일란의 메인 스토리와 연관된, 에픽 퀘스트의 발현인 것이다.
-그대가 고대의 설계도를 가져왔다는 그 주술사로군.
“그렇습니다, 기계문명의 왕이시여.”
-덕분에 나의 대계가 조금 더 빨라질 수 있었노라.
“과찬이십니다, 저는 단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그긍- 그그긍-!
거대한 기갑병기의 상부가 천천히 열리며, 그 안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길게 늘어진 하얀 가운을 입은, 주름진 노인의 그림자.
하지만 외소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의 주변에선 강렬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기갑병기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작은 체구의 노인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보다 거대한 거인과 같은 존재감이 느껴진 것이다.
이어서 류첸과 눈이 마주친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갑병기의 바깥으로 나와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계음이 아니었다.
“나의 군대들이 이제 곧 출정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왕이시여.”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정령계의 모든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노인의 이야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고, 류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의 말에 집중하였다.
카일란의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으니 단 한마디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띠링-!
류첸의 앞에, 새로운 에픽 퀘스트의 정보창이 주르륵 하고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기계 문명의 지배자, 찰리스의 야망(에픽)(히든)’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첫 번째 연계 퀘스트, ‘대지의 힘을 저지하라(에픽)(연계)’ 퀘스트가 부여됩니다.
이어서 퀘스트 내용과 보상을 확인한 류첸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