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4화 6. 화염의 성좌 (3) >
* * *
체스크의 회심의 일격에, 레미르가 당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레미르가 그저 당황했다면, 체스크는 경악하고 있었다.
‘뭐야. 이게 딜이 이거밖에 안 들어간다고?’
마법사인 레미르의 방어구는, 헤비 아머도, 라이트 아머도 아닌,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로브이다.
물론 초인적인 반사 속도로 실드를 발동시켜 어느 정도 대미지를 흡수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도 최소 30퍼센트 정도는 생명력을 깎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쉽게 말해 체스크가 기대했던 피해의 절반 정도밖에 입히지 못한 것이다.
‘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모든 장비를 전설 풀 세트로 맞춘 체스크는, 전설 방어구의 방어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다.
레미르도 전설급의 방어구를 입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정도의 대미지 감소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전설 등급의 라이트 아머를 입었어도, 이렇게 딜이 조금 들어가지는 않았을 거야.’
때문에 체스크는 순간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신화 등급인가? 이펙트가 화려하긴 하지만, 그럴 리는 없는데?’
레미르의 스펙이 예상했던 수준을 훌쩍 넘어 버리자 체스크는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레미르의 방어구 스펙 때문에 딜이 이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면, 계획했던 대로 대미지 교환을 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이 흔들린 것을 발견한 레미르가 이 꿀 같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스하아아-!
체스크의 신형이 일정 거리 안에 다가오자 레미르의 주변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가 인페르노 필드에 대한 이해도를 가진 것을 확인했으니, 어떻게 대응할지는 이미 머릿속에 전부 그린 상태였다.
‘제법 영리하긴 했다만…….’
체스크는 또 한 번 같은 수법을 이용해 대미지 교환을 시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치고 들어가 그 페이스를 끊어 놓으면서, 전장을 다시 리드하는 것이 최상의 수라고 할 수 있었다.
“스페이스 번Space Burn.”
화륵-!
레미르가 전방으로 도약하는 사이 캐스팅이 끝난 블링크 마법이, 깔끔하게 발동하였다.
본래 마법을 캐스팅하는 동안 움직일 수 없는 페널티를 가진 것이 마법사일진대, 레미르는 대체 어떻게 이동 중에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었을까?
이것은 정말 논리적으로나 가능한, 레미르의 완벽한 컨트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돌진마법을 발동시켜 전방으로 튀어나감과 동시에 이동시간을 본능적으로 계산하였고, 허공으로 도약한 몸이 바닥에 다시 떨어져 내리기 전까지 깔끔하게 공간이동 마법 캐스팅을 성공시킨 것이니 말이다.
어차피 공중에 떠 있는 동안에는 레미르가 움직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고, 그 찰나의 시간을 이용하여 스페이스 번을 발동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캐스팅이 조금이라도 늦어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레미르가 착지해야 했다면, 캐스팅은 깨어져 버렸을 것이다.
모든 마법의 캐스팅은 몸의 움직임이 흐트러지는 순간, 캔슬 되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마법의 캐스팅 시간을 본능적으로 꿰고 있지 않다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말 그대로 미친 수준의 마법 컨트롤.
그리고 실전에서 이러한 고난도의 컨트롤을 굳이 보여 준 것은, 단순히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레미르는 그 정도로 겉멋이 든 랭커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굳이 대시 스킬을 사용하던 중에 공간 이동 마법까지 캐스팅한 것은 체스크의 타이밍을 뺏어 오면서 변칙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
대시 스킬에 공간 이동 마법이 연달아 발동하자 레미르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고…….
퍼어엉-!
체스크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넘어 그대로 그의 등 뒤를 점해 버렸으니까.
“불길의 속박!”
화르르륵-!
레미르가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타깃을 잃은 체스크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쐐애앵-!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체스크는 등 뒤로 화끈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크아악!”
-‘로터스의 도전자’의 고유 마법, ‘불길의 속박’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5초 동안 모든 움직임이 40퍼센트만큼 둔화됩니다.
-‘화상’ 상태에 빠져, 화염 저항력이 35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마법사만큼은 아니지만, 궁수의 탱킹 능력도 하위 티어에 수렴한다.
그 말인 즉 이렇게 근거리에서 공격 마법에 노출되면 그대로 생명력이 녹아내린다는 이야기.
-화염 마법으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57,084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71,011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49,923만큼 감소합니다!
……중략……
-‘화염의 인장’ 효과가 중첩되어 추가 폭발이 일어납니다.
-생명력이 197,208만큼 감소하였습니다!
하물며 레미르의 지팡이가 신화 등급의 초월 장비임에야, 결과는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미친……!”
가득 차 있던 체스크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40퍼센트 가까이 녹아 버렸다.
오히려 레미르에게 입혔던 피해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고 만 것이다.
기지를 발휘해 겨우 잡았던 승기를, 단숨에 빼앗겨 버린 것.
‘침착하자, 침착해! 상대는 이미 4연승을 한 괴물이야.’
체스크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며 레미르의 후속 공격을 피해 내었고,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욱, 후욱.”
물론 그것과 별개로 이미 분위기는 역전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괜찮은 공격이었어. 아깐 정말 식겁했다고.”
지팡이를 빙글빙글 회전시키며 체스크를 향해 히죽 웃는 레미르.
하지만 그녀의 이죽거림에도 체스크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한계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기에도 바빴으며, 그녀가 또 어떤 변칙 공격을 시도할지 몰랐으니 말이다.
그녀의 도발에 대꾸할 시간에, 다음 공격에 대응해야 하는 것.
그러나 체스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레미르는 곧바로 공격을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는 부분이었다.
레미르가 입을 뗀 것은 체스크를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닌,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너, 그거 알아?”
“음……?”
“마법사에겐 시간을 줘선 안 돼.”
“……!”
“마법사가 시간을 지배하는 순간, 그 게임은 이미 끝난 거야.”
레미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전장 전체에서 진동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쿠쿵- 쿠구구궁-!
그리고 다음 순간, 대전장 여기저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콰콰쾅-!
석재로 만들어진 바닥에 붉은 음영이 드리워지면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
“내가 이 정도도 피하지 못할 줄 아는 거냐?”
순간적으로 반응한 체스크는 폭발을 피해 허공으로 도약하였지만, 사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아니, 그것도 못 피할 실력이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
“진정한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해, 친구.”
“그게 무슨……!”
“재밌는 변칙 공격을 보여 준 데에 대한 보답이야.”
그그그긍-!
폭발이 일어난 자리에서, 시뻘건 용암이 꿈틀대며 용솟음쳤다.
널따란 대전장의 중심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피어오르는 용암의 꽃.
터져 올라온 용암들은 점점 어떠한 형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마치 머리가 세 개인 도마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시뻘건 용암으로 만들어진 삼두룡(三頭龍)들이, 대전장 전체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페르노 하이드라Inferno Hydra!”
그것은 레미르가 얼마 전에 얻은 궁극의 화염 마법.
9서클의 공격 마법인 지옥의 히드라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마법인가요?
-화염 계열의 마법 중에 이런 마법도 있었나요?
-용암으로 만들어진 히드라들이 불덩이를 쏟아 내기 시작합니다!
-이건 어떻게 피할 방법도 없어요!
열 마리가 넘는 용암의 히드라들이 입을 쩍 벌리며 체스크를 향해 불길을 쏘아 댄다.
9서클의 마법답게 마나 소모량은 어마어마했지만, 레미르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히드라들이 소멸하기 전, 전투가 끝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르륵.
콰아아아-!
히드라의 숫자가 열 마리가 넘는다는 건, 불길을 쏘아 대는 머리의 숫자는 서른 개가 넘는다는 이야기.
발밑에 펼쳐진 지옥도를 확인한 체스크는 그대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띠링-!
-‘플로아스의 도전자’ 유저의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로터스’ 기사단이 승리하였습니다!
* * *
시간과 공간의 방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피올란과 카노엘, 그리고 쥬르칸은 점점 시간 감각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바깥의 하늘이 전혀 보이지 않는 대지의 요람 안에서 기약 없는 무한 사냥을 하고 있다 보니, 시간개념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다만 대략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길드원들의 길드 채팅 정도였다.
-이겼다!
-캬, 레미르 님 대박!
-이 정도면 기사대전 MVP는 따 놓으신 것 같은데요.
-레미르 누나, 말콤프 형, 고생 많으셨어요.
-우쒸, 레미르 누나 때문에 내 차례는 오지도 않았잖아!
-역시 플로아스 따위. 이안 님 엔트리에 없다고 플로아스에 건 멍청이들은 속깨나 쓰리겠어.
-설마 로터스에 풀 배팅 안 한 흑우는 없겠지?
체력이 이미 바닥난 세 사람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길드 채팅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개막전 이겼나 보네요.”
“레미르 누나가 캐리했나 본데?”
“와, 7연승이라니……. 레미르 누나, 대박.”
고통스러운 무한 사냥 속에서 단비와 같은 소식에 세 사람의 얼굴이 오랜만에 활짝 펴졌다.
그래도 핵심 전력들이 빠진 상황이라 내심 걱정했는데, 이겼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기분이 좋은 것이다.
물론 이안은,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말이었다.
“그럼 설마 질 줄 알았어?”
“…….”
“내가 길드에 세팅해 준 전설 신화 장비가 몇 피스인데, 개막전에서 지면 게임 접어야지.”
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안의 관심사는 경험치 파밍뿐.
‘세 사람 상태 보니, 내일 새벽에는 피스 하나를 오픈해야겠어. 내일 아침까지도 아무 소득이 없으면 의욕들이 많이 떨어지겠군.’
그리하여 대지의 요람에 들어선 지 정확히 24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
이안은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첫 번째 ‘트로웰의 흔적’을 오픈하였다.
“찾았다!”
“응?”
“뭘?”
“흔적을 찾았다고!”
“정말?”
“그거 있기는 한 거였어?”
우우웅-!
녹빛의 안개가 퍼져 있는 한쪽 벽에 다가간 이안이 벽면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안개 속에서 하얀 빛이 나오더니 천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다음 순간…….
띠링-!
퀘스트의 진행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네 사람의 눈앞에 떠올랐다.
-트로웰의 첫 번째 흔적을 찾으셨습니다!
-정령의 성소, ‘대지의 눈’을 발견했습니다.
-‘대지의 인도자’가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후략……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메시지의 내용 안에 예상치 못했던 요소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지의 인도자라고? 뭐지? 중간 보스 같은 건가?’
하지만 이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지의 인도자라는 녀석은, 싸워야 할 중간 보스 같은 것이 아닌 NPC였으니 말이다.
‘트로웰의 흔적을 찾아서’ 퀘스트의 진행을 도와줄, 이름 그대로 ‘인도자’의 역할을 할 NPC.
우우웅-!
마치 ‘나무 인간’ 같은 외모를 한 대지의 인도자는 눈앞의 이안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깨운 이가 그대인가.
“그렇……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군. 그래도 결국 트로웰 님의 안배가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어.
이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대지의 인도자.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안의 표정은 와락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대지의 인도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시간이 없네, 형제여.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기계 문명이 지금쯤 움직이기 시작했을 걸세.
“……?”
-내가 나머지 두 가지 열쇠가 있는 위치를 찾아 주도록 하겠네. 어서 움직이도록 하지.
인도자가 이야기하는 두 가지 열쇠란, 정황상 분명히 트로웰의 나머지 두 흔적들이다.
그리고 일부러 그것들의 위치를 모른 척하고 있던 이안의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는 이야기였다.
“구, 굳이 그걸 찾아 주시겠다고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리는 이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네. 어서 움직이게나!
물론 이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더없이 환한 얼굴이 되었지만 말이다.
“돼, 됐어!”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