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이밍 마스터-863화 (867/1,027)

< 863화 6. 화염의 성좌 (2) >

* * *

카일란의 팬들은 전율하였다.

정말 오랜만에 오픈된, 카일란 정상급 랭커들의 대전 콘텐츠.

중간계의 ‘기사대전’은 개막전 첫 경기부터 팬들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들이 속출하는 중이었다.

특히 플로아스 길드를 압살하며 연승에 연승을 달리고 있는 로터스.

로터스의 기사대전을 보면서, 카일란의 팬들은 이번에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

같은 랭커라 하더라도 ‘격’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며, 최상위권 내에서도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국 서버의 랭킹 3위에 랭크되어 있는 플로아스 길드는 결코 어중간한 랭커 길드가 아니었고, 때문에 플로아스의 기사단에 소속된 유저들도 하나같이 네임드라 불릴 만한 유저들이었지만.

그러한 사실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레미르는 압도적인 격차를 증명하였다.

-와, 진짜 레미르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그동안 이안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던 건가?

-최상위권은 다 한 끝 차이인 줄 알았는데, 뚜껑 열어 보니까 천상계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었네.

최상위 랭커들을 상대로 무려 4연승이라는 기염을 토해 내며, 팬들의 기대치와 환호를 극대화시킨 레미르의 활약.

하지만 이 개막전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9차전이었으니.

4연승을 만들어 낸 레미르의 다섯 번째 경기였다.

이미 모두가 레미르임을 알고 있는 로터스의 화염법사와, 플로아스 길드의 엔트리에 포함된 유일한 궁수 클래스 랭커의 맞대결.

많은 카일란 팬들은 이미 그 궁수의 정체를 예측하고 있었고, 때문에 기대감이 더욱 크게 증폭된 것이었다.

-드디어 기사단장 납시나요.

-저거 분명 체스크일 텐데.

-체스크도 레미르한텐 그냥 털릴 각임.

-그래도 기대해 볼 만한 듯. 체스크가 그래도 플로아스에서는 최고 에이스잖음.

-하긴. 레미르 밑천도 좀 드러났고, 체력도 조금 빠지긴 했으니……. 비벼 볼 만할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팬들의 관심 속에서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 * *

화려한 용 문양이 금빛으로 양각된 새카만 흑철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장궁.

그에 어울리는 칠흑빛 견갑으로 무장한 궁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물론 가면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드러난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남자의 긴장된 표정.

남자의 정체는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플로아스 길드의 기사단장 체스크였다.

‘젠장. 이런 전개는 생각도 못 했는데.’

로터스와 플로아스의 스코어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체스크는 플로아스 엔트리의 여덟 번째 도전자였다.

그리고 체스크가 여덟 번째에 자신의 차례를 넣은 것에는 사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물론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버린 지금에서야, 의미 없는 전략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서넛 정도는 잡을 줄 알았는데…….’

플로아스가 엔트리를 등록한 시점은, 당연히 이안이 로터스의 엔트리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였다.

때문에 그때만 하더라도 플로아스는 로터스를 이길 생각이 없었다.

하여 그들의 전략은, 질 땐 지더라도 최대한 많은 스코어를 따내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안을 이기지 못할 바에야 체스크가 조금 앞 순서로 나가서 이안이 나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스코어를 따 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사대전의 룰상 엔트리의 앞뒤에 에이스를 배치할 확률이 높았으니.

체스크는 그것을 역이용하여, 로터스 엔트리의 최약체들을 자신이 여럿 잡아 보려 했던 것.

이안을 제외한다면 누가 나오더라도, 어지간해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길. 꼬여도 이렇게 까지 꼬여 버릴 줄이야.’

그러나 상황은 체스크의 기대와 달리, 최악의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애초에 로터스 전력에 대한 분석도 완전히 틀렸던 데다, 레미르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자존심 강한 체스크가 생각하기에도, 쉽지 않은 상대로 보였던 것.

그리하여 이렇게까지 꼬인 상황에서, 체스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 하나였다.

‘여기서 내가 레미르를 어떻게든 이겨야 해.’

만약 체스크가 여기서 레미르를 상대로 승리한다면, 플로아스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아이러니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막전에서의 연승을 통해 ‘레미르’라는 네임밸류가 배 이상 솟아올랐고, 그런 그녀를 제압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체스크의 가치는 올라갈 테니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뒤는 없어.’

체스크는 레미르가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 첫 경기인 체스크는 숨겨 둔 카드가 많은 데 반해, 벌써 네 번의 전투를 거친 레미르는 밑천이 다 떨어졌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30퍼센트 수준이라고는 해도 생명력도 깎여 있는 상황.

이 모든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저 괴물 같은 레미르를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쿠웅-!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9…… 8…… 7…….

그리하여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이번엔 쉽지 않을 거야.”

체스크의 비장한 한마디에, 레미르가 씨익 웃으며 대꾸하였다.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

그렇게 로터스vs플로아스.

개막전의 아홉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 * *

체스크의 히든 클래스는, 궁사 계열의 클래스라기에 조금 특별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저격 등의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궁사 계열의 히든 클래스들과 달리, 중단거리에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클래스였으니 말이다.

체스크가 가진 히든 클래스의 이름은, 바로 보우 워리어(Bow Warrior).

굳이 한글로 변환하자면 궁전사(弓戰士)라는 이름이 붙은 체스크의 히든 클래스는, 여러 발의 화살을 폭사시키며 광역 딜을 넣고 근접전을 펼치는, 특별한 클래스라 할 수 있었다.

‘레미르에게 거리를 주면 안 돼. 연달아 캐스팅을 끊어먹으면서, 미친 듯이 밀어붙여야 승산이 있겠어.’

체스크는 이전 경기들로 확인한 레미르의 마법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나름대로 도출해 낸 공략법으로 레미르를 상대하기 시작하였다.

타탓-!

‘그렇다고 완전 근접해서 붙어 버리면 인페르노 필드의 안에 들어갈 테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겠지.’

체스크가 판단했을 때, 레미르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장 먼저 파훼해야 할 것이 바로 인페르노 필드였다.

정확한 스킬의 스펙은 모르지만, 필드의 범위 안에서는 레미르와의 딜 교환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걸 여러 번 확인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체스크는, 레미르의 이 고유 능력을 살짝 역이용해 보기로 하였다.

‘승기를 잡는 것까진 몰라도, 치명타 한 방 정도는 먹일 수 있겠지.’

스스슥-!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빠르게 레미르에게 접근한 체스크가 더욱 가속력을 붙이며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체스크를 보며, 해설진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기 시작하였다.

-와앗……! 플로아스의 궁사 클래스 도전자가 시작부터 강하게 레미르를 압박합니다!

-아예 마법을 캐스팅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겠다는 거죠!

-하지만 궁사 클래스가 이렇게 근접전을 유도하는 건, 정말 드문 경우 아닙니까?

-근접형 궁사도 있긴 하다고 들었는데……. 이거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체스크의 움직임은 날렵하였다.

레미르의 경기를 보며 수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두었기 때문에, 움직임 하나하나에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레미르 또한 지금까지처럼 여유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사전 정보가 없었던 레미르는 애초에 궁사 클래스가 근접전을 유도할 줄 꿈에도 몰랐으니, 계획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달려드는 체스크에게 대처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

일반적으로 마법사와 궁사의 PVP에선 궁사의 사거리가 더 길기 때문에 레미르는 오히려 거리를 좁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하여 레미르는 체스크의 접근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허둥대거나 페이스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것 봐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순식간에 다시 평정심을 찾은 레미르는, 녀석이 아예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도록 오히려 마주 달려들었다.

아예 상대를 인페르노 필드 안으로 유도하여, 전사 클래스를 상대하듯 기선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체스크가 필드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순간.

화륵-!

미리 캐스팅해 두었던 레미르의 화염 마법.

‘체인 익스플로전(Chain Explosion)’이 발동하였다.

펑- 퍼펑- 펑-!

체인 익스플로전은 시전자 주변의 근거리에 강력한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이었고, 짧은 캐스팅 시간 대비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적합한 7서클의 마법이었다.

게다가 그 짧은 순간에 체스크의 이동경로를 예측하여 그 자리에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에, 만약 그가 반응하지 못한다면 제법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터였다.

‘무슨 공격을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불씨 컨트롤만 잘 하면 막아 낼 수 있겠지.’

어마어마한 가속력으로 순식간에 인페르노 필드의 범위까지 접근한 체스크.

관성 때문에라도 녀석은 그대로 안쪽에 진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레미르는 그 사실을 이용해 논타깃 마법을 정확히 발동시킨 것이다.

하지만 전장의 상황은, 레미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휘릭.

금방이라도 필드를 뚫고 안쪽까지 들어설 것처럼 보였던 체스크의 신형이, 필드 안쪽을 살짝 밟은 뒤 거짓말처럼 뒤쪽으로 튕겨 나갔던 것이다.

파앙-!

관성의 법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후방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필드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체스크.

그와 동시에 체스크는 세 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고.

어느새 하얗게 풀 차징 된 체스크의 화살이 그대로 활시위를 떠나 쇄도하였다.

쐐애애액-!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레미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레미르의 인페르노 필드를 완벽히 이해한 체스크가 두 번이나 비틀어 변칙 공격을 감행하자 그녀로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관성에 의해 체스크의 공격은 인페르노 필드 안에서 이뤄졌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레미르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겠지만, 체스크의 화살이 필드 살짝 바깥쪽에서 발사된 탓에 레미르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퍼펑- 펑-!

-3서클 화염 마법, ‘버닝 웨이브’를 발동합니다.

-2초 동안 마법 공격력에 비례하여, 화염 속성의 실드가 생성됩니다.

-플로아스 길드의 도전자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실드가 전부 소진되어 소멸됩니다.

-강력한 물리 피해를 입어 159,809만큼 생명력이 감소합니다.

……후략……

레미르를 향해 정확히 쇄도한 세 발의 화살은, 그녀에게 닿는 순간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마지막 순간에 레미르가 실드 마법을 발동시켜 피해를 최소화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15만이라는 강력한 대미지를 입은 것이다.

그나마 레미르의 로브가 신화등급의 용암 세트였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로브를 입고 있었더라면, 배 이상의 생명력이 빠졌을 터.

체스크의 회심의 공격에 거의 20퍼센트에 육박하는 생명력을 한 번에 잃은 레미르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역동작을 무시할 수 있는 이동기 정도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건데. 너무 안일한 판단이었나.’

체스크가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고 순간적으로 필드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보우 워리어 클래스의 히든 스킬인 ‘섬어썰트 어보이드Somersault Avoid’ 덕분이었다.

물론 레미르의 입장에서 이런 히든 스킬이 있을 것이라는 걸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조금 안일했던 것도 사실인 것이다.

척-!

후속 공격을 피하기 위해 후방으로 블링크를 시전한 레미르와, 그런 그녀를 몰아붙이기 위해 다시 가속을 시전하는 체스크.

체스크와 눈이 마주친 레미르의 양손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번엔 한 방 먹었지만…….”

페이스를 다시 찾은 레미르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레미르의 주변으로, 거대한 홍염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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