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7화 4. 엘리샤의 발자취 (2) >
* * *
“그럼 예뿍아.”
“말해 봐라뿍.”
“지금 정령계에는 사대 속성의 정령왕이 전부 존재하는 거야?”
“음, 그건 아니다뿍.”
“그럼?”
“내가 알기로 지금 정령계에는 엘리샤 님과 트로웰 님, 두 분만이 정령왕으로 계신다뿍. 라그나로스 님과 에실론 님은 기계 문명과 싸우다가 소멸하셨다뿍.”
“엘리샤 님이 물의 정령왕이겠고…….”
“그렇뿍. 트로웰 님은 땅의 정령왕, 라그나로스 님은 불의 정령왕, 에실론 님은 바람의 정령왕이다뿍.”
“그……렇군.”
이안의 머릿속에 예뿍이의 이야기들이 순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지의 요람이라……. 정령왕의 자취가 담겨 있는 장소답게 그럴싸한 이름이야.’
떠오른 돌발 퀘스트, ‘트로웰의 흔적을 찾아서’의 정보 창을 오픈하면서 이안은 무척이나 설레고 있었다.
지금 이안에게 있어 ‘대지의 정령왕’이라는 존재와의 조우는, 무척이나 복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속성 던전에 버금가는 콘텐츠가 튀어나올 수도 있고, 엘리샤와 관련된 단서를 얻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익숙한 퀘스트 정보 창이 주르륵 생성되었다.
-‘트로웰의 흔적을 찾아서 (에픽)(돌발)’
길고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기계 문명과 정령계의 전쟁.
비터스텔라는 정령계의 성역이자 마지막 보루였고, 마타야 봉우리는 그중 땅의 정령들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을 잉태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땅의 힘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성스러운 대지의 요람.
트로웰은 성스러운 정령들의 대지를 기계 문명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대지의 요람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대지의 요람을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정령력을 소모하여, 비터스텔라를 지켜 낸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결국에는 한시적인 것일 뿐.
기계 문명은 머지않아 다시 군대를 일으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비터스텔라도 더 이상 안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의 정령왕 라그나로스와 바람의 정령왕 에실론은 이미 기계 문명과의 전쟁 중에 소멸되었고, ‘오염의 근원’을 찾아 떠난 물의 정령왕 엘리샤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트로웰이 잠들어 있는 지금, 비터스텔라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힘을 회복하고 나면 트로웰은 다시 깨어나겠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에 기계 문명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이 깊고 복잡한 대지의 요람 어딘가에 트로웰이 잠들어 있다.
그의 흔적을 쫓아 잠들어 있는 트로웰을 찾아낸 뒤 그가 잠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자.
트로웰이 다시 일어난다면, 기계 문명의 침공에 맞서 싸울 강력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S+
퀘스트 조건 : 파티에 80레벨(초월) 이상의, 정령술을 배운 ‘소환술사’ 클래스 유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파티에 ‘용암’, ‘삭풍’, ‘빙혼’ 중 하나의 인정을 받은 유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한 시간 : 없음
*대지의 요람 밖으로 한 번 나가거나 모든 파티원들이 전부 로그아웃을 하면, 다시는 해당 퀘스트를 수령할 수 없습니다.
*요람 안에 숨겨진 트로웰의 세 가지 흔적을 찾아낸다면 퀘스트가 완료됩니다.
보상 : 명성(초월) 5만
‘대지의 수호자’칭호 획득
‘트로웰’과의 친밀도 10 상승
퀘스트의 내용은 제법 길었다.
하지만 그 내용 안에는 그만큼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이거 조만간 대규모 전장 시나리오가 시작되려나 본데.’
사실 지금도 정령계와 기계 문명이 전쟁 중인 상태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휴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정령계에 있는 인간 진영의 유저들에게도, 반대로 기계문명의 차원계에 있는 마족 진영의 유저들에게도 전쟁과 관련되어 상대 진영을 공격하라는 유의 퀘스트는 전혀 생성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끽 해야 균열을 오가는 유저들 사이에서, 국지적인 분쟁이 한번 씩 일어나는 정도일 뿐.
하지만 이 퀘스트가 생성된 순간,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트로웰의 흔적을 찾아서 퀘스트는 돌발 퀘스트 이전에 에픽 퀘스트였고, 그 말인 즉 게임 전반의 스토리를 담은 서사등급의 임무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전쟁이 언급됐다는 것은 전쟁과 관련된 시나리오가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왠지 이 퀘스트가 정령계의 다음 시나리오를 여는 트리거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이안과 같은 랭커가 아닌 평범한 유저였다면, 별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퀘스트 창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껏 항상 모든 시나리오의 선두에서 콘텐츠를 열어 왔던 이안은, 퀘스트 정보에 숨겨진 의미 하나하나를 무척이나 날카롭게 찾아내었다.
‘숨겨진 트로웰의 세 가지 흔적이라……. 아직 감은 잘 안 오지만, 일단 들쑤시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또한 이미 퀘스트의 정보 창을 쭉 읽었기 때문에 이안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한번 나가면 다시는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라니…….”
“이거 완전 이안 형 취향 저격 퀘스트 아님?”
“그러게요. 하아, 트로웰인지 뭔지 찾아낼 때까지 우린 아마 불침번을 서면서라도 퀘스트를 진행해야 할 거예요.”
“…….”
세 사람의 대화에 피식 웃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아냐?”
피올란이 대꾸하였다.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뭐, 그럴지도…….”
이어서 그녀의 반문에 짧게 대답한 이안은 성큼성큼 요람 안으로 발을 들였고, 파티원들 또한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뭔가 지옥문 안으로 들어선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이안의 파티에 들어온 순간 기호지세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상황에서 이제 와 발을 빼는 것이 가능할 리 없는 것.
그리하여 숨겨진 필드의 안에 들어선 그들을 가장 처음 반겨 주는 것은, 위압감을 풀풀 풍겨 대는 강력한 대지의 정령이었다.
-정령의 힘이 느껴지는 인간이로군.
“……!”
-과연 성스러운 정령들의 요람을 밟을 자격이 있는지, 지금부터 시험하도록 하겠다.
대지의 정령을 가장 처음 발견한 카노엘은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시작부터 뭐 이래?”
그들의 눈앞에 가장 처음 나타난 대지의 정령의 스펙이 다음과 같았으니 말이다.
-상급 대지의 정령 라그루트 : Lv. 99(초월)
물론 무식한 위용을 뽐내는 정령의 앞에서 이안은 더욱 신났지만 말이다.
“대지 속성의 정령들로 가득한 필드라……. 블래스터의 힘을 빌려 볼 차례인가?”
강력한 바람 속성의 고유 능력들을 가진 폭풍의 정령 블래스터.
녀석을 소환한 이안은, 망설임 없이 대지의 정령을 향해 뛰어들었다.
* * *
타탁- 타타타탁-.
딸깍딸깍.
무미건조한 타자 소리와 함께 분주한 마우스 클릭 소리들만으로 가득한 기획1팀의 사무실.
마치 좀비들을 모아 놓고 일을 시키는 듯한 이 삭막한 공간에, 돌연 맑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링-띠로링-!
마치 어르신들의 알람음이 떠오를 만큼 놀랍도록 촌스럽고 또랑또랑한 소리.
그런데 이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
더욱 놀라운 일이 사무실 안에 일어났다.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타자 소리와 클릭 소리가 동시에 멈춰 버린 것이다.
이어서 사무실을 가득 메우는 것은 한이 어린 좀비들의 한숨 소리뿐.
“하아…….”
잠시 후 소리가 난 곳을 향해 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갔고, 1팀의 팀원들은 그 모습을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 알림음이 울려 퍼진 원인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이번 달 그들의 운명도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제발……. 생산 클래스 시나리오 오픈 같은 거겠지?”
“이를테면 요리 왕의 숨겨진 레시피 발견이라든가…….”
“김 대리, 그런 시나리오가 있기는 해요?”
“아뇨. 그냥 해 본 소리죠.”
“…….”
칙칙한 타자 소리 안에서 맑은 벨소리는 나름 신선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 공간 안에서 이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벨소리는 잠겨 있던 신규 시나리오가 오픈될 때만 울려 퍼지는 알림음이었고, 그것은 곧 일거리 폭탄이 배송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꿀꺽.
때문에 기획1팀의 직원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모두 한 곳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팀의 팀장 김의환이 데이터 로그를 확인할 때까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 아닐 거야. 그저께 알림음도 단순한 2티어 히든 클래스 오픈 메시지였잖아?”
“으, 오늘도 제발 무사히 지나가기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김의환을 지켜보던 팀원들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 로그를 까는 김의환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했으며, 로그를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별것 아닌 시나리오 오픈이었더라면 로그를 확인하는 데에도 1분 이상 걸리지 않았을 터.
그리고 좋지 않은 직감은 항상 맞아떨어지는 법이었다.
“이안 이 색…….”
“…….”
“이안이라고요?”
“팀장님, 잘못 보신 거 아니죠?”
“조금 있으면 로터스 기사대전 시작인데, 이안이라니요?”
팀원들의 다급한 질문에도, 김의환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가장 믿기지 않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김의환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이안, 이 미친놈은 대체 왜 기사대전 준비도 안 하는 건데?’
사실 기사대전 오픈의 조건이 충족된 열흘 전부터, 김의환과 기획1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기사대전이 오픈된 순간 상위 콘텐츠를 진행하던 대부분의 랭커들이 퀘스트 진행을 멈출 것이고, 그만큼 다음 콘텐츠 오픈 속도가 늦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는 타이밍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이번에도 이안은 모든 이들의 상식을 여지없이 부숴 버렸다.
“아마 이번 달 내로…….”
“……?”
“대지의 정령왕이 깨어날 거야.”
“예……?”
“잘못 들었습니다?”
폭탄 같은 김의환의 말이 떨어지자, 모든 팀원들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벨소리가 울린 순간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경우의 수 중에서도,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있음이 확정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얼굴색이 거의 잿빛이 되어 버린 두 사람.
“윤 대리, 김 주임.”
“팀장님…….”
그들을 향해 김의환은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번 달 연차…… 반납하도록.”
그렇게 기획1팀의 사무실에는 오늘도 재앙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