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5화 3. 심판자의 힘 (3) >
* * *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당황스러울 만한 이야기였으나, 이안은 진심이었다.
첫 경기인 32강에 직접 참전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 말이다.
‘참전하면 그날 하루는 거의 날려야 하는데,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지.’
물론 첫 번째 대진 상대로 타이탄 길드 이상의 상위급 길드가 걸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이번 기사대전은, 대중으로 하여금 카일란의 e스포츠 관심도를 더욱 높이기 위한 콘텐츠.
대진표가 짜여 지는 과정이 비공개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LB사에서는 분명 본인들의 의도대로 길드들을 배치할 것이었다.
‘전투력이 높아 보이는 길드들은 최대한 떼어놓으려고 하겠지. 가장 강력한 열 곳의 길드가 리그전에 들어가는 상황이, 기사대전의 흥행을 위해서는 베스트일 테니 말이야.’
대진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단순 예측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예상대로 될 것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이안.
그래서 이안은, 빙혼의 던전 공략파티로 구성된 세 사람을 데리고 곧장 비터스텔라로 다시 이동하였다.
삭풍의 절곡을 공략했던 세 사람에 비해 이번 파티의 전력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 성공적으로 최종 페이즈까지 정복하려면 정말 하드코어한 트레이닝이 필요할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져도 좋습니다.”
“…….”
“진짜 빡세게 굴릴 거니까요.”
“휴우…….”
하지만 이안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이 파티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가올 어두운(?) 미래에 한숨이 나올지언정, 절대로 신화등급의 속성세트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뭘, 얼마나. 어떻게 굴린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자고.”
쥬르칸의 패기 넘치는 말에 피올란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요, 뭐. 이안 님이랑 사냥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까짓 거 한 보름 죽었다고 생각하고 달려 보죠, 뭐.”
그리고 이 파티에서 의외로 가장 의욕을 보이는 인물은 카노엘이었다.
“걱정 말라고, 형. 이번엔 진짜 어떤 스케줄도 다 소화해 낼 자신이 있으니까.”
카노엘이 의욕적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최근 이안이 없는 동안 부기사단장을 맡아 기사단을 운영하는 동안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찰나였다.
‘물론 이안 형만큼 해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흉내는 내야지 않겠어?’
적어도 부기사단장이라면, 다른 기사단원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레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물론 이안 같은 규격 외의 유저가 아닌 이상 소환술사 클래스로 고레벨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카노엘은 최대한 노력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과거 그 누구보다 게임 이해도가 떨어지던 겜알못(?)에서, 지금의 랭킹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의욕적인 세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든 이안이,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최소 셋 다 초월 80레벨 찍기 전까지는, 빙혼의 던전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그, 그렇게나 높게?”
“나랑 피올란 님은 몰라도, 노엘이까지?”
카노엘과 쥬르칸의 반문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이것도 최소야. 내가 볼 때 세 사람으로 안전하게 클리어하려면, 평균 85레벨은 되어야 해.”
이안의 말에 카노엘은 마른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80레벨이면 몰라도 85레벨 언저리까지 찍는 데에는, 보름이라는 시간도 한참 부족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럼 기사대전은……?”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세 사람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우리 없어도 리그전까진 가겠지, 뭐.”
“아니 32강, 16강에 불참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야.”
“리그전 시작까지 길게 잡아도 20일일 텐데?”
세 사람의 우려 섞인 이야기를, 이안은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딱 보름이면 돼. 보름 안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앞으로 보름간 무한 사냥을 돌릴 생각에, 이안의 입꼬리가 히죽 말려 올라갔다.
* * *
빙혼의 던전 공략 파티로 결정된 세 사람을 데리고 이안이 도착한 최종 목적지는 다름 아닌 ‘마타야’ 산맥이었다.
비터스텔라에서 시계방향 순서대로, 정확히 세 번째 봉우리인 마타야 봉우리.
빙혼의 던전 입구가 ‘루판’ 봉우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안이 마타야 봉우리를 사냥터로 정한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 비타스텔라의 나머지 봉우리들에 비해 필드 캠프들 레벨대가 높은 편이기도 했으며, 사냥을 겸하여 보름 동안 이 마타야 봉우리를 샅샅이 뒤져 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분명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이안은 왜 네 개의 봉우리들 중 이곳 마타야를 수색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생각보다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것이었다.
‘마타야에만 속성 던전이 없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처음 이안은 용암에 이어 삭풍의 던전까지 발견했을 때, 당연히 사대 속성의 던전이 전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GM 철우로부터 얻어낸 던전 좌표들에는, 용암과 삭풍 그리고 빙혼까지.
총 세 개의 속성 던전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령계의 사대 속성 중 대지 속성의 던전만 없던 것.
물론 철우가 대지 속성의 던전만 숨겼을 리는 없고, 또 사대 속성 던전이 전부 있어야 할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분명히 어떤 대지속성과 관련된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뭐, 내 짐작이 틀렸더라도, 딱히 손해 볼 건 없으니까.’
하여 마타야 산맥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안과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하였다.
“자, 지금부터 점심까진 쉬는 시간 없다.”
이안의 말에, 바로 옆에 있던 피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뭐, 그 정도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아래쪽에 보이는 오염된 정령 캠프부터 빠르게 돌고 이동하자고.”
말을 마친 순간, 곧바로 전방을 향해 도약하는 이안.
그런 그를 향해, 카노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소환은 하고 시작해야지?”
하지만 그 당연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소환수한테 경험치 분산되면, 렙 업 속도 느려져서 안 돼.”
“아……?”
“너도 주력 소환수 두엇 빼고는 다 넣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뭐.”
사실 이안은 지금, 소환수들을 소환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미리 소환해둔 소환수들은 아예 다른 필드로 보내 따로 사냥을 굴리고 있었을 뿐.
감당 불가능한 고난도의 사냥터나 던전을 공략할 때를 제외하고, 이안은 항상 이런 방식으로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이렇게 높은 레벨대까지 이안이 랭킹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소환술사 자체 전투력만으로 강력해야 가능한 방식이지만…….’
이안은 씨익 웃으며 심판 검 한 자루를 빼어 들었다.
그가 꺼내 든 심판 검은 바로 악마의 심판 검.
이런 일반 필드를 클리어할 때에는, 파괴력 좋은 무기가 장땡이인 법이었다.
“잠깐, 이안, 그래도 일단 내가 어그로는 다 먹어 놓고 시작하는 게……?”
기사 클래스인 쥬르칸이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뒤따라오며 외쳤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위이잉-!
이안의 등 뒤로, 나머지 두 자루의 심판검이 떠올랐다.
-고유 능력 ‘바이탈리티 웨폰’이 발동합니다.
-‘신화(초월)’ 등급의 무기, ‘성령의 심판 검’에 생명을 부여하였습니다.
-‘신화(초월)’ 등급의 무기, ‘심연의 심판 검’에 생명을 부여하였습니다.
이어서 바이탈리티 웨폰과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서머너 나이트의 고유 능력.
서먼 인카네이션이 발동되었다.
-고유 능력 ‘서먼 인카네이션’이 발동합니다.
-‘이안’ 유저의 분신이 생성됩니다.
-‘이안’ 유저의 분신이 생성됩니다.
-‘이안’ 유저의 분신이 생성됩니다.
스르륵-!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미친……!”
이안의 원맨쇼가 시작되었다.
“삼위일체……!”
-악마의 심판 검의 고유 능력 ‘삼위일체’가 발동합니다(지속 시간 : 30초).
-이제부터 심판 검으로 적에게 입히는 모든 피해가 5%만큼 충전됩니다.
-모든 심판 검의 속성이 ‘데몬’ 속성으로 전환됩니다.
세 자루의 심판 검이 모임과 동시에, 모든 심판 검에 공통으로 생긴 고유 능력인 삼위일체.
삼위일체가 발동하자, 전장에 떠 있는 세 자루, 아니 열두 자루의 심판 검들이 동시에 까맣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우우웅-!
셋의 분신들 덕에 만들어진 심판 검의 환영들에도 같은 효과가 부여된 것이다.
‘역시, 분신으로 만들어진 모든 심판 검에도 같은 효과가 연계되는 거였어.’
이어서 여기까지 확인한 이안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씨익 웃었다.
삼위일체의 효과가 분신에도 적용됐다는 것은, 분신들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까지 전부 다 충전된다는 것이었고…….
-삼위일체의 ‘충전’ 효과가 발동합니다.
-27,809만큼의 피해량이 충전됩니다.
-삼위일체의 ‘충전’ 효과가 발동합니다.
-52,113만큼의 피해량이 충전됩니다.
-삼위일체의 ‘충전’ 효과가…….
……후략……
그렇다면 삼위일체가 유지되는 30초의 시간 동안,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충전량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몬스터가 널려 있는 사냥터에서라면, 더더욱 그렇지.’
-캬아아오오!
-괴, 괴물 같은 인간이다!
그리고 오염된 정령들과 기계몬스터들이 혼비백산하고 있는 사이.
쿠쿵-!
-지속 시간이 종료되어, ‘삼위일체’의 효과가 해지됩니다.
-현재까지 충전량 : 14,892,532
30초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버렸고, 그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의 신형이 몬스터들의 한복판으로 쇄도하였다.
“자, 이번엔 제법 아플 거야.”
이어서 다음 순간…….
-‘심판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지금까지 충전된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여 심판의 번개를 소환합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위력을 가진 거대한 번개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콰쾅- 콰콰쾅-!
-오염된 괴수 ‘케이탈’의 생명력이 10,789,912만큼 감소합니다.
-‘케이탈’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오염된 정령 ‘마그로프’의 생명력이 11,980,921만큼 감소합니다.
-‘마그로프’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후략……
물론 몬스터마다 가지고 있는 저항력과 대미지 감소 스텟 탓에 1,500만이라는 충전량이 그대로 꽂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만 단위의 위력을 보여 주는 심판의 번개.
치직- 치지직-!
번개가 떨어져 내린 자리에는 당연히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심판의 번개로 적을 처치하여, ‘심판 검’이 가진 모든 액티브 고유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30%만큼 회복됩니다.
-심판의 번개로 적을 처치하여, ‘심판 검’이 가진 모든 고유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그리고 그 덕에 삼위일체 고유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괴, 괴물!”
그리하여 소환수 하나 소환하지 않은 이안이 초월 90레벨대의 캠프 하나를 쓸어 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분에 불과한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