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9화 1. 다시 만난 심연의 군주 (3) >
* * *
나태의 심연을 클리어하고 나온 두 사람은 생각지 못했던 선택지를 얻게 되었다.
-나태의 심연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군주의 방’으로 이동할 자격이 생겼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Y/N)
-군주의 방으로 이동하지 않을 시 남은 두 곳의 심연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심연을 클리어함으로 인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음에도, 다른 심연의 방에 도전하겠냐는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아마 열쇠가 남아 있어서겠지.’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안의 답은 당연히 ‘No’였다.
당장 군주의 방으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남은 심연의 방을 전부 클리어하고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보상을 챙길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본능.
“아니, 다음 심연의 방에 도전할 거야.”
나태의 심연을 너무도 손쉽게 클리어한 이안의 입장에선,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릴슨 또한 이견 없이 같은 생각이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곧바로 ‘혼돈의 심연’에 도전하였다.
“좋아, 이대로 다 깨 버리자고.”
“열쇠가 아직 다섯 개나 남아 있는데, 남은 방들을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지.”
그리하여 의욕 넘치는 분위기 속에 나머지 두 개의 방에 차례로 도전한 두 사람.
“루가릭스, 카르세우스, 좌측 커버하고 있어!”
-알겠다, 주인.
“라카도르는 릴슨 형 좀 지켜 주고, 나머지는 전방으로!”
-그러도록 하지.
“릴슨 형은 미니 맵 계속 체크해 주고!”
“오케이!”
그들은 파죽지세로 두 번째 혼돈의 심연까지 클리어했으며…….
띠링-!
-‘혼돈의 심연’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였습니다!
-클리어 타임 : 00:19:51
-클리어 등급 : SSS+
-‘심연의 어둠’ 아이템을 열 개 획득하였습니다.
-한계 이상의 등급을 달성하여, ‘심연의 어둠’을 추가로…….
……후략……
역시나 이번에도 군주의 방으로 이동을 거부하였다.
혼돈의 심연은 나태의 심연보다도 더 빠르게 클리어하였으니, 자신감이 더욱 불타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전한 마지막 관문 ‘환영의 심연’은 두 사람의 기대와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제법 애를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던전의 특성을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었던 나태, 혼돈과는 달리 환영의 심연은 끝없는 미로의 연속이었다.
아마 길 찾기에 도가 튼 릴슨이 없었더라면 하루 종일 심연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를 수준으로, 무척이나 난해한 관문이 환영의 심연이었던 것이다.
“후우, 드디어 종점인가?”
“이번엔 맞겠지 형?”
“아마 맞을 거야. 마지막 갈림길에서 심연의 표식을 분명히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릴슨의 활약에 힘입어, 두 사람은 대략 5시간 만에 환영의 심연까지 성공적으로 정복할 수 있었다.
띠링-!
-종착지에 도착했습니다!
-표식을 전부 회수합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환영의 심연’을 성공적으로 클리어 하였습니다!
-클리어 타임 : 04:52:21
-클리어 등급 : A-
-‘심연의 어둠’ 아이템을 열 개 획득하였습니다.
-준수한 등급을 달성하여 ‘심연의 어둠’을 추가로 다섯 개 획득합니다.
-모든 심연의 방을 정복하셨습니다!
트리플 S등급을 받은 나태, 혼돈의 심연에 비교하면 클리어등급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
“크, 마지막에 한 건 해 주네. 역시 릴슨갓.”
“그거, 나 놀리는 거 아니지?”
“놀리다니! 형이 없었으면 난 아직도 미로 어딘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거라고.”
이안은 눈부신 활약을 보여 준 릴슨을 추켜세웠지만, 그에 릴슨은 살짝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말처럼 길을 잘 찾은 것은 릴슨의 공이 컸으나, 사실 따지고 보면 마지막 관문에서도 캐리한 것은 이안이었으니 말이다.
길을 아무리 잘 찾아도 표식을 지키는 심연의 괴수를 처치하지 못하면 클리어 할 수 없는 관문이었는데, 그들은 릴슨 혼자서는 절대로 처치 불가능한 녀석들이었으니까.
“뭐,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한데…….”
때문에 이안의 칭찬을 듣는 릴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이안의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칭찬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그간 이안의 진면목(?)을 너무 많이 봐 온 릴슨이었다.
‘이렇게 띄워 주고 또 날 부려먹으려고 할지도 몰라.’
릴슨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 심연의 유적만 클리어하고 나면 한동안 이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물론 이안의 옆에서 어마어마한 이득과 경험치를 얻었지만, 그것도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는 것.
이대로 이안의 뒤를 따라다니다가는, 게임하다가 과로사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것이 릴슨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다음 순간 다시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 어쨌든 이제 모든 심연을 클리어했으니, 유물을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건가?”
“크, 여긴 또 어떤 유물이 있으려나. 이번엔 나도 토큰이 제법 많은데.”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토큰의 개수를 확인한 순간, 릴슨의 이성은 다시 마비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캬, 이게 몇 개야? 이번에는 나도 신화 등급 유물 몇 개 쟁여갈 수 있겠는데?’
이안의 경우 던전 내에서 드롭된 토큰까지 합하면 무려 이백 개가 넘는 토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릴슨의 경우에도 거의 80개에 육박하는 토큰을 획득하였던 것.
추가토큰이야 공헌도에 비례하여 지급되기 때문에 이안만큼 얻지 못하였지만, 기본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토큰에 세 심연의 방을 전부 클리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양의 토큰이 모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성령이나 악령에서의 관문과 달리, 애초에 이 심연의 방은 셋 중 하나만 클리어해도 되는 관문이었으니까.
우우웅-!
커다란 공명음이 울리며, 환영의 심연 종착지의 포털이 두 사람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곳은, 지금까지 그들이 본 적 없는 새로운 환경이었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군주의 방’으로 이동합니다.
-심연의 열쇠가 3개 남았으므로, 모든 도전자에게 각각 15개의 ‘심연의 어둠’이 주어집니다.
이제 모든 관문이 클리어되었으니, 선택지 없이 곧바로 군주의 방으로 이동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은 열쇠들이 토큰으로 반환된 것은, 소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군주의 방이라……. 여기가 유물이 있는 곳인가? 아니면 새로운 관문이 또 기다리고 있는 건가?’
이안은 새로운 환경에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군주의 방은 원뿔 모양의 거대한 곳이었고,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로 텅 빈 공간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축구장만 한 넓이의 원형 공터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로고 뾰족하고 높게 솟은 천정 때문인지, 뭔가 성스러운 느낌이 나기까지 하였다.
‘유물들이 배열되는 데 이렇게까지 큰 공간이 필요한가? 그게 아니라면 역시…….’
포탈을 타고 넘어온 뒤 그 짧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는 이안.
그런 그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모든 도전자가 입장하였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연의 군주가 깨어납니다.
구궁- 구구궁-!
그리고 그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순간적으로 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심연의 군주라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
심연의 군주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무척 낯익었으니 말이다.
분명히 오래된 기억 속 어딘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 이름.
그러나 이안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고막을 가득 메울 만큼 거대한 굉음과 함께, 원형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하였으며…….
우우웅-!
그와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거대한 소환진이었으니 말이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이안과 릴슨.
“이게 뭐야?”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안, 저, 저기……!”
거대한 원형의 소환진 안에서는, 그 크기만큼 거대한 심연의 그림자가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으니까.
* * *
-유적의 주인. ‘심연의 군주’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됩니다.
거대하다.
이 단어로 전부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몸집을 자랑하는, 고대의 골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감으로 충만하던 이안마저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크기만 거대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심연의 군주(신화)(초월) / Lv : 135(초월)
‘135레벨이라고? 갑자기 레벨 점프가 너무 심한 거 아냐?’
135라는 녀석의 레벨을 확인한 이안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렸다.
물론 동력장치를 활용해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들도 쓸어 담은 전력이 있는 그였지만, 그것과 이것은 경우가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녀석은 신화 등급의 보스 몬스터였고, 동력장치 따위로 뻥튀기된 가짜가 아닌 진짜배기 135레벨 몬스터였다.
아마 일반 등급의 필드 몬스터가 이 녀석에게 스텟으로 비벼 보려면, 250레벨은 훌쩍 넘어야 가능할 터.
‘으음, 진짜로 긴장해야겠는데.’
이안은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소환수들과 장비 상태를 빠르게 점검한 후 거대한 ‘심연의 군주’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안과 ‘심연의 군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기다리고 있었다, 도전자여.
“……!”
-과거에도, 오늘도 그대들은 내게 놀라움을 선사하는군.
“그게 무슨 말……?”
생각지도 못했던 녀석의 대사에, 순간 굳어 버린 이안과 릴슨.
‘우리를 안다고?’
‘둘 중에 하나도 아니고, 둘 다 알아?’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동공은 동시에 확대되었다.
드디어 이 알 수 없는 낯익음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때 그 녀석?”
뿍뿍이를 귀룡으로 진화시키기 위해, 릴슨과 함께 ‘심연의 인장’을 구하던 시절.
‘심연의 비동’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보스의 이름이 바로 ‘심연의 군주’였다는 사실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거대한데…….”
하여 이안은, 녀석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녀석을 관찰할수록, 그때의 그 녀석과 외형이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덩치야 그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했지만, 녀석은 확실히 그때 그 ‘심연의 군주’가 맞았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 그때도 릴슨 형과 함께였는데, 이번에도 릴슨 형이랑 같이 만나다니.’
심연의 군주를 올려다보는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하고 말려 올라갔다.
어쩐지 이곳에서 기대 이상으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