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8화 1. 다시 만난 심연의 군주 (2) >
* * *
이안 일행이 가장 먼저 트라이한 심연인 ‘나태의 심연’.
이곳은 ‘나태’라는 그 이름과 정반대로, 무척이나 부지런해야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이었다.
던전의 구조 자체가 한시도 쉴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띠링-!
-‘나태의 심연’이 어둠 속에서 깨어납니다.
-심연의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연의 안개에 갇히는 순간 도전에 실패하게 됩니다.
-밀려드는 심연의 안개보다 더 빠르게 던전을 돌파하여, 안개의 근원인 심연의 마석을 파괴하십시오.
-시간이 1분 지날 때마다 심연의 안개가 차오르는 속도가 15퍼센트만큼씩 증가합니다.
-유저가 전투에서 벗어나면, 안개가 차오르는 속도가 추가로 100퍼센트만큼 빨라집니다.
메시지를 전부 확인한 릴슨이, 인상을 확 구기며 투덜거렸다.
“젠장, 잠깐도 쉬지 말라는 거네.”
물론 이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문제야?”
“……?”
“어차피 쉴 생각 같은 건 없었는데?”
“하아…….”
여느 때처럼 릴슨에게 한차례 정신 공격을 가한 이안은 곧바로 전방을 향해 뛰어 나갔다.
타탓-!
카일란에서 ‘비전투 상태’ 판정의 기준은 5초 이상 아무런 피해를 입지도 입히지도 않은 상태를 의미했으니 본격적으로 안개가 피어오르기 전에 적에게 달려들어야만 했다.
스르릉- 척-!
이어서 빠르게 소환수들을 소환한 이안이 심판 검을 뽑아들며 아이언의 등에 올라탔다.
-‘악령의 심판 검’을 착용하였습니다.
-‘악마의 낙인’ 패시브가 활성화됩니다.
-무기의 고유 속성으로 인해 모든 일반 공격에 ‘데몬Demon’ 속성이 부여됩니다.
……후략……
이안이 뽑아 든 심판 검은 당연히 악령의 심판 검이었다.
악마의 심판 검, 혹은 악령의 심판 검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악마의 유산이자 고대의 유물.
악마의 힘은 심연 속성을 가진 대상에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니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안이 악마의 심판 검을 뽑아 든 이유가 단지 그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연의 전당에 도전할 때는 보지 못했던, 사기적인 액티브가 하나 있었으니까.’
성령의 유적, 심연의 전당에 도전할 때 일시적으로 생성되었던 악마의 심판 검에는, 총 두 개의 고유 능력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건부로 대상의 방어력을 무시할 수 있는 악마의 낙인 패시브와, 치명타시 데몬 속성의 추가 고정 피해를 입히는 악마의 불길 고유 능력이 바로 그것.
물론 이 두 가지 능력만 해도 심판 검의 가치는 충분했지만, 새로 생성된 이 마지막 액티브가 바로 이 심판 검의 매커니즘을 완성하는 화룡점정과도 같은 능력이었다.
테크니컬한 플레이를 요구하는 고난도의 고유 능력이기에, 더욱 이안의 마음에 든 이 액티브 스킬.
그것은 바로, ‘지옥의 칼날’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 능력이었다.
*지옥의 칼날 (액티브)
(재사용 대기 시간 : 25초)
시전자의 공격 속도를 순간적으로 350퍼센트만큼 증가시키며, 방어 관통 능력을 30퍼센트만큼 부여합니다.
해당 효과는 시전자의 ‘일반 공격’이 4회 적중되거나 발동 후 3초가 지날 때까지 유지되며,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적을 처치한다면 ‘지옥의 칼날’ 재사용 대기 시간이 10초만큼 감소합니다.
*악마의 낙인이 각인된 대상에게 ‘지옥의 칼날’ 피해를 입힐 시 추가로 치명타 확률이 10퍼센트, 치명타 피해가 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악마의 낙인이 3회 이상 중첩된 대상에게 ‘지옥의 칼날’ 피해를 입힐 시 해당 공격의 위력이 300퍼센트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악마의 낙인이 3회 이상 중첩된 대상을 ‘지옥의 칼날’로 처치한다면, 재사용 대기 시간이 10초만큼 추가로 감소합니다.
(악마의 심판 검으로 공격 시에만 적용)
사실 그저 고유 능력의 정보만 읽어 보았을 때에는, 이 능력이 왜 테크니컬한 플레이를 요구한다고 하는지 감이 잘 안 올 수도 있다.
단순히 일반 공격 4타에 한해 공격 속도와 위력을 증가시켜 주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본다면, 그저 네 대 빠르고 세게 때릴 수 있게 해 주는(?) 스킬에 불과한 것.
그러나 이 능력이 ‘악마의 낙인’과 결합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악마의 낙인 (패시브)
적의 공격을 회피한 직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시, 피격된 대상에게 ‘악마의 낙인’이 각인됩니다.
‘악마의 낙인’은 5초 동안 지속되며, 낙인이 각인된 대상은 ‘데몬’ 속성의 공격에 한해 350퍼센트만큼 증폭된 피해를 입습니다.
‘악마의 낙인’은 최대 3회까지 중첩되며, 낙인이 3회 중첩된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시 해당 공격은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악마의 심판 검으로 공격 시에만 적용)
‘지옥의 칼날 선 3타에 낙인 3중첩을 완성하고, 마지막 4타까지 깔끔하게 집어넣어야 해. 이거면 어지간한 퓨어 탱커 아니고서는 무조건 터질 수밖에 없을 거야.’
악마의 낙인 패시브를 터뜨리는 것만 하더라도, 사실 무척이나 높은 난이도를 요구한다.
적의 공격은 회피하면서 대상의 약점을 정확히 가격하여 3연속 치명타를 터뜨려야 하니 당연히 쉬울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옥의 칼날 패시브까지 완벽히 결합하려면, 3세 배 반이나 빨라진 공격 속도를 다 활용하면서 3초 내로 모든 인장 중첩을 쌓고 4타까지 터뜨려야만 한다.
사실상 서 있는 허수아비를 상대로 완벽한 콤보를 발동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난이도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게임은 어려워야 재미있지.”
탓-!
아이언의 등을 박차고 도약한 이안이 전방에 나타난 심연의 괴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잠시 후 ‘탑승’ 상태가 해제됩니다.
-소환수 ‘아이언’의 ‘일체화’ 고유 능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탑승 해체 판정이 떨어지면, 일체화로 인해 뻥튀기된 스텟들이 사라진다.
하지만 지옥의 칼날을 제대로 터뜨린다면, 고유 능력이 해제되기 전에 몬스터의 목을 따고 복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였다.
대상이 무려 초월 90레벨의, ‘영웅’ 등급 몬스터라 할지라도 말이다.
-크롸아아아-!
기괴한 ‘나무 인간’과 같은 생김새를 가진 심연의 괴수들이, 이안을 향해 팔을 쭉 하고 뻗었다.
대충 봐도 무척이나 튼튼해 보이는 탱킹형 몬스터들.
그 사이로 순식간에 파고든 이안이 머릿속에 있던 플레이를 펼쳐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옥의 칼날’ 고유 능력이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공격 속도가 3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일시적으로 방어 관통 능력이 3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지옥의 칼날이 발동됨과 동시에 자잘한 메시지들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그것들은 머릿속에 다 각인되어 있는 터.
이안은 메시지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현란한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하였다.
촤르륵- 촤촥-!
이미 진입하는 순간 ‘회피’ 판정을 받았기에, 거침없이 몬스터들을 난도질하는 이안!
-‘심연의 괴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심연의 괴수’ 에게 ‘악마의 낙인’이 각인되었습니다!
-……‘악마의 낙인’이 각인되었습니다!
-‘악마의 낙인’이 3회 중첩되었습니다.
콰콰쾅-!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심연의 괴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치명타 피해량이 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지옥의 칼날’ 고유 능력의 위력이, 300퍼센트만큼 증폭됩니다.
-키에에엑-!
이안은 그야말로 완벽한 움직임을 보이며, 순식간에 괴수들을 종잇장처럼 찢어 버렸다.
평범한 80레벨대 딜러였다면 최소 5분 이상 딜을 넣어야 했을 탱킹형 괴수를, ‘지옥의 칼날’ 고유 능력이 지속되는 3초 안에 삭제해 버린 것이다.
퍼엉-!
-‘심연의 괴수’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심연의 어둠’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초월 레벨에 대한 개념이 없는 평범한 유저가 봤더라면, 일반 필드에 등장하는 잡몹을 처치한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상황.
이제 이안이 무슨 짓을 벌여도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한 릴슨이지만 그 다짐은 또 한 번 깨질 수밖에 없었다.
‘저거 딱 봐도 피통 미쳤는데…….’
당황으로 인해 잠시 굳어 버렸던 릴슨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후방에서 밀려오고 있을 심연의 안개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뒤 릴슨은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 했다.
‘원래의 기획대로라면, 밀려드는 심연의 안개 때문에 똥줄을 태우면서 저 괴수들을 겨우겨우 잡아야 했을 텐데…….’
도전자가 나태하지 못하도록(?) 위협적으로 밀려 들어와야 할 심연의 안개는, 아직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초반이라 그런 거라기엔…….”
이어서 두 번째 괴수까지 순식간에 제거해 버린 이안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릴슨을 다그쳤다.
“형, 거기서 뭐 해?”
“으응?”
“형이 멍 때리면 안개가 빨리 차잖아!”
“어차피 시간은 남을 것 같…….”
“시끄럽고 빨리 아이언 등에 타.”
릴슨을 납치하듯 확 잡아끌어 아이언의 등에 태운 이안은 또다시 빠르게 전방을 향해 이동하였다.
심연의 안개 같은 것이 언제 뒤에서 나타날지 하는 것은 이안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안개와 상관없이, 던전의 끝을 볼 때까지 이안은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쐐액-!
촤촤촥-!
그리고 첫 번째 페이즈가 넘어간 이후 이안은 더욱 신이 나서 날뛰고 있었다.
탱킹 능력이 약한 몬스터들이 나타나자, 지옥의 칼날 4타가 전부 끝나기도 전에 두엇씩 목을 따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2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크워어어, 이렇게 강력한 중간자가 존재한다니!
일반 괴수들의 너댓 배는 될 법한 거대한 심연의 괴수를 쓰러뜨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안 일행은 ‘나태의 심연’을 깔끔히 클리어할 수 있었다.
물론 심연의 안개는, 코빼기조차 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띠링-!
-‘태고의 괴수’를 처치하셨습니다!
-‘나태의 심연’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였습니다!
-클리어 타임 : 00 : 23 : 17
-클리어 등급 : SSS+
-‘심연의 어둠’ 아이템을 10개 획득하였습니다.
-한계 이상의 등급을 달성하여 ‘심연의 어둠’을 추가로 30개 획득합니다.
-특수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나태를 극복한 자’ 칭호를 획득합니다.
-이제부터 영구적으로, 모든 이동 방해 상태 이상에 대한 면역력이 3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그리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해맑게 웃는 이안.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쉬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릴슨은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쉬운 거냐, 네가 센 거냐?”
그리고 그 질문에, 이안은 씨익 웃으며 간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