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6화 7. 세이카의 심연 (3) >
* * *
이안이 얻은 두 번째 실마리는 겉으로 볼 땐 복잡해 보여도 사실 간단한 것이었다.
스물다섯 칸 퍼즐 판의 각 칸마다, 어떤 종족의 성판을 끼워야 하는지 보여 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낸 실마리는 이안의 사고의 흐름을 한층 더 정답에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같은 종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도 여러 개의 성판들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어차피 뒤집지만 않으면 픽스는 아니니까, 일단 알아낸 종족 정보를 토대로 배열해 보자.’
스물다섯 개의 성판을 전부 퍼즐판에 가져온 이안은, 각 숫자 위에 해당 종족의 성판을 차례로 올려놓았다.
이제 같은 종족 안에서만 알맞은 위치를 찾아내면 이 퍼즐은 완성되는 것이다.
스르륵- 철컥.
금속으로 만들어진 성판을 하나하나 끼워 넣을 때마다 아귀가 맞아떨어지며 울려 퍼지는 기분 좋은 금속음.
차라락-!
그런데 이안이 모든 성판을 올려놓은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시스템 메시지가 한 번 더 떠올랐다.
띠링-!
또다시 힌트가 생성된 것이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마지막 힌트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이안이 퍼즐판 위에 올려 둔 성판들이 오색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종족별로 각기 다른 색상으로 빛난다는 것이었다.
‘아하, 종족 코드를 알아내서 배열하는 게 이 마지막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이었나?’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였다.
힌트가 없더라도 아직 추론해 볼 여지는 많이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힌트를 마다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앞에 황금빛 문구가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스물다섯 마리의 소환수들 중 가장 조화로운 소환수는 어비스 터틀이다.
-같은 열, 같은 행에 있는 성판들은 서로에게 기운을 나눠줄 수 있다.
-모든 열과 모든 행의 소환수가 조화로울 때, 고대 심연의 힘이 완성된다.
역시나 선문답 같은 힌트에 이안의 옆에 있던 뿍뿍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뿍?”
그리고 글귀를 한 번씩 꼼꼼히 살핀 이안은 뿍뿍이를 향해 물어보았다.
“야, 네가 가장 조화로운 소환수래.”
“역시 나는 대단하다뿍.”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뭘 말이냐뿍?”
“아니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무시하지 마라뿍.”
“…….”
“내가 저기서 제일 세다는 거 아니냐뿍.”
“시끄러.”
괜히 뿍뿍이에게 말을 걸어서, 머릿속이 더 혼탁해진(?) 이안.
황금빛 글귀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갔지만, 이미 머릿속에 그 내용을 각인시킨 이안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가장 조화로운 소환수가 어비스 터틀이라……. 어비스 터틀의 넘버는 26번인데.’
26번은 성판에 새겨진 소환수들의 일련번호들 중 정확히 중간 값을 가지는 번호였다.
가장 앞 번호인 털갈기 늑대의 2번과 가장 뒤 번호인 할리칸의 50번을 더하여 둘로 나누면, 정확히 26이었으니 말이다.
‘조화라는 건 아무래도 번호의 평균을 얘기하는 것 같고. 기운을 나눠줄 수 있다는 말은 뭘까?’
같은 열과 행에 있는 소환수들은, 서로에게 기운을 나눠줄 수 있으며, 그리하여 모든 소환수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위치에 배열되었을 때 퍼즐은 완성된다.
그리고 여기까지 머리를 굴리던 이안은, 다시 두 눈을 번쩍 떴다.
거짓말처럼 해당 글귀들이 머릿속에서 숫자로 치환되며, 퍼즐이 풀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각 소환수들이 가지고 있는 일련번호를 같은 열이나 행의 소환수들에게 나눠 줬을 때. 해당 행렬의 모든 수가 26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야.’
같은 줄에 있는 모든 숫자의 평균이 26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모든 수의 합이 130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행렬에는 다섯 개의 성판이 속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퍼즐은 풀렸다고 할 수 있었다.
“방진을 완성하라더니 결국 마방진이었네.”
이안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릴슨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마방진? 뭘 좀 알아내기라도 한 거야 이안?”
릴슨의 그 물음에, 이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좀 알아낸 정도가 아니고, 해답을 찾았어.”
“뭐? 뭘 찾았다고? 해답?”
“응.”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래.”
릴슨에게 간결하게 대답한 이안은, 성큼성큼 퍼즐 판 앞으로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성판들의 위치를 거침없이 옮기기 시작하였다.
“자, 털갈기 늑대. 네 자리는 여기다.”
스륵- 철컹-!
맨 위 열의 정중앙 1번 자리에, 거침없이 털갈기 늑대의 성판을 배치하여 뒤집어 버리는 이안.
띠링-!
-첫 번째 성판을 배치하셨습니다.
-옳은 위치에 성판이 배열되었습니다.
-심연의 힘이 미약하게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릴슨은, 당황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내가 못 본 사이에 무슨 다른 힌트라도 얻은 거야?”
“그건 아닐걸?”
“이상한 숫자에 선문답 같은 황금색 글귀 말고 또 다른 힌트가 있었던 건 아니지?”
“그거 두 개가 답이었어.”
“후, 이해하려고 한 내 잘못이지…….”
이안이 뭔가를 계속 기록하고 메모하는 동안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긴 하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릴슨은 분명 같은 자리에서 계속 퍼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 릴슨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인 것이다.
“그래.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구경이나 하라고. 시험은 이미 끝났으니까.”
띠링-!
-두 번째 성판을 배치하셨습니다.
-옳은 위치에 성판이 배열되었습니다.
-심연의 힘이 조금 더 깨어납니다.
……중략……
-다섯 번째 성판을 배치하셨습니다.
-옳은 위치에 성판이 배열되었습니다.
-성판에 사나운 ‘늑대’의 힘이 깨어납니다!
-첫 번째 심연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다섯 개였던 늑대 종족의 성판부터 차례대로 전부 배열한 이안.
배열된 성판 위의 문양에서는 붉은 빛이 넘실거리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보는 이안의 입 꼬리도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거 재밌네. 역시 퍼즐은 이런 맛이지.”
“…….”
“단순한 조각 맞추기 따위랑은 비교할 수도 없는 짜릿함이군.”
“너만 그렇게 생각할걸.”
릴슨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퍼즐 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물다섯 개의 조각 중 다섯 피스가 맞춰졌음에도, 그는 아직 감조차 잡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 절반 정도 맞춰지면 나도 이해가 되려나?’
뭔가 한없는 소외감이 느껴진 탓인지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는 릴슨.
하지만 더욱 슬픈 것은 모든 퍼즐이 완성된 뒤에도 릴슨이 이해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늑대 다음은 개, 그 다음은 여우…….”
늑대 종족의 성판을 전부 완성한 뒤에는 더욱더 일사천리였다.
개 종족과 여우 종족 성판의 숫자가 세 개밖에 되지 않았던 데다,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질 때마다 빈 칸의 숫자는 줄어드니 방진의 숫자들을 머릿속으로 계산하기가 더욱 쉬워진 것이다.
-성판에 강인한 ‘개’의 힘이 깨어납니다!
-두 번째 심연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성판에 지혜로운 ‘여우’의 힘이 깨어납니다!
-세 번째 심연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성판에 조화로운 ‘거북’의 힘이 깨어납니다!
……후략……
각기 다른 아름다운 빛깔을 뿜어내며, 퍼즐 판에 제 자리를 찾은 금속의 성판들.
그렇게 이안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모든 성판을 배열할 수 있었고, 결국 퍼즐 판은 깔끔히 완성되었다.
-성판에 광포한 ‘드래곤’의 힘이 깨어납니다!
-다섯 번째 심연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성판에 용맹한 ‘호랑이’의 힘이 깨어납니다!
-마지막 심연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우우웅-!
모든 성판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무색無色이었던 금속 성판들의 색상이 더욱 화려한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성판들 사이사이를 나누고 있던 이격離隔들이 스르륵 메워졌고, 이내 스물다섯 개였던 성판은 하나의 거대한 사각 판이 되었다.
“오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 릴슨.
반면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 이제 열려라!”
그리고 이안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눈앞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하고 떠올랐다.
띠링-!
-고대 심연의 성판이 완성되었습니다.
-잠들어 있던 세이카의 심연이 깨어납니다.
-‘세이카의 심연 진입 (히든)(돌발)’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클리어 등급 : SSS+
-역대의 도전자들 중, 가장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셨습니다!
-‘심연의 어둠’ 아이템을 20개 획득하셨습니다.
-‘심연의 어둠’ 아이템을 추가로 10개 획득하셨습니다.
-모든 ‘심연의 방’에서 ‘어둠’이 드롭될 확률이 2배로 증가합니다.
-‘세이카의 심연’에 입장할 자격을 부여받으셨습니다!
……후략……
주르륵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을 한 줄 한 줄 확인할 때마다 이안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심연의 어둠’이 어떤 용도로 쓰는 아이템인지는 예상 가능하였고, 대충 봐도 그것이 쏟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크으! 심연의 심판검이 눈앞에 보이는구나!’
악령의 심판 검과 성령의 심판 검을 각각 양손에 쥔 이안이, 사랑스런 눈빛으로 검신을 훑어보았다.
‘에고 웨폰’이 아닌 관계로 삼도류(?)가 될 수는 없었지만, 봉인된 심판 검의 능력이 오픈된 뒤 하나씩 스왑하며 사용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뽑아낼 수 있을 터였다.
‘심판 검 중 하나만 에고 소드였어도 바이탈리티 웨폰Vitality Weapon 써서 삼도류 완성인데, 아까비!’
그리고 이안이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 있는 동안, 두 사람의 앞으로 커다란 교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심연과도 같은 어둠이 걷히면서 마탑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입구까지 다리가 이어진 것이다.
하여 상념을 끝낸 이안은, 마지막으로 상태를 한번 점검하였다.
‘심연의 방에서 드랍률이 올랐다고 했으니, 이제부터 다시 전투의 시작이겠지.’
유적에 도달하기까지의 관문들은 이제 ‘전투’인 것 같았으니, 소환수들과 장비들의 상태를 한번 빠르게 점검한 것이었다.
저벅저벅.
이어서 탑의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띠링-!
그렇게 나지찬의 야심작은, 또 한 번 이안의 발목을 잡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세이카의 심연’에 입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의 작은 절규가 기획 1팀의 모니터링실에 울려 퍼졌다.
“일부러 소환술사를 제일 어렵게 만든 거였는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