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5화 7. 세이카의 심연 (2) >
* * *
‘규칙성! 규칙성을 찾아내야 해.’
다섯 개의 열과 다섯 개의 행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형 모양의 퍼즐 판.
그리고 그 위에 채워 넣어야 하는 스물다섯 개의 사각 모양 금속판들.
모양이야 어느 위치에 끼워 넣어도 꼭 들어맞는 똑같은 정사각형 형태의 퍼즐이었으나, 아무 위치에나 배치한다고 퍼즐이 완성될 리는 없었다.
주어진 정보들을 토대로 어떤 규칙성을 찾아, 각자 정해진 위치에 성판을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만 놓고 봤을 때, 이 퍼즐은 특별히 별난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정보들을 토대로 규칙에 맞게 배열하는 퍼즐은, 생각보다 흔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 ‘정보’라는 것이 너무 제한적이고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안에게 주어진 정보는 각각의 성판에 새겨진 소환수의 아이콘들 뿐이었으니 사실 이안이 아닌 다른 유저였다면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성판을 집어던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소환수 아이콘들만으로 대체 뭘 하라는 것인지 감조차 잡지 못했을 테니까.
슥슥.
품속에서 종종 사용하던 양피지 노트를 꺼낸 이안이 아는 정보들을 있는 대로 나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모양을 옆에서 지켜보던 릴슨은 점점 질린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자식. 논문이라도 쓸 기센데?’
그도 그럴 것이, 이안이 써 내려간 소환수 정보들이 양피지 다섯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
하지만 릴슨이 뭘 하든 이미 퍼즐에 심취한 이안은 마치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기라도 한 듯 골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음, 이렇게 하면…….”
이어서 잠시 후.
양피지에 뭔가를 써 내려가던 이안이 잠시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0002 – 털 갈기 늑대
0004 – 펜리르
0006 – 큰 이빨 늑대
0008 – 라칸
0010 - 하티
0012 - 투견
……중략……
0018 – 여우
0019 – 큰 꼬리 여우
뭔가를 생각하던 이안이 문득 아홉 번째 성판을 가져와 유심히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나머지가 다 짝수인데, 얘만 홀수라고?”
스물다섯 개의 성판에 그려진 소환수의 일련번호를 나열하던 중에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2의 배수로 올라가던 소환수의 일련번호가 아홉 번째 성판에서 갑자기 홀수가 된 것.
하지만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 줄을 슥슥 지워 냈다.
“생각해보니 큰 꼬리 여우 아이콘이 아니야. 샤르망 아이콘이군.”
0019 – 큰 꼬리 여우
0020 – 샤르망
샤르망은 큰 꼬리 여우의 진화 형태인 소환수이다.
하지만 꼬리의 숫자만 제외한다면 외형이 거의 큰 꼬리 여우와 다를 바 없어 아이콘도 비슷했던 것.
그렇게 함정(?)을 피한 이안은 스물 다섯 마리의 소환수 일련번호를 전부 나열하였다.
……전략……
0048 – 대호
0050 – 할리칸
그리고 그것들을 응시하며, 더 깊이 생각에 잠겼다.
‘일단 찾아낸 첫 번째 규칙은, 소환수들의 일련번호가 전부 짝수이면서 순서대로라는 것……. 하지만 이게 퍼즐의 전부일 리는 없겠지.’
만약 일련번호가 섞여서 나타났더라면, 이안은 이것을 순서대로 맞추는 것이 퍼즐의 해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소환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숨겨져 있던 규칙을 찾아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스물 다섯 개의 성판들은, 처음 나타날 때부터 이 일련번호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퍼즐 판에 옮기는 것이 해답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럼 대체 뭘까? 이 일련번호가 아무 의미 없이 이렇게 규칙적일 리는 없는데…….’
이안은 첫 번째 성판인 ‘털 갈기 늑대’ 성판을 가지고, 벌떡 일어나 퍼즐판 가까이로 다가가 보았다.
이제껏 퍼즐판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판 안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예상대로, 퍼즐 판에는 ‘힌트’가 숨겨져 있었다.
이안이 다가가자, 시스템 메시지가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띠링-!
-방진方陣에 숨겨져 있던 심연의 기운이 깨어납니다.
-도전자에게 첫 번째 힌트가 주어집니다.
우우웅-!
메시지와 함께,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는 퍼즐 판.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안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
메시지와 함께 퍼즐판에 나타난 ‘힌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서, 아예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릴슨.
“이건 또 웬 숫자야?”
릴슨과 이안의 시선은 퍼즐판에 꽂혀 있었고, 스물다섯 칸의 각 퍼즐 판에는 다음과 같은 황금빛의 숫자가 띄워져 있었다.
5 6 1 2 4
5 1 2 4 5
1 2 4 5 5
3 4 5 5 1
3 5 6 1 3
* * *
“이거 뭐예요?”
“팀장님은 알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짜샤?”
“이걸 어떻게 풀어.”
“헐……. 이거 고객센터에 전화와도 할 말 없겠는데요?”
오늘도 이안의 화면을 모니터링 중인 기획 1팀의 모니터링실.
점심식사를 마친 팀원들은,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심연의 유적을 정복 중인 이안이 제발 미끄러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팀원들의 바람에는 사실 큰 기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가디언들을 때려잡아서 악령의 유적을 돌파해 낸 무식하기 그지없는 이안에게, 불가능이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30분 전.
점심 시간이 시작된 시점부터, 팀원들에게는 일말의 기대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유적 초입에 있는 일곱 개의 관문들을 순식간에 돌파해 낸 이안 파티의 앞에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하는 퍼즐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3팀에서 기획한 관문이었기에 1팀은 아는 바가 없었고, 때문에 느닷없이 나타난 고난이도의 퍼즐은 그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퍼즐을 풀지 않고 무식하게 돌파할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와, 대체 이런 퍼즐은 누가 기획한 거야?”
“3팀 팀장님이겠지, 뭐.”
“이거 뭐, 나는 풀어 볼 엄두도 안 나는데?”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스크린 속 이안의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반대로 조금씩 밝아지는 기획 3팀 팀원들의 얼굴.
하지만 그런 1팀의 밝은 표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니, 그건 바로 사무실에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 때문이었다.
드르륵.
1팀의 사무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 고개를 집어넣는 한 남자.
“다들 뭐여서 뭐 하고 있나 했더니 이안 구경하고 있었어?”
양반(?)이 못 되는 나지찬이, 1팀의 사무실에 등장한 것이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엇, 팀장님!”
“나 팀장님!”
물론 나지찬은 1팀이 한 줄기 희망을 갖게 해 준 장본인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의환과 1팀에게 결코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최근 기획 3팀은, 기획 팀들 중 유일하게 야근이 없는 적폐세력(?)이었으니 말이다.
모니터링실 안으로 들어온 나지찬은, 김의환에게 다가와 히죽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어제도 야근하셨나 봐요?”
“그걸 말이라고…….”
“그거 아십니까?”
“뭘?”
“저 야근 안 한 지 일주일도 넘었습니다.”
“이놈이……!”
얄밉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들어와, 1팀의 팀원들에게 염장을 지르는 나지찬.
하지만 나지찬의 염장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더라면,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심지어 저 입사 이후 처음으로, 올해 연차도 전부 다 썼습니다.”
“후우, 대체 여기 왜 온 거냐?”
“선배님 응원해 드리러요.”
“인성 나지찬…….”
“그거 칭찬이죠?”
“좋을 대로 생각해라.”
김의환과 티격태격하던 나지찬은 슬쩍 안쪽으로 들어와 모니터링실에 아예 자리를 잡았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지 염장질을 위해 옆 팀의 모니터링실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기획한 퍼즐을 이안이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한 것이, 이곳에 나타난 가장 큰 이유였으니 말이다.
“선배, 이안 지금 심연의 탑 진입 관문 퍼즐 풀고 있는 거죠?”
“그래. 맞다, 이놈아. 이거 네가 기획한 거라며?”
김의환의 물음에 나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네. 정확히는 팀원들이랑 같이한 거지만, 사실상 제가 거의 다 한 거죠.”
“역시 네놈 머리에서 나온 거일 줄 알았다.”
“흐흐,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나지찬은 기획자적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 되는 후배였으니까.
그런데 그때.
두 사람의 대화에 옆에 있던 유 대리가 끼어들면서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었다.
“나 팀장님.”
“어, 유대리. 왜?”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 저 퍼즐 답이 뭐에요?”
유대리의 질문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버린 것.
“퍼즐의 답이야…… 모니터링을 하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
“아마 이안이라면, 시간은 좀 걸려도 풀 수 있을걸?”
“그게 무슨……!”
유대리가 근 몇 년 동안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슬픈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지찬.
“하지만 답을 알고 본다면 관전하는 재미가 더 있을 테니, 여기에는 답을 말해 주도록 하지.”
이어서 나지찬은 1팀의 팀원들에게 퍼즐의 답을 공유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더 경악에 빠졌다.
“에엑?”
“아니, 이걸 어떻게 풀어요?”
퍼즐의 내용이, 생각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걸 이안이 푼다고요?”
“이거 만약 풀면, 야근 하루 더 해도 인정.”
그리고 혼돈에 빠진 1팀의 팀원들과 달리, 신이 나서 퍼즐을 설명하던 나지찬은 아예 모니터링실의 소파에 몸을 푹 담그고 관전 모드에 돌입하였다.
더 없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안의 화면을 감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 애들 놀린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안이 진짜 풀 수 있을지 궁금한걸?’
그리고 나지찬 덕에 퍼즐의 내용까지 알게 된 1팀의 팀원들은,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다시 스크린에 집중하였다.
* * *
‘1부터 6까지 숫자가 중구난방으로 배열되어 있네.’
이안의 미간이 더욱 더 좁아졌다.
근래 들어 카일란을 플레이하면서, 이렇게까지 머리를 굴려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각기 개수도 다 달라. 1은 다섯 갠데 2랑 3은 세 개씩밖에 없잖아? 4는 네 개. 5는 무려 여덟 개…….’
이안의 머릿속에 가득 찬 수 많은 데이터들이 쉴 새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명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냈을 리는 없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소환수와 관련하여 그 누구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머리싸움.
힌트로 인해 머릿속이 더 혼란해졌으나, 오히려 의욕은 더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숫자가 분명 성판에 새겨진 소환수들의 데이터와 관련이 있을 텐데 대체 뭘까?’
스물다섯 개의 성판들을 나열해 놓은 뒤, 두 눈을 지그시 감는 이안.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단서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만. 그러고 보니 늑대류 소환수의 종족 번호가 1번이었는데?’
이어서 눈을 번쩍 뜬 이안은, 곧바로 성판 위의 소환수들을 종족별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분류가 끝나갈 무렵, 머릿속이 환하게 걷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거였어! 늑대가 다섯 마리. 여우가 세 마리. 용족의 성판이 여덟 개고, 종족 번호는 5번!’
두 번째 실마리를 얻어 낸 이안의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