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3화 6. 고대의 신단 (3) >
* * *
릴슨이 예상했던 것처럼 새벽 5시가 살짝 넘자마자 칼 같은 모닝콜이 머리맡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당연히 이안의 전화.
전화를 받은 릴슨은, 퉁명스런 목소리로 이안을 쏘아붙였다.
“일어나 있었어, 인마.”
-크, 역시 릴슨갓.
어제도 분명 늦게까지 게임했을 것임에도 오히려 자신보다 더 생기가 넘쳐흐르는 이안의 목소리에, 릴슨은 질린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놈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야?’
사람의 체력이 과연 맞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바로 들어갈 거니까 대기하고 있어.”
-오케이!
간결하게 통화를 마친 뒤 캡슐로 어기적거리며 들어가는 릴슨.
다행히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 덕에, 잠은 충분히 자 둔 그였다.
위이잉- 철컥-
릴슨이 캡슐 안으로 들어서자,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뚜껑이 천천히 닫혀 내려왔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신형 캡슐의 착좌감이 마음에 드는지, 릴슨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 오늘은 심연의 유적을 정복하는 건가.”
어제까지 그렇게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그새 까먹은 것인지, 캡슐에 앉자마자 다시 밝아지는 릴슨의 표정.
이런 것을 보면 릴슨 또한, 천생 게이머임이 분명하였다.
‘좀 힘들긴 해도, 이안이 따라다닌 덕에 삼대 유적 중에 두 개나 정복하겠네.’
육체와 정신은 피폐해지지만 결코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은 이안과의 동행.
-홍채 인식 완료. ‘릴슨’ 님, 카일란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릴슨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겨 내려갔다.
* * *
비터 스텔라의 봉우리는 총 네 개다.
하지만 비터 스텔라의 안에 있는 고대 유적의 개수는 세 개뿐이다.
때문에 네 봉우리 중 한 곳에는, 필연적으로 유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이안이 지금까지 정복한 성령과 악령의 유적은 각각 샤이야와 호른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이안은 마지막 심연의 유적을 찾기 위해 마타야 봉우리와 루판 봉우리를 샅샅이 뒤져야 했을 것이었다.
물론 착한 GM 철우 덕에, 이안은 심연의 유적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 왔어, 형. 여기야.”
“음, 여기라고?”
“한번 확인해 봐. 바로 이 좌표에 결계가 있을 테니까.”
“이 인근도 아니고 딱 여기?”
“그래. 딱 여기.”
이안과 함께 마타야 봉우리의 최상부에 도착한 릴슨은, 일단 결계 탐 색장치를 인벤토리에서 주섬주섬 꺼내었다.
사전 퀘스트와 같은 과정 없이 유적의 입구를 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지만, 일단 이안이 시키는 대로 해 본 것이다.
위이잉.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띠링-!
-최상급 결계가 감지되었습니다.
정말 이안이 가리킨 정확한 위치에 결계가 있었으니 말이었다.
“너, 무슨 치트 쓰냐?”
“그럴 리가.”
“아니면 혹시 LB사의 아들? 그도 아니면 무슨 광역 결계 감지 아티팩트라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결계나 해제해 줘.”
“쳇.”
이안은 GM과 있었던 사실을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고, 때문에 릴슨의 이런 반응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얘기를 꺼내는 순간 설명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귀찮음이 싫었던 것이다.
지잉- 지잉-.
이안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또다시 투덜거리며 결계를 해체하기 시작하는 릴슨.
위이잉.
그리고 입구의 결계가 해체되는 동안, 이안 또한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환수들의 상태와 아이템들을 점검하고 세팅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여기도 결코 쉽진 않을 거야. 마지막인 만큼 정신 바짝 차려야지.’
심연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마타야’ 봉우리는, 비터스텔라의 봉우리들 중에 가장 산세가 험하고 깊숙한 위치였으니.
앞의 두 유적들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결코 얕봐서는 안 될 콘텐츠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2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자, 끝났다!”
능숙하게 입구의 결계 해체를 마친 릴슨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띠링-!
-파티원 ‘릴슨’이 결계를 성공적으로 해체하였습니다.
-결계 안에 숨겨져 있던 고대의 유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위이잉-!
이어서 이안과 릴슨의 신형이, 심연의 기운이 일렁이는 깊은 계곡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와아아아-!”
커다란 함성과 함께 거대한 포탄들이 성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릉- 콰콰쾅-!
그리고 무너진 성벽 사이로 수많은 길드원들이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아, 에이나 길드가 드디어 방어선을 무너뜨린 것 같죠?
-그렇습니다! 여기서 만약 공성에 성공한다면, 이번 길드전은 사실상 에이나 길드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는 거거든요!
-남아있는 전투와 관계없이 승패가 정해지는 거죠?
-그렇습니다!
흥분한 캐스터, 해설자들의 설명과 함께, TV화면에서는 많은 유저들이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챙- 채챙-!
퍼어엉-!
길드의 이권이 크게 걸려있는 전투가 바로 길드전이다 보니, 양 측 모두 한 치의 양보 없이 전력을 쏟아붓는 것이다.
대충 보기에도 치열하고 화려한, 상위권 길드간의 길드전장.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화면을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길드전의 관중 숫자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몇백 명 정도의 관중들은 있었지만, 과거 로터스 길드나 타이탄 길드의 길드전과 비교한다면 십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최상위 길드들은 이제 길드전에서 볼 수 없으니 말이야.”
올해 한국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유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티비 채널을 돌려 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튼 채널에서 카일란 길드전이 방송되기에 잠깐 시청하고 있었는데, 결국 네임드 플레이어가 하나도 없다보니 흥미가 떨어지고 만 것이다.
지금 전쟁을 벌이는 중인 에이나 길드와 시아토 길드의 경우 나름 지상계에서는 탑급에 들어가는 길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중 알려진 랭커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진혁아.”
“응?”
“왜 로터스나 다크루나 같은 최상위권 길드들은, 길드전을 하지 않는 거야?”
옆에 있던 여자 친구 세희의 물음에, 진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하지 않는다기보단, 할 이유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그래? 왜 그런 건데?”
카일란 마니아인 진혁과 달리, 그의 여자 친구 유진은 갓 입문한 수준.
때문에 진혁은 조금 귀찮지만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하였다.
게임 덕후인 그로서는, 여자 친구가 게임에 더욱 재미를 붙여야 더욱 원활하고(?)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었다.
“그쯤 되는 길드들은 이미 길드 등급이 왕국까지 올라갔잖아.”
“그렇겠지?”
“특히 네가 언급한 로터스급의 길드들은 이미 왕국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 영토를 전부 가지고 있어.”
“아, 그래?”
“응. 그래서 영토 수복을 위한 길드전을 열 필요가 전혀 없어진 거지.”
진혁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직 궁금증이 덜 풀렸는지, 여자 친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카일란에는 왕국 위에 제국이라는 등급도 있던데?”
“맞아. 제법 공부 많이 했네?”
“히히, 요즘 시험기간에도 매일 카일란 커뮤니티 빠지지 않고 구경 중이거든.”
“자랑이다…….”
“어쨌든 제국이라는 상위 티어가 있는데, 그럼 길드전을 더 해서 다른 왕국들 먹고 제국으로 승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근데 왜 길드전을 벌일 이유가 없어?”
제법 구체적인 세희의 질문에 진혁은 더욱 귀찮아졌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답변을 계속하였다.
“그건 중간계 콘텐츠 때문이야.”
“중간계?”
“응.”
목이 타는지 잠시 마른침을 삼킨 진혁은, 다시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런 대형 길드에서 왕국 전쟁을 일으키면, 사실 다른 왕국 하나를 삼킬 때까지 엄청 전쟁이 길어지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그동안 중간계에 가 있던 길드의 랭커들은, 죄다 지상계에 발이 묶여 버리고 마는 거야.”
“아하.”
“그럼 다른 길드들에게 중간계 콘텐츠 진행이 뒤쳐질 테고, 그러다 보니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되는 거지.”
“오호,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다행히 설명을 전부 이해했는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희의 모습에, 진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이어서 대견한(?) 여자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진혁은 아직 커뮤니티에 알려지지 않은 나름 고급 정보까지 하나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과 선배들한테 들은 얘긴데…….”
“오, 진혁이 네 선배들이면 로터스 길드원들?”
“응, 맞아.”
로터스라는 이야기에 두 눈을 다시 반짝이는 세희.
“여튼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이제 곧 중간계에서도 길드전 비슷한 콘텐츠가 열릴 것 같대.”
“오오!”
“아무래도 요즘 지상계 길드전 시청률이 시들해지다 보니 LB사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콘텐츠같기도 해.”
“와아, 재밌겠다. 어떤 콘텐츠인데?”
세희의 반문에 진혁의 입이 다시 열렸다.
“중간계 거점 전쟁이었나?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기사단이랑도 관련 있는 것 같더라고.”
* * *
처음 심연의 유적에 들어섰을 때 이안은 간절히 기도한 한 가지가 있었다.
‘제발 여기는 퍼즐과 관련 없게 해 주세요.’
악령의 유적에서 받았던 고통들이 문득 떠오르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던 것이다.
‘설마 그런 무식한 콘텐츠를 또 넣어 놓지는 않았겠지. 암, 그렇고말고.’
물론 그 어떤 어려운 퍼즐이 기다리고 있었더라도, 이안은 될 때까지 헤딩할 생각이었다.
그 어떤 보상보다도 지금 이안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심연의 심판 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것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은 법.
이안의 그 기도가 먹힌 것인지, 심연의 결계들은 퍼즐과 조금의 연관도 없는 것이었다.
띠링-!
-‘심연의 첫 번째 시험(돌발)(히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첫 번째 결계가 해제됩니다.
-다음 지역이 오픈되었습니다.
……중략……
-‘심연의 세 번째 시험(돌발)(히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세 번째 결계가…….
……후략……
심연의 유적은 성령이나 악령의 유적보다도, 훨씬 많은 관문을 가지고 있었다.
‘유적의 탑’에 도달하기까지만 해도, 무려 일곱 개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과 릴슨이 결계를 뚫는 데에는, 악령의 유적에서 걸린 시간의 절반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성령의 유적 관문들이 슈팅 혹은 아케이드 게임의 느낌이었더라면 악령의 유적은 퍼즐 게임이었지만, 이곳 심연의 유적 관문들은 완벽히 RPG게임 구조의 던전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은 그저 미친 듯이 싸웠고, 그래서 빠르게 돌파했을 뿐이었다.
“크, 이거지! 이안, 잘한다!”
“후우, 다 때려 부쉈더니,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 형.”
“난 옆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스트레스가 풀린다, 야.”
그리하여 순식간에 모든 관문을 돌파해 낸 두 사람은, 고작 반나절 만에 유적 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온통 짙은 군청빛의 운무와 새카만 심연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분위기의 탑.
하지만 탑에 다가서던 두 사람의 표정은 살짝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띠링-!
탑을 발견하며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서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세이카의 심연 진입 (히든)(돌발)’퀘스트가 발동하였습니다.
-‘심연의 안개’가 전장에 깔리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퀘스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