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9화 5. 가디언의 비밀 (2) >
* * *
투아레스는 분노를 넘어 말을 잃고 말았다.
억겁의 세월을 알아 오면서, 신격도 없는 중간자 나부랭이(?)에게 이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자, 장난이라니……!
아마 본체로 현신할 수만 있었더라면, 이 건방진 중간자를 당장이라도 묵사발을 내 버렸을 터.
투아레스는 이 겁을 상실한 녀석에게 쌍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결국 말을 더 잇지는 못하였다.
분노에 앞서 그는 무척이나 이성적인 존재였고, 여기서 화를 낸다면,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시건방진……!’
하여 분노를 꾹 눌러 참는 투아레스.
그러나 투아레스가 화를 참건 뭘 하건 그에 관계없이 이안의 말을 계속 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대사 하나하나는 투아레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파편 열 개를 누구 코에 붙여?”
-뭐라……!
“그냥 시험인지 뭔지 다시 치를 테니까, 이거 물려 줘.”
-……!
“고작 열 개 받자고 그 고생하면서 퍼즐 맞춘 거 아니거든.”
투아레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안의 표정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이안의 말이 그저 블러핑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시험을 다시 보겠다는 것인지 순간 판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험을 다시 보겠다고?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
물론 투아레스가 판단하기에도, 이 중간자라면 유적의 시험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격파해 낼 것이다.
하지만 도전자의 입장에서는 시험이 어떤 내용인지 알 리가 없다.
내용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근거로 저런 패기를 보일 수 있는 것인지, 관리자이자 시험관인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투아레스는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말에서 한 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맘 같아서는 최상층으로 보내 버리고 싶지만, 시험을 다시 보게 되면 결국 나랑도 싸워야겠지.’
-후우…….
투아레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이 괴팍한 인간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인 투아레스가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여 이안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도전자여, 그대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
“내가 뭘 잘못 아는데?”
-열 개의 파편이 결코 적은 보상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
물론 그 설득이 통할 리는 만무했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악마의 파편 열 개면 여기 있는 거의 대부분의 유적들과 교환이 가능하단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고작 파편 열 개론 저기 있는 저 심판검 하나 못 가져가잖아?”
-시, 심판검 하나라니……!
이안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고, 투아레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이어서 이안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고고하게 떠 있는 묵빛의 대검을 확인한 순간, 투아레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버렸다.
이 괴팍한 도전자 놈은, 유적에 대해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으, 으으……!
다시 말을 잃은 투아레스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후우. 이 탐욕스런 인간 놈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성령의 유적과 악령의 유적에서 토큰의 가치는 완벽히 똑같지 않다.
‘성령의 빛’에 비해 ‘악마의 파편’이 한 배 반 정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악령의 심판검과 교환하는 데 필요한 악마의 파편은 정확히 열두 개.
투아레스가 이안에게 열 개의 파편을 지급한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이안이 다른 어떤 유물을 가져가도 상관없었지만, 유적의 관리자로서 심판 검만은 사수하고 싶었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투아레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괜히 심판 검을 사수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린 것이 오히려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한편 투아레스가 고뇌에 빠져 있던 그 무렵.
이안의 머릿속도, 투아레스 못지않게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지금 이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여기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유적을 털어 갈 수 있을까?’
눈앞의 이 어리바리해 보이는 친구를 탈탈 털어먹기 위한 고민뿐이었다.
NPC에 대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이안은, 대략적인 상황을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물론 투아레스가 그와 싸우기 싫어서 고뇌 중이라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더 많은 토큰을 얻어 낼 방법이 있다는 정도는 간파한 것.
거기에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안이 다시 시험 보는 것을 투아레스가 꺼려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확신하고 있는 이안이었다.
‘잘 구슬려서 하나씩 토해 내게 만들어야겠어.’
이안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마치, 이미 다 잡아 놓은 고기를 내려다보는 어부의 표정.
“험, 험.”
한 차례 목청을 가다듬은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이, 친구.”
-아, 악신인 내게 친구라니……!
“그런 것은 됐고.”
-이, 이익!
“네가 방금 그랬잖아.”
-뭘 말이냐?
“이 열 개의 파편이 충분히 대단한 보상이라고 말이야.”
-다, 당연하다!
이안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투아레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관리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울화통이 터지는 도전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미친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러나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게 무슨……!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
-뭐?
또다시 생각지 못했던 전개에, 벙 찌고 만 투아레스.
그는 이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네놈은 모르겠지만, 난 신격을 가진 악신이다!
“알고 있는데?”
-이익……!
“무튼 그래서?”
-신격체인 내가 고작 중간자에게 거짓을 이야기하겠는가!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럴 수 없다. 적어도 악령의 권능이 깃든 이 유적 안에서 나는 거짓을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호, 그래?”
이안의 눈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
물론 멘탈이 바스라지기 직전인 투아레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럼 내가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
-내가 건방진 네놈의 질문에 답해 줘야 할 이유가 뭐지?
“이 질문에만 정확히 대답해 준다면, 내가 여기서 너랑 실랑이 할 이유가 사라지니까.”
-……!
이안과 투아레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어서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안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투아레스의 입장에서 외통수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 유적에서 도전자가 얻을 수 있는 파편의 최대 개수는 몇 개지?”
-이, 이익……!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난 다시 시험 보러 내려갈 수밖에 없어.”
-…….
“아니, 네가 나한테 그 최대 개수를 주지 않는 한 난 열 번이도 백 번이고 재도전할 거야.”
이안의 말을 듣던 투아레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고 말았다.
-이, 나쁜 놈!
투아레스가 바로 악마들의 신인 악신이었지만, 그가 볼 땐 이안이야말로 진정한 악마였으니 말이다.
* * *
-정말, 다 가져갈 건가, 인간?
“응.”
-자비 좀…….
“악신이 무슨 자비를 논해?”
-…….
“정 맘에 안 들면, 시험 다시 본다니까?”
-크흐흐흑.
결국 이안이 투아레스에게 뜯어낸 파편의 개수는, 무려 칠십 개였다.
그리고 이 칠십이라는 숫자는 이안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 한 것이었다.
악마의 파편이 성령의 빛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안이 성령의 유적에서 얻었던 개수보다 더 많은 숫자였으니 말이다.
정말 도전자가 이 유적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개수인 것.
이안은 알지 못했지만, 이것은 투아레스에게 너무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만약 이안이 다시 시험을 다 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관리자인 투아레스마저 무릎 꿇렸다고 하더라도, 파편 일흔 개는 얻을 수 없는 수치였으니 말이었다.
마탑에 입장하기 전 도전했었던 세 개의 결계해제 퀘스트에서까지 모두 SSS등급을 받아야만 얻을 수 있었던 파편의 개수가 일흔 개였던 것이다.
조형감 없는 이안과 릴슨은 그 결계들을 전부 B~C등급으로 클리어했었고, 그것을 기준으로 이안 파티의 포텐을 책정하면, 아무리 많아도 사오십여 개의 파편이 한계였던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아레스는 일흔 개 전부를 이안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막무가내 이안은 그것을 전부 받지 못하면 무조건 재도전을 하겠다고 협박하였고, 결국 그러면 투아레스가 이안과 싸워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파편 쉰 개를 넘기건 일흔 개를 넘기건 심판 검을 넘겨줘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기왕 이렇게 된 이상 투아레스에게는 체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물론 이미 지킬 체통이 남아 있는지도 의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크윽.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서른 개 정도 쥐여 주는 건데…….’
어쨌든 이러한 악신의 속사정과 별개로 이안은 신이 나서 유물들을 쓸어 담기 시작하였다.
-‘악마의 파편’ 아이템을 세 개 소모합니다.
-강렬한 악령의 힘이 ‘악마의 어깨 장식’에 깃들기 시작합니다.
-‘악마의 파편’아이템을 두 개 소모합니다.
……중략……
-악마의 힘이 모두 충전되었습니다.
-‘사혼마의 언월도’ 아이템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사혼마의 언월도(전설)(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후략……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유물들을 마구잡이로 주워 담는 이안!
“크으, 이거지!”
이안과 달리 파편이 열 개뿐인 릴슨은 원하는 유물들을 이미 전부 고른 상태였지만, 이안은 아무리 주워 담아도 파편이 남아도는 기적을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꼼꼼히 유물들을 전부 살핀 이안은, 재미있는 물건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고대의 설계도
분류 : 잡화
등급 : ???
고대신들이 자신들의 신격을 담아 전투 병기를 설계한 설계도입니다.
고대의 설계 지식이 없이는 해석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유저 ‘이안’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오호, 이게 가디언 소환석을 사용하기 위한 열쇠일지도 모르겠는데……?’
-‘악마의 파편’아이템을 다섯 개 소모합니다.
-‘고대의 설계도’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꼼꼼히 쇼핑한 이안은, 결국 정확히 열두 개의 파편만을 남기고 전부 소모하였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이안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우우웅-! 파앗-!
-‘악마의 파편’ 아이템을 열두 개 소모합니다.
-강렬한 악령의 힘이 ‘악령의 심판 검’에 깃들기 시작합니다.
-악마의 힘이 모두 충전되었습니다.
-‘악령의 심판 검’ 아이템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악령의 심판 검(신화)(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악령을 계승한 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투아레스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