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5화 5. 고대 유적의 가디언들Ⅱ (1) >
A+라는 초월 등급의 난이도는 릴슨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지만, 이안에게 결코 어려운 난이도가 아니다.
이제껏 S등급 이상의 난이도들을 밥 먹듯 클리어해 온 이안에겐, 오히려 만만하게 느껴지는 등급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물며 지금 이안은 혼자가 아니다.
릴슨이라는 든든한 파티원이 있는 상황.
릴슨으로 인해 파티의 평균 전력이 낮아진 상황에서 A+라는 등급이 떴다는 것은, 이안 혼자 도전했다면 더 낮은 등급의 난이도가 책정되었을 것이라는 방증이었으니까.
‘흐흐, 너무 시시해도 재미 없는데.’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안은 이 첫 번째 관문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었다.
흉상인지 뭔지 순식간에 완성해 버리고,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막상 퀘스트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이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그 생각이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을 말이다.
A+ 등급으로 책정된 ‘악령의 유적, 첫 번째 시험’ 돌발 퀘스트의 난이도는 무척이나 쉬우면서, 한편으로는 또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후우……. 불용이, 루가릭스, 빨리 조각 좀 모아 와 봐.”
“아니, 주인, 벌써 다 쓴 거냐?”
“이미 한 트럭은 갖다 바친 것 같은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주인?”
첫 번째 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유적의 공터.
이곳에 펼쳐진 광경은 사뭇 특이한 것이었다.
처음 유적에 입장할 때만 해도 소환되어있지 않은 대부분의 소환수들이 공터 곳곳에 소환되어 있었고.
이안과 릴슨, 그리고 아렌은, 그 가운데에 쪼그려 앉아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공터에서 소환되는 악마의 정령들을 처치하는 것은, 완전히 소환수들의 몫이 된 지 오래였다.
“릴슨 아저씨, B-7조각 그쪽에 있어요?”
“아니. 아까 가져갔잖아.”
“에? 전 가져간 적 없는데…….”
“이안! 네가 가져갔잖아. 그거 어쨌어?”
“방금 전에 부서졌지.”
“…….”
“하아, 주군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크흑.”
“도움이 안 된다니까 정말.”
“…….”
처음 퀘스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릴슨과 아렌은 이안이 운전하는 쾌적한 버스를 탑승했다고 생각했었다.
이안의 칼질 한 방에, 정령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퀘스트의 본질을 깨닫고 나니, 놀랍게도 이안은 버스기사가 아닌 트롤이었다.
이 퀘스트의 진정한 난이도는, 전투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한참 조각들을 들여다보며 고뇌하던 릴슨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인간적으로 이거 너무 어려운 거 아냐?”
“…….”
“그냥 지금이라도 내가 정화의 목걸이 쓰면 안 돼?”
릴슨의 물음에, 이안이 아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냐. 한 번만 더 해 보자, 형. 형 실력이라면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야.”
“후우…….”
“주군은 가서 조각이나 모아 오세요.”
진심이 가득 담긴 릴슨의 깊은 한숨에 이어, 충성도 높은 가신 아렌의 핀잔까지.
하지만 풀 죽은 표정의 이안은 별다른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크흑.”
다만 조용히 검을 들고, 정령들을 사냥하러 나설 뿐이었다.
‘하, 설마 유적의 모든 퀘스트가 이런 식은 아니겠지.’
정령을 아무리 빠르게 처치하고 조각을 많이 모아도 결국에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악신의 흉상’이라는 것을 완성해야만 한다.
무려 수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파편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악신’의 형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입체 조형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3차원 퍼즐이나 다름없는 것.
게다가 조각 하나하나가 시커먼 색이다 보니 퍼즐의 난이도는 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떻게 생긴 모형을 만들라는 건지 힌트도 없는 데다 파편 색깔이 이렇게 흑색 단색이면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어 내라는 거야?’
조형물을 완성하기는커녕, 어디에 쓰는 조각인지 찾아내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들어가는 현실.
미적 감각이 제로에 수렴하는 이안이 이 퀘스트의 트롤인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악의 손재주야 노력으로 어느 정도 보완했다곤 하지만, 미적 감각은 노력한다고 좋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이안은, 그 어떤 노가다를 할 때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현재 ‘악신의 흉상’ 완성도 : 37.5퍼센트
-파티원 ‘릴슨’이 파편을 잘못 조립하였습니다.
-어둠의 힘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조립된 모든 조각들이 소멸합니다.
-파티원 ‘릴슨’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조각들이 소멸됩니다.
-현재 ‘악신의 흉상’ 완성도 : 0.0퍼센트
“후우…….”
“이안아, 이제 그만하자.”
“하, 한 번만 더 해 보자. 한 번만 더……!”
그렇다면 ‘정화의 목걸이’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안 파티는 대체 왜 계속해서 이 고난도의 조각상 조립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슬프게도 이 고통스러운 노가다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마저도, 오늘의 트롤인 이안이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른 채 지나갔겠지만, 퀘스트를 진행하던 도중 이안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 버린 것이다.
죽어 가는 악마의 정령들의 대사에는 이안이 혹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으니까.
-키이익, 욕심 많은 인간! 네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흉상의 비밀을 풀어낼 수는 없을 거다!
-너도 가디언의 힘이 탐나나 보지?
-키릭 키키킥! 파편을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네 실력으론 절대 비밀을 알 수 없을 걸?
의미심장하기는 하지만, 이안이 아닌 다른 이가 들었더라면 한 귀로 흘려 버렸을지도 모를 정령들의 대사.
하지만 이미 한 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는 이안에게, 이러한 대사들이 허투루 들릴 리 없었다.
‘성령의 유적 관리자는 분명 가디언 소환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악령의 유적으로 가라고 했었지.’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관리자는 ‘악령의 유적’으로 가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안에게 ‘호른’ 산맥에 있는 다른 유적지를 찾아가라 하였는데, 악령의 유적이 바로 호른에 있었으니 이곳이 곧 관리자가 이야기한 장소라고 이안이 유추한 것이었다.
‘정령들이 저런 대사까지 하는 마당에 틀릴 리가 없지.’
여하튼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안은 이 퀘스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정령들의 대사를 조합해 봤을 때, 이 석상을 완성하는 것에 분명히 어떤 단서가 들어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안은 다시 일어서 미친 듯이 정령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크웨엑-!
-무식한 인간이다!
-정령 살려!
조각상 조립에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릴슨에게 조각들을 최대한 많이 수급시켜 주는 것뿐이었으니까.
“우리 형, 파이팅!”
“후우…….”
“형, 내가 유적 클리어하고 나면 ‘고대의 돋보기’ 하나 장만해 줄게.”
“……정말이지?”
“당연하지! 그러니까 힘 좀 내 봐. 파편은 계속해서 조달할 테니까.”
“하아……. 알겠어. 이번엔 어떻게든 성공시켜 볼게.”
그리고 그렇게 2시간이 넘게 첫 번째 관문에서 고군분투하던 이안의 파티는, 정확히 3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흉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절반의 형체를 만들어내는 데에만 2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다행히 남은 조각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퍼즐의 난이도가 쉬워졌다.
-현재 ‘악신의 흉상’ 완성도 : 96.5퍼센트
-파티원 ‘릴슨’이 ‘C-27’파편을 성공적으로 조립하였습니다!
-악마의 힘이 조금 더 짙어집니다.
-흉상의 완성도가 0.3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중략……
-악령의 파편 마지막 조각을 조립하였습니다!
-강력한 악마의 힘이 흉상을 감싸기 시작합니다.
-‘악신의 흉상’이 완성되었습니다!
날개 부분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는 것으로, 드디어 완성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늠름한 악신의 흉상.
성인 남성 두셋을 합한 것만큼 거대한 악신의 흉상에는 칠흑빛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정교한 조각상의 모양과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들어 낸 이안과 릴슨은 조각상의 멋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은, 퀘스트가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으니 말이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잠시 조각상을 응시하던 이안은, 감격스런 표정으로 릴슨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크, 갓 릴슨! 역시 형이 해낼 줄 알았어!”
“후후, 결국 성공하기는 했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악령의 유적, 첫 번째 시험 (히든)(돌발)’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등급 : B-
-흉상이 완성되어, 결계가 해제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흉상을 감싸던 기운이 허공으로 뻗어 나가며 결계를 해제하기 시작하였다.
우웅- 우우웅-!
밀폐되어있던 공간의 곳곳에 있던 기관들을 해체시키며, 고막이 가득 울릴 정도로 강렬한 공명음을 만들어 내는 악령의 기운들.
이어서 결계를 이루고 있던 모든 기관들을 해체해 낸 악령의 기운은, 다시 흉상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이안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거대한 크기로 완성되었던 흉상이, 악마의 빛을 빨아들이며 점점 작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
빛을 빨아들일수록 계속 작아지던 악신의 흉상은 결국 이안의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까지 줄어들었고, 그것을 본 이안은 재빨리 흉상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 조각상이 가디언에 대한 단서가 되어 주려나?’
이어서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이안은, 작아진 조각상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띠링-!
-‘악신, 투아레스의 흉상’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봉인된 아이템입니다.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악령의 힘을 얻은 자’만이 흉상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흉상을 집어 들자마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 조각상이 가디언들을 소환해 내는 데에 단서가 되어 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더욱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옆에 있던 릴슨의 등짝을 팡 팡 두들겼다.
“크으, 최고야, 형! 정말 고생했어!”
“훗, 별말씀을.”
놓칠 뻔했던 단서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이안과, 그의 칭찬 덕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릴슨.
두 사람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다음 관문을 향해 이동하였고, 더욱 의욕적으로 관문들을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세 번째 관문에도 조각상을 조립해야 하는 더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숙련도가 생긴 두 사람은 조금 더 빠르게 관문을 돌파할 수 있었다.
“크으, 이번엔 고작 열다섯 번 만에 성공했어!”
“역시 릴슨갓!”
하지만 기분 좋은 이 순간, 이안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사실 그가 찰떡같이 믿고 있는 릴슨의 미적 감각 또한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만약 다른 사람이 함께였다면 관문을 더 쉽고 빨리 깰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이안의 실력이 너무 최악이었기에 그보다 조금 나은 릴슨이 돋보였던 것일 뿐.
다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 때로는 행복을 위해 무지할 필요도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