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3화 4. 고대 유적의 가디언들 (2) >
* * *
‘자, 릴슨아, 이건 정말 신중해야 해. 실수는 용납할 수 없어. 못해도 복원도가 97퍼센트 이상은 나와야 하니까.’
호른 산맥 심처에 있는 부서진 바위동굴.
그 안에 들어선 릴슨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신중한 표정으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땅- 땅- 따앙-!
작은 조각칼처럼 생긴 작은 채굴용 단검을 조심스레 석벽에 대고, 망치질을 하며 유적을 채굴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우.”
이제 어지간한 유물 복원, 채굴 작업은 눈 감고도 하는 릴슨이었지만, 지금 그의 망치질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발굴하고 있는 이 유적의 등급과 티어가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못해도 전설 초월. 이거만 발굴 끝내면 직업 레벨이 바로 오를 거야.’
릴슨은 글로벌 기준으로도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탐험가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비전투 클래스의 레벨 업은 무척이나 힘들다.
이미 전투 클래스 랭커들 사이에 전설(초월) 등급은 어느 정도 풀려 있지만, 비전투 클래스에게 그 등급은 느낌 자체가 다른 것이다.
게다가 지금 발굴중인 유물이 평범한 잡화 아이템도 아니고 히든 퀘스트의 메인 스트림에 들어가는 유물이었으니, 그 가치는 더욱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분명히 악령의 유적과 이어지는 단서가 있을 거야. 그것만 발견한다면……!’
눈앞에 연달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릴슨의 시선은 오직 단검의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유물의 복원도가 0.09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손재주의 영향을 받아, 망치질의 정확도가 15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현재 복원도 : 92.76퍼센트
까앙-!
-손재주의 영향을 받아, 단검의 예리함이 9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유물의 복원도가 0.11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현재 복원도 : 92.87퍼센트
까강-!
-유물의 복원도가 0.11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탐험가들의 유물 복원 기술은, 극도의 손재주와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망치질을 한 번 할 때마다 복원되는 최대 비율은 클래스 레벨과 복원술의 숙련도에 비례하지만, 그 최대 비율 중 얼마만큼을 달성하느냐는 손재주와 집중력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망치질을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정해진 위치에 정확히 정량의 힘을 가해야 했으니 망치질을 수백 번 해야 하는 이런 상위 유물의 경우, 정말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이다.
‘으으, 끝나 간다!’
현재 릴슨이 전설 등급의 유물을 복원할 때, 망치질 한 번으로 가능한 최대 수치는 0.11퍼센트.
때문에 모든 복원이 끝났을 때 97퍼센트 이상의 복원도가 나오려면 1천 번에 가까운 망치질 중 30회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완벽한 망치질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었다.
‘돼, 됐어! 이제 마지막이야!’
-유물의 복원도가 0.11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현재 복원도 : 96.92퍼센트
릴슨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힐끔 본 뒤, 한 차례 심호흡을 하였다.
이제 남은 망치질은 한 번이었고 0.08퍼센트 이상의 적당한(?) 수준의 정확도만 끌어내면 성공이었지만, 자칫 삐끗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흐으읍!”
그리고 집중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릴슨은 결국 성공적으로 유물을 발굴해 낼 수 있었다.
따앙-!
-유물의 복원도가 0.11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현재 복원도 : 97.03퍼센트
-유물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복원 등급 : S+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히든 패시브 ‘유물 복원의 대가’가 발동합니다!
-유물의 복원도가 3.00퍼센트만큼 보강됩니다!
-현재 복원도 : 100.00퍼센트
-복원 등급이 SSS 등급으로 상향됩니다.
-전설(초월) 등급의 유물을 완벽히 복원하셨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990,182만큼 상승합니다!
……후략……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확인한 릴슨은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드, 드디어……!’
지난번에 발견했던 전설 등급의 유물을 0.02퍼센트 차이로 완벽 복원에 실패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감동이 더욱 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클래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탐험가 클래스의 레벨이 마스터 17레벨이 되었습니다!
-유물 복원술(초월)의 스킬 등급이 8티어로 상승합니다!
클래스 레벨 업과 스킬 숙련도의 티어 상승은, 릴슨의 감동을 거들어 줄 뿐이었다.
“크으!”
릴슨은 드디어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전설 등급의 유물을 설레는 마음으로 감정하였고…….
“감정!”
이어서 릴슨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그리고 다음 순간, 릴슨은 더욱 황홀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그리고 유물의 정보 창에 그가 기대했던 정확히 그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전설(초월) 등급의 유물, ‘악령의 나침반’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악령의 나침반
분류 : 유물
등급 : 전설(초월)
고대의 악신惡神이 유적을 만들면서 남기고 간, 악령의 힘으로 제작된 나침반입니다.
마족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라투이’에 의해 제작된 물건이며, ‘악령의 유적’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이 나침반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악령의 유적을 찾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영웅(초월) 등급의 유물, ‘악령의 시약’을 사용해야 작동시킬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악령의 나침반’이 활성화될 시 ‘악령의 유적’ 좌표를 미니 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저 ‘릴슨’ 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그래, 이거지!”
릴슨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였다.
거의 보름이 넘게 군소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단서를 모아온 결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말이었다.
‘악령의 시약은 이미 예전에 구해 놨고, 정화의 목걸이도 구해 놨으니까.’
악령의 나침반과 시약을 사용하여 유적 입구의 좌표를 찾아낸 뒤 정화의 목걸이로 결계를 하나하나 해체시킨다.
나침반과 마찬가지로 전설 등급의 초월 유적인 목걸이는 결계의 구조물들을 찾아줄 것이고, 그것을 하나하나 분해하고 해체한다면 모든 결계를 뚫고 유적의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으리라.
‘진짜 이거 얻으려고 지난주에 개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정화의 목걸이를 얻기 위해 진행했던 히든 퀘스트를 떠올린 릴슨이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비터스텔라의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던 하드코어한 채집 퀘스트였고, 퀘스트를 진행하는 동안 릴슨은 탐험가가 아닌 등산가 클래스로 전직하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제 모든 준비가 된 릴슨은 경건한 마음으로 인벤토리에서 ‘악령의 시약’을 꺼내어 들었다.
이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침반에 시약을 부었다.
퐁-!
병의 마개를 열자, 유리병 안에 액체처럼 담겨 있던 시커먼 물질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 시커먼 연기들은 나침반을 감싸며 공명했고, 단지 구릿빛의 동판 같은 외형을 지녔던 나침반이 칠흑같이 까만색으로 물들어 갔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악령의 나침반’이 작동을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마지막으로, 나침반의 위에 떠오르는 보랏빛의 문양.
스하아아-!
기괴하고 스산한 소리와 함께 나침반이 활성화된 순간, 릴슨의 미니 맵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악령의 유적’ 입구를 발견하였습니다!
항상 들어오던 익숙한 목소리의 시스템 메시지였으나, 그 어느 때 보다도 설레기 시작하는 릴슨!
‘흐흐, 성령의 유적은 이안갓이 먼저 찾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길드에 생색 좀 낼 수 있겠어.’
릴슨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맵을 열어 새로 활성화된 좌표를 찾아보았고, 어렵지 않게 그 위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릴슨이 있는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였어!”
하지만 다음 순간.
잔뜩 흥분했던 릴슨의 표정이 갑자기 묘하게 변하였다.
좌표가 반짝거리고 있는 그 주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어? 길드원이 왜 여기 있어?”
미니 맵에 표시되는 길드원 좌표 중 하나가 빠르게 유적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일직선으로, 정확하게 악령의 유적을 향해 이동하는 길드원의 좌표.
“……!”
그리고 그 길드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릴슨은 더욱 복잡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길드원(천룡기사단장/로터스 국왕) 이안.
그의 정체가 다름 아닌, 이안이었으니 말이었다.
* * *
“릴슨 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릴슨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안.
그런 이안을 향해, 릴슨이 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음……?”
“이안 님 얼마 전까지 분명 호른 남부에서 사냥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랬었죠.”
“아니, 사냥만 주구장창 하는 줄 알았는데, 악령의 유적은 대체 어떻게 찾은 겁니까?”
릴슨의 허탈함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 허탈함은 콘텐츠를 독식할 수 없게 된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안 또한 같은 길드의 길드원이었고, 때문에 실리 면에서는 누가 먼저 발견하든 큰 차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릴슨이 허무한 이유는 지난 한 달 간의 노가다가 부정당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윽, 이러려고 탐험가 클래스 한 게 아닌데…….’
물론 눈앞의 존재가 이안이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더 우울했을 것이었다.
이안이야 원래부터 릴슨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 탐험가 클래스 랭커라는 자존심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찾았어요.”
“하아…….”
“하지만 좌표만 찾았을 뿐, 아직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
릴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허무함이고 뭐고 그냥 해탈해 버린 것이다.
‘그래. 이안갓이니까…….’
이안이 규격 외의 존재라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 데다, 저렇게 해맑게 복장 터트리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난 릴슨.
물론 릴슨이 성령의 유적을 찾지 못한 이유가 이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 정도 선에서 충격이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당연히 좌표를 찾았다고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역시 그렇군요.”
“결계를 해제해야, 비로소 입구가 바깥으로 드러날 테니까요.”
“아하!”
릴슨의 말을 들은 이안이 또다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서 릴슨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릴슨 님이 결계 풀어 주시면 되겠네요!”
“…….”
“역시 갓 탐험가 클래스, 릴슨갓!”
그리고 그렇게 릴슨은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