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6화 1. 로터스의 부기사단장 카노엘 (3) >
* * *
돌이켜 보면 추억(?)이지만, 사실 용암의 대지를 공략했던 것은 이안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갖은 저항 옵션을 둘둘 두른 것도 모자라, 화염법사인 레미르를 대동하여 겨우 클리어했던 던전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안이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본인이 ‘적당히’ 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던전 안에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싹 다 털어 내기 위해 기획 의도를 넘어서는 한계 이상의 노가다를 벌였으니 말이다.
다만 그런 것을 다 감안한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최상급 난이도의 던전이었던 것은 분명할 터.
삭풍의 절곡 또한 용암의 대지와 비슷한 급의 던전임이 확실한 이상, 도전자들의 하드 트레이닝은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었다.
“80레벨 찍는 건 너무 오래 걸릴 거야, 형.”
“일주일이면 충분해.”
“…….”
“대체 무슨 던전을 도전하는데, 이런 하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전설 등급 초월 장비 풀 세트에, 신화 등급 무기까지 얻을 수 있는 던전요.”
“……!”
유신과 레비아는 단호한 이안의 말에 그대로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무리 힘들고 고약한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고 해도, 이안이 보상으로 얘기한 수준이 그것에 대한 걱정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 전설 등급 풀 세트?’
‘거기에 신화 등급 무기라고?’
이 와중에 가장 여유 넘치는 한 사람은, 이미 불지옥을 경험하고 그 달콤한 열매까지 맛본 그들의 선배.
레미르 한 사람뿐이었다.
“훈이, 고생해.”
“으으…….”
“내 DPS 이기고 싶다며.”
“…….”
“싫으면 다른 사람한테 기회 주든가.”
어느새 이안에게 물들었는지, 레미르는 훈이를 살살 약 올리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재밌었던 것이다.
‘흐흐흐. 이안이도 없이 용암의 던전 같은 델 깨야 한다고? 전부 80레벨을 찍는다 해도 지옥 같은 난이도일 게 분명해.’
소중하기 그지없는 용암의 지팡이를 쓰다듬으며, 지금 저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중 본인이 포함되지 않았음에 감사하는 레미르.
그리고 그렇게, 결국 이안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한 세 사람의 무한 트레이닝은 시작되고야 말았다.
* * *
“휴우, 이제야 잃어버린 경험치를 얼추 복구한 것 같군.”
“그렇습니다, 마스터.”
“젠장. 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조금만 더 조심히 움직였어도, 그런 참사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제 불찰입니다. 필드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면밀하게 분석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나도 너무 성급히 움직인 감이 있어.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달려서, 손해 본 시간 이상으로 뽑아내야지.”
이안과 용기사단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동력장치’의 버프를 이용하여 효율적인 사냥을 하던 스콜피온 길드.
비록 이안이 던진 작은 돌에 맞아 전멸이라는 슬픈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이곳 호른 산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정령계뿐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중간계의 어느 사냥터를 찾아보아도, 이곳보다 효율 좋은 곳은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잃어버린 시간과 경험치와는 별개로, 그들은 뼈아픈 손실을 통해 얻어 낸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동력장치가 여러 개 꽂혀 있던 특이한 지역 덕분에 좋은 사실을 하나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마스터.”
“그렇지. 레벨 버프가 2, 3중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야.”
레벨 버프 3중첩으로 인해 130레벨대가 된 기계들에게는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했지만, 그래도 강력한 전력을 가진 스콜피온 길드의 힘으로 110레벨대의 기계들까지는 사냥이 가능하였다.
경험치가 2중첩으로 뻥튀기 된 기계들까지는 느려도 사냥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10레벨대의 기계들이 주는 경험치는, 스콜피온 길드원들에게 그야말로 신세계라 할 수 있었다.
사망 페널티로 인해 잃어버린 경험치를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전부 복구해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경쟁자가 생겼다는 겁니다, 마스터.”
“후우, 그렇지. 게다가 그 경쟁자들이 하필 로터스 녀석들이라고 들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녀석들이 이 사냥터의 정보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치열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로터스가 알았으니 다른 길드들도 곧 알아챌 테고, 여기가 인산인해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맞습니다.”
다음 캠프로 옮기기 전 잠시 하윈과 대화를 나누던 왕 웨이는, 더욱 결연한 표정이 되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이안을 따라잡고 말리라.’
자연재해(?)로 인해 살짝 상황이 꼬여 버리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정면승부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이안을 앞질러 소환술사 최고 레벨을 달성하고, 소환술사 랭킹 1위의 명예를 가져오고 말리라.
“얼른 다음 캠프로 넘어가자고, 하윈.”
“옛, 마스터!”
“로터스 녀석들보다 더 많은 캠프를 선점해야 해!”
“알겠습니다!”
더욱더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수하들을 닦달하기 시작하는 왕 웨이.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는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그가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로터스의 ‘이안’과 기사단이, 사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사실.
이미 이안은 세 사람의 특전대(?)를 대동하여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호른 산맥의 캠프에 남아 있는 로터스의 기사단을 이끄는 이는 이안이 아닌 카노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한편, 왕 웨이가 카노엘을 향해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던(?) 그 시점.
이안은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드 트레이닝을 시작하기 전, 몇 가지 준비물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안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소르피스 내성의 경매장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수백 코인이 넘는 거금을 들여 가며 소모성 아이템들을 대량으로 매입하였다.
‘일단 포션이랑 스크롤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고속 귀환서도 열 장 정도 사야겠어. 고요의 모래시계는…… 최대한 많이 사야겠지.’
지금 이안이 계획하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최고 효율의 스파르타식 사냥이었다.
회복 시간과 정비 시간마저 아끼기 위해 고가의 소모성 아이템들을 닥치는 대로 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안이 부리고 있는 사치의 최고봉은 ‘고속 귀환서’와 ‘고요의 모래시계’라는 아이템이었다.
소모품인 주제에 개당 100코인에 육박하는 가격을 지닌 이 물건들은, 평범한 유저라면 카일란을 플레이하는 동안 한 개 사 볼까 말까 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고속 귀환서
분류 : 잡화(소모품)
등급 : 전설(초월)
폭풍 같은 마력이 담긴 귀환서입니다.
귀환서를 찢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반경 10m이내에 있는 모든 파티원이 안전지대로 귀환됩니다.
*귀환서가 발동되는 데에는 2초의 시간이 걸리며, 그 안에 공격을 받거나 움직일 시 귀환 명령이 해제됩니다.
*필드 맵에서만 사용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인스턴트 던전을 비롯한 특수한 상황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되는,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고요의 모래시계
분류 : 잡화(소모품)
등급 : 전설(초월)
고대의 요정들이 발명했다는, 시간을 왜곡시키는 아티팩트입니다.
사용 시 모든 파티원이 가진 모든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회복시켜 줍니다.
*파티원 중 한 사람이라도 ‘전투 중’일 시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모든 파티원이 전투에서 10초 이상 벗어나 있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사용하고 나면 10분 동안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되는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고속 귀환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일반 귀환서에 비해 귀환에 필요한 시간이 다섯 배 가까이 빠르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귀환에 필요한 시간이 빠르다는 장점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이 동일한 아이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매장에서의 가격 차이는 거의 천 배가 넘는 수준.
스크롤 한 번 찢는 데, 골드로 따지면 백만 단위가 넘어가는 수준이었으니 사치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다만 이안이 이 비싼 스크롤을 열 장이나 구매한 이유는 그만큼 위험한 사냥을 진행하겠다는 뜻.
여차하면 귀환서를 찢고 튀어야 할 정도로, 난이도 높은 사냥을 진행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레비아 님의 보호막을 활용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2초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까지는 다른 랭커들도 충분히 이해할 법한 소비라고 할 수 있었다.
돈 아끼다가 한 번 사망하면, 사망 페널티로 인해 손해 보는 비용이 스크롤 수십 개가 넘는 값어치였으니 말이다.
다만 고요의 모래시계는 진정한 사치재라 할 수 있었다.
전투 중에 쿨타임을 회복시켜 주는 아이템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모든 파티원이 전투에서 10초 이상 벗어나 있어야만 사용 가능한 소모품이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이 아이템을 대량으로 매입한 이유는 단 하나.
모든 전투가 시작될 때, 브레스를 비롯한 최상위 스킬들을 전부 쏟아붓기 위해서였다.
이 고요의 모래시계가 있다면, 재사용 대기 시간이 수십 분 단위인 스킬들도 매 전투의 시작 타임에 발동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안이 계산하기에, 이 모래시계를 잘만 활용한다면 사냥 속도를 20~30퍼센트 정도는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물건을 찾아 볼까?”
필요한 소모품들을 인벤토리에 가득 담은 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안은, 마지막으로 경매장에서 사야 할,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분 정도 지났을 때, 이안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차원의 봉인구
분류 : 잡화(소모품)
등급 : 전설(초월)
반경 5미터 이내의 모든 물건(무생물 타입의 아이템, 혹은 구조물)을 아공간에 봉인할 수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봉인된 물건을 다시 꺼내기 위해서는 봉인구를 파괴하여야 하며, 파괴된 봉인구는 복구할 수 없습니다.
‘생명력’, 혹은 ‘영혼’이 있는 대상은 봉인되지 않습니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되는 소모성 아이템입니다.
이안이 차원의 봉인구를 찾은 이유는 간단하였다.
기계 몬스터들의 레벨을 뻥튀기시켜 주는 동력장치를, 좀 더 간편하게 휴대(?)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토르에게 운반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이동시간도 아깝고 말이야.’
물론 호른 산맥 초입에 있는 사냥터에서만 사용한다면, 지금처럼 아예 말뚝처럼 박아 두면 되지만 이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안이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고차원적인 효율이었다.
‘동력장치가 최소 열 개는 있어야 해. 개미지옥에서 최대효율을 뽑아내려면 말이지.’
지금 이안은 오랜 과거, 마계가 처음 업데이트 되었을 때 그랬듯 GM을 눈앞으로 불러낼지도 모를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