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4화 1. 로터스의 부기사단장 카노엘 (1) >
삭풍의 조각을 얻은 이안이 향한 곳은, 당연히 정령산의 남부였다.
프뉴마 마을에 있을 정령 수호자를 만나기 위해, 곧바로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수호자 샬론의 오두막에 도착한 이안은, 다짜고짜 삭풍의 조각을 그에게 내밀었다.
척.
“장로님.”
“오, 이안! 오랜만일세.”
“이거 아시죠?”
“……?”
이안이 다급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무척이나 설레고 있었던 것.
‘내 짐작이 맞다면, 용암의 대지 같은 곳과 연계된 퀘스트일 게 분명해.’
아이템 정보 창에 명시되어 있는 ‘삭풍의 절곡’이라는 곳이, 불용이를 얻을 수 있었던 ‘용암의 대지’와 비슷한 던전일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짐작이 만약 맞다면, 용암 세트에 버금가는 보물들을 주워담을 기회가 새로이 생기는 것이니.
이안이 한달음에 달려온 것도 무리는 아니라 할 수 있었다.
‘크흐흐, 이러다가 정령계에 있는 신화 등급 초월장비는 내가 죄다 쓸어담을 수 있겠어.’
게다가 연계되는 퀘스트의 흐름으로 봤을 때, 삭풍의 대지를 클리어하면서 호른 산맥의 유적까지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이, 이것은 삭풍의 조각……!”
“후후. 역시 아시는군요.”
“대체 이 물건이 자네에게 어찌 있는 것인가?”
“호른 산맥의 기계 괴수를 처치하고, 힘들게 얻은 물건입니다.”
“……!”
“이 물건이 품고 있는 강력한 힘에 대한 정보를…… 장로님이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아 찾아왔습니다.”
이안의 손에 들린 삭풍의 조각을 잠시 동안 살피던 정령 수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잇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 속에는, 의미심장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흐으음…… 확실히 삭풍의 조각이 맞군. 이만한 바람의 힘을 내재할 수 있는 물건이 이것 외에 있을 수가 없지.”
“그렇다니까요.”
“이제야 알겠어.”
“뭐를요……?”
“기계 군단의 녀석들이, 갑자기 비터 스텔라를 향해 몰려간 이유를 말이야.”
이안은 삭풍의 절곡에 대한 이야기부터 빠르게 듣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고 수호자의 말을 경청하였다.
정령 수호자급의 NPC라면 또 어떤 귀한 정보를 줄지 몰랐고, 성급히 행동하다가 그것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 삭풍의 절곡은 기계 문명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겠군.”
“기계 문명이라면……?”
“이미 기계 문명의 녀석들이, 삭풍의 힘을 찾아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일세.”
“……!”
잠시 뜸을 들인 수호자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 삭풍의 조각이, 어째서 기계 괴수의 몸에서 나왔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야…….”
“이미 삭풍의 절곡을 손에 넣은 녀석들이, 그곳의 에너지를 갉아서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네.”
“그렇군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이안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범주 안의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었다.
“흐음…… 엊그제 내려왔던 신탁이 이것을 말함이었던 것인가…….”
“예……?”
이안의 반문에, 샬론은 대답 대신 탁자 위의 구슬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웅웅거리는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성스러운 삭풍의 힘을 탐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막아 내기 위해 삭풍의 수호자들을 깨워 내라.
“……!”
-수호자들을 깨워 내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다면,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여 어둠의 무리를 막아 낼 수 있으리라.
한눈에 보아도 히든 퀘스트를 담고 있는, 두 줄의 신탁.
샬론이 생각에 잠긴 이안을 향해, 부연 설명을 시작하였다.
“삭풍의 힘은 바람의 인정을 받은 용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네.”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 ‘인정’이라는 것을 받기 위해서는, ‘삭풍의 수호자’들로부터 가진 바 능력을 증명해 내야만 하지.”
샬론의 말을 듣던 이안이, 무심코 대답하였다.
“혹시 수호자가 다섯 명 아닙니까?”
“응……?”
“수호자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삭풍의 장비를 얻을 수 있는 거죠?”
“커헉, 그, 그것을 어찌……!”
이안의 말을 들은 샬론은,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인지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황한 샬론과 별개로, 이안이 이 정도 예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이안은 이미 용암의 대지를 모두 격파한 전적이 있고, 삭풍의 절곡이라는 것이 비슷한 던전일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후후, 역시 예상대로야. 이제 삭풍 풀 세트을 맞추러 출발하면 되는 건가?’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음흉하다고 느꼈을 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양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이안.
하지만 그러한 이안의 탐욕(?)은, 첫 걸음부터 삐걱이기 시작하였다.
* * *
타탓! 타다다닥!
카일란 기획 팀 구석에 위치한 직원 휴게실.
그 안에서 잠시 단잠을 자고 있던 나지찬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으, 잠들 뻔했는데.”
이어서 나지찬의 표정은 와락 구겨졌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나른함이 밀려오는 점심시간.
20분 정도의 짧은 낮잠은, 나지찬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사실 이러한 나지찬의 소소한 행복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게 낮잠이라는 것이 허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작 한두 달 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안과 그의 일당(?)이 용천에서 정령계로 넘어갔던 그 역사적인 날.
그날이 바로 나지찬의 소소한 행복이 시작된 날이었던 것이다.
“후…… 다시 잘 수도 없겠네.”
나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타타타탓!
복도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촐싹맞은 사람은 오 대리밖에 없는데…….”
그리고 나지찬의 중얼거림이 끝난 그 순간.
휴게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복도에서 들려오던 시끄러운 소리의 정체는, 나지찬이 예상했던 것처럼 오 대리의 것이었다.
“티, 팀장님.”
“왜? 큰일 났다고?”
심드렁한 나지찬의 대꾸에, 오 대리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헐떡이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오 대리의 말이 이어졌다.
“크, 큰일 난 거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몰랐는데.”
“컥.”
또다시 말문을 막아 버리는 나지찬의 대답에 헛바람을 들이켠 오 대리는,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안이 또 사고를 쳤습니다, 팀장님.”
“뭐, 그거야 항상 있는 일이잖아?”
나지찬의 심드렁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오 대리는 꿋꿋이 말을 계속하였다.
“삭풍의 조각 말입니다.”
“그래, 그거 알지.”
“그게 또 이안의 손에 들어갔답니다.”
“으음,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예?”
눈이 휘둥그레진 오 대리가, 다시 입을 떼었다.
“삭풍의 절곡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이안의 손에 들어간 겁니다.”
“알아.”
“이안이 삭풍 세트까지 얻게 된다면, 정령계 콘텐츠는 아작나는 겁니다!”
“그렇겠지?”
느긋한 나지찬의 태도에, 오 대리는 점점 더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나지찬이 여유로운 이유가, 정령계가 그의 관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1팀 소관이라고 이렇게 느긋하실 때가 아닙니다. 삭풍 세트까지 넘어가고 연계된 퀘스트 받아서 이안이 찰리스 털기 시작하면…… 이안이 성운을 타고 다시 용천으로 넘어올 게 뻔하지 않습니까!”
오 대리는 너무 무서웠다.
이안이 다시 용천으로 돌아오게 될, 그날이 말이다.
이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워라벨이 너무도 크게 좌우되었으니.
그의 두려움은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지찬은 여전히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거 알아, 오 대리?”
“뭘요?”
“이안은 절대로 삭풍 세트를 얻을 수 없어.”
“그게 무슨……?”
씨익 웃어 보인 나지찬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처음부터 설정을 그렇게 잡아 뒀거든.”
“……!”
“삭풍이든, 용암이든…… 아니면 빙혼이든.”
나지찬은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이야기하였다.
“유저 하나가 하나 이상의 콘텐츠를 독식할 수 없도록 말이야.”
“대, 대박!”
“아마 지금쯤, 우리 이안갓이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달콤한 낮잠은 이미 날아가 버렸지만, 나지찬의 표정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에게 한 방 먹여 주었다는 생각에(?) 그의 얼굴에는 활력이 샘솟고 있었다.
‘흐으, 용암의 대지를 이안이 클리어한 게, 이런 식으로 호재가 되어 줄 줄이야.’
당황했을 이안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나지찬은, 점점 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 * *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
“예?”
“용암의 인정을 받은 용사였군.”
샬론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이안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었다.
“후후, 그렇습니다. 역시 이 장비들을 알아보시는군요.”
그가 힘겹게 얻은 용암의 장비들을 NPC가 알아봐 주니, 뿌듯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샬론의 말이 조금 더 이어지자, 이안의 안색은 팍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곤란하게 되었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용암의 인정을 받은 자는, 삭풍의 시험에 도전할 수 없으니 말일세.”
“……!”
“삭풍의 용사가 될 수 있는, 다른 영웅을 찾아 와야겠어.”
이제 다 차려진 밥상을 먹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그것이 엎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 그런 게 어딨습니까!”
샬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밀려들어 오는 배신감(?)과 허탈감에, 이안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용암 세트와 삭풍 세트를 스왑 해 가며 전장을 누비는 상상까지 이미 마쳤던 이안에게 샬론의 이야기는 너무도 가혹했다.
하지만 샬론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아쉽겠지만, 태고부터 정해져 있던 규율이라네.”
“대체 그런 규율을 누가……!”
“아마도 신이 정하셨겠지.”
“…….”
“나도 아쉽네, 이안.”
“후우…….”
“용암의 인정을 받은 자네라면, 삭풍의 수호자들에게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야.”
“당연하죠!”
“나야 자네가 삭풍의 힘을 얻어 빠르게 기계 문명 녀석들을 퇴치해 주길 바라지만…… 나로서는 신의 규율을 거역할 수 없군 그래.”
샬론은 정말 아쉽다는 어조로 이야기하였지만, 허탈감에 가득 찬 이안에게는 그것이 약올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크윽,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했어.’
기세 좋게 콘텐츠들을 뚫어 나가던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요소로 인해 발목 잡혀 버렸으니 말이다.
‘젠장, 삭풍의 절곡인지 뭔지는 버리고, 호른에 있을 유적이나 찾으러 가야 하나?’
하지만 다음 순간, 머리를 굴리던 이안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깐, 이거 생각해 보니 나만 아니면 계속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잖아?’
퀘스트의 연계가 중단되었다고 해서 삭풍의 조각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유저에게 퀘스트를 공유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좋아. 내가 못 먹는다고 해도, 모르는 녀석이 먹도록 방치할 수는 없지.’
허탈감이 조금 사라진 이안이, 다시 눈을 빛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샬론과 눈을 마주친 그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샬론 님.”
“말씀하시게.”
“혹시 삭풍의 인정을 받을 영웅을, 제가 추천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