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6화 5. 첫 번째 심판검 (2) >
* * *
이안은 굳이 유물들의 개수까지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유적지 안에 있는 유적은 정확히 백 개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안이 쓸어 간 유물은 총 열두 개.
무려 10%가 넘는 비율의 유물들을 혼자서 쓸어 간 것이다.
성령의 빛 열여덟 개가 필요한 심판 검을 시작으로, 여섯 개가 필요한 ‘성령의 망토’와 네 개가 필요한 ‘성혼의 갑주’까지 고른 뒤, 남은 스물 두 개의 자원을 사용하여, 무기류를 닥치는 대로 주워 담은(?) 것.
어차피 나머지 장비들은 이안의 눈에 다 고만고만해 보였으며.
옵션이 전부 비공개인지라, 그냥 닥치는 대로 집어 드는 게 최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무식한 유물털이범(?) 때문에 성령의 유적은 속 빈 강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허얼, 저렇게 다 털어가 버리면 다음 유저들은 어떡하라고…….”
“역시 무자비한 녀석이야. 어째 뭐 하나 평범하게 넘어가는 콘텐츠가 없냐?”
“음?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아 있잖아요, 팀장님?”
“남아 있긴 뭘 남아 있어? 좋은 건 귀신같이 다 골라 갔는데.”
“…….”
“아니 대체 왜 무기류만 싹 다 쓸어 가는 거야?”
“망토랑 갑옷도 하나씩 가져가던데요.”
“그거 두 개 말곤 다 무기잖아.”
“…….”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데이터를 확인한 김의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콘텐츠가 중반 이상 진행될 때쯤부터 이미 지금과 같은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대체 칼만 몇 개를 챙겨 가는 거야? 횟집 차릴 것도 아니고.’
진열대 한 쪽에 있던 2포인트 짜리 성혼의 검 다섯 자루 전부를 어째서 다 가져간 것인지.
김의환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의환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쉰 뒤, 직원들을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후우, 다들 일이나 합시다. 쟤 저러는 거 하루 이틀 아니잖아.”
“…….”
“열심히 일해서 다음 달에는 나도 휴가 좀 써 보자고. 옆 동네 나지찬이는 무려 1박 2일이나 휴가를 썼던데……. 배가 아파서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우울함과 동시에 진한 진심이 느껴지는 김의환의 한마디.
그에 옆에 있던 대리 하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사실 열심히 일하는 것보단 우리 팀이 담당 차원계를 바꾸는 게 빠를 것 같지 않습니까?”
“크, 크흠.”
묵직하게 들어오는 팩트에 김의환의 입에서 헛기침이 새어 나왔고, 이어서 그 앞에 있던 다른 사원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니죠, 대리님. 차원계 바꿨다가 이안이 그쪽으로 또 넘어오면 어쩌시려고요.”
“……!”
“이안이 빨리 정령계에서 떠나길 기도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명료한 그녀의 해결책에, 깨달음을 얻은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후, 김 주임, 그렇게 너무 맞는 말을 해 버리면…….”
“후우. 여기에 현자가 한분 계셨군.”
그리고 그렇게 약간의 소란을 끝으로, 오늘도 기획 1팀과 김의환은 씁쓸히 야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 * *
한편 야근으로 인해 우울한 기획 1팀만큼이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유적지의 관리자였다.
-이제 다 고른 거겠지, 이안?
“그럼요. 사실 더 가지고 싶긴 하지만, 이제 남은 성령의 빛이 없는걸요.”
-후우……. 공짜 너무 좋아하면 머리털 다 빠질 걸세.
“공짜라뇨. 제 노력과 도전정신으로 얻어 낸 값진 결과물인데요.”
-말이나 못 하면…….
그리고 관리자와 무척이나 상반된 행복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이는, 당연히 인벤토리를 빵빵하게 채운 이안이었다.
‘흐흐, 퀘스트 한 번에 이만한 보상이라니……. 카일란이 언제부터 이렇게 퍼주는 게임이었지?’
이안은 지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봉인을 해제한 모든 유물들 중 영웅등급 이하인 아이템이 단 한 개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려 신화 등급의 아이템도 두 개나 되었으니 보상을 받은 이안의 입장에서도 어리둥절한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심판 검이야 당연히 신화 등급일 줄 알고 있었지만, 이 망토도 신화등급이라니.’
게다가 용기사단 전용으로 길드에 귀속시키려고 쓸어 담은 보급형(?) 검들마저 전부 전설 등급이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 겜생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도 없을 텐데, 한 번쯤 이런 과도한(?) 보상도 받을 법 하지.’
이안은 획득한 유물들의 정보 창은 퀘스트를 전부 마무리 지은 뒤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우선적으로 등급만 확인하였음에도 이미 충분히 흡족했던 데다, 이곳 유적을 나가기 전에 아직 확인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이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관리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본론을 꺼내기 전에, 다시 한 번 인사치레를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하튼 감사합니다, 관리자님. 덕분에 좋은 장비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야 뭐, 딱히 자네를 위해 한 것도 없네만…….
조금은 까칠한 관리자의 말투에도, 이안은 아랑곳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또 뭔가?
“혹시 뭐 하나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뭔가 새롭게 운을 떼려는 이안의 말에, 또다시 불안해진 관리자의 표정.
그런 그의 눈앞에, 이안은 뭔가 반짝이는 것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한 보랏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주먹만 한 보석이었다.
“제가 유적을 올라오면서, 이런 걸 몇 개 얻었거든요.”
-허억.
“혹시 이 소환석들의 봉인을 해제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이안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확인한 관리자 NPC는 마치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이건……!
그 물건은 관리자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어째서 이 괴팍한 인간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이어서 이안과 다시 눈이 마주친 관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가디언의 소환석이 어떻게…….
* * *
띠링-!
-‘고대의 정령 미루 Ⅲ(히든)(에픽)’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모든 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연계 퀘스트의 최종 보상을 수령합니다.
-명성(초월)을 45,000만큼 획득하였습니다.
-‘NPC 아렌’과의 친밀도가 50만큼 증가합니다.
-정령 ‘미루’와의 친밀도가 50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관리자와의 대화를 통에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부분까지 모두 얻어 낸 뒤, 아렌과 미루를 대동한 이안은 ‘샤이야’ 봉우리를 곧바로 빠져나왔다.
샤이야 봉우리는 처음 이안 일행이 도착했을 때보다도 더욱 생기가 돌고 있었으며, 이제 쌓여있던 만년설들은 거의 녹아내린 상태였다.
방금까지 이안이 공략했던, ‘생명의 계곡’ 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펄럭-!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불용이’를 탑승한 이안.
그의 목적지는 이제 ‘마이얀 산맥’이었다.
미루의 퀘스트를 전부 클리어하였으니 이제 아렌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이안 님, 저희 집은 마이얀 산맥에 있어요.”
“거기가 어딘데?”
“동남쪽으로 쭉 내려가시면 금방이에요. 제가 찍어 드릴게요.”
“그러지 뭐.”
오랜 컨텐츠 공략으로 인해 피로와 노곤함이 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아렌을 집까지 데려다 주는 이안!
퀘스트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이안의 기분이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터였다.
“이안 님, 정말 대단했어요.”
-아렌의 말에 동의해. 그렇게 차르타를 잘 다루는 소환술사는 처음 봤지.
아렌과 미루의 칭찬에, 그들을 태우고 있던 라카도르가 뭔가 불만스런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주인이 그렇게 대단할 리가 없다.
“아냐. 진짜 엄청났는걸?”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내 별명을 불용이라고 지었을 리 없는데…….
-불용이, 귀엽고 좋은데 왜.
-하아, 조그만 요족妖族 녀석이 내 심기를 건드리는군.
-빨리 날기나 해, 셔틀.
-후우우.
그리고 그렇게 화목한(?) 대화 속에서, 이안 일행은 금방 마이얀 산맥의 오두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명의 계곡에서 생명수를 채집한 아렌이 오랜 여정 끝에 드디어 집에 돌아온 것이다.
끼이익.
“할아버지, 저 왔어요!”
“오오, 아렌. 돌아왔구나!”
이어서 잠시 후.
모든 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안에게, 마지막 선물이 하나 주어졌다.
띠링-!
-NPC ‘아렌’과의 친밀도가 Maximum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부터 ‘아렌’을 ‘가신’으로 등용할 수 있습니다.
-아렌
등급 : 전설(초월)
종족 : 엘프
클래스 : 소환술사(정령술사)
* * *
둥- 둥- 둥-
소르피스 내성의 광장 한구석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그 웅장한 소리에, 광장에 있던 수많은 유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응? 뭐지? 오늘 광장에서 무슨 행사라도 있는 건가?”
“글쎄. 카일란 공식 홈페이지에서 그런 얘기는 본 적이 없었는데…….”
거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북소리가 울려 퍼진 곳을 향해 고정되었고, 많은 이들이 그곳을 향해 다가가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호기심이 일었으니 말이다.
“어, 저 방향이면 로터스 길드의 길드 거점이 있는 곳인데?”
“오, 뭐지? 신박한 길드 콘텐츠라도 진행하려는 건가?”
“야, 빨리 와! 한번 가 보자.”
“알겠어!”
둥- 둥- 두둥-!
커다란 광장 전체에 울릴 정도로 거대한 북소리는 약 30초 동안 울려 퍼졌고, 그 사이 수많은 유저들이 하던 일도 멈춰 둔 채 로터스 길드 거점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이익-!
로터스 길드 거점의 커다란 정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드르르르륵-!
“와, 뭐지?”
“야, 스샷 찍어. 커뮤니티에 얼른 올리자.”
“넌 스샷 찍어. 난 영상으로 찍을래.”
“좋아.”
로터스의 길드 거점은 소르피스 내성 안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이제는 거의 소르피스 성의 랜드마크로 불리울 정도로, 화려하고 거대한 로터스의 건물.
가까이 다가온 유저들은 로터스 거점건물의 외관에 새삼 감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박. 대체 이 건물 짓는 데 얼마나 들었을까?”
“바보야, 건축비가 문제가 아니야.”
“그럼?”
“여기 땅값이 평당 1억이 훨씬 넘는다고.”
“커헉! 1억 골드?”
“그래. 요즘은 거의 2억 골드 다 된다고 들었어.”
“미친……! 여기 부지가 백 평은 그냥 넘을 것 같은데. 대체 로터스 길드는 얼마나 돈이 많은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얼마나 돈이 많으면 게임에다가 수백억을 쏟아부어?”
“크으, 진짜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던 그때.
쿵-!
커다란 진동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장내에 정적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
로터스 길드의 정문 앞으로 거대한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우우웅-!
하늘의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려온, 하얗고 거대한 빛의 기둥.
군중들은 커다래진 눈으로 그 빛줄기를 응시하고 있었고,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빛의 기둥이 사라지면서, 온통 하얀 빛으로 만들어진 반투명한 드래곤의 형상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캬아아오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뿌우우-!
갑자기 길드의 안쪽에서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빛의 드래곤 주변으로 십수 마리의 황금빛 비룡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캬아아!
-크아아오!
이어서 활짝 열린 로터스 길드의 정문 밖으로, 새하얀 갑주를 입은 길드원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와, 저거 뭐야?”
“미쳤다! 엄청 멋지잖아?”
“대박! 이거 진짜 대박이야!”
“빨리 누가 커뮤니티 들어가서 무슨 일인지 좀 알아봐!”
“크아아, 용기사단이잖아?!”
길드 안쪽에서 걸어 나온 길드원들은, 저마다 드래곤의 앞으로 다가가 가벼운 몸짓으로 올라탔다.
타탓
철컥- 촤라락-!
그러자 마치 드래곤과 하나가 되기라도 하듯, 비룡의 주변에 흐르던 황금빛 기운이 길드원들의 하얀 갑주에 문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우오오!”
“미쳤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뿌우우우우-!
길게 울려 퍼지는 커다란 뿔피리 소리와 함께, 소르피스의 창공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쐐애애액-!
그리고 잠시 후.
그 큰 그림자는, 광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새하얀 빛의 드래곤에 그대로 날아들었다.
쿵-!
황금빛의 드래곤에, 불타는 용암의 장비들을 두르고 있는 한 남자.
빛의 드래곤에 겹쳐진 그들은, 새하얀 드래곤의 기운을 그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고오오오오-!
이어서 다음 순간.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앞에 보랏빛의 월드 메시지가 한 줄 떠올랐다.
띠링-!
-소르피스성 최초의 ‘용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