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3화 4. 고대 성령의 유적 (2) >
* * *
지금 이안의 인벤토리에는 ‘성령의 빛’ 아이템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잡화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전설(초월)’이라는 최상위 등급을 가진 아이템이, 무려 오십 개가 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처음 유적지로 진입할 때 돌파했던 세 개의 관문에서 각각 3개씩을 얻었으며, 방금 전 세 마리의 가디언을 격파하면서 또 각각 15개 씩 획득하였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총 54개의 ‘성령의 빛’이 이안의 인벤토리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고대의 성판에 끼워 맞추면 도전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더니……. 이 둥그런 원판이 아이템 정보 창에서 봤던 그 고대의 성판인가 보군.’
이안은 망설임 없이 빛나는 세 개의 구슬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심스레 원판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마치 빨려 들어가듯 원판을 빠르게 회전하던 세 개의 구슬들이, 짧은 기계음과 함께 끼워 맞춰졌다.
드르륵- 탁-!
이어서 이안의 눈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성령의 힘이 충분히 충전되었습니다.
-이제 유적에 입장합니다.
우우우웅-!
이안이 메시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장내에 또다시 거대한 진동음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하얀 빛으로 밝던 공간 내부가 점점 어둑해지기 시작하였다.
“으왓?”
“뭐, 뭐야? 무슨 일이지?”
당황한 아렌이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렸고, 이안은 긴장한 채 사위를 살폈다.
정황상 어떤 새로운 보스나 관문지기가 또 이 안에 나타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던전과 관문을 돌파한 경험으로 인해 생긴, 어떤 통찰력 같은 것이랄까.
그리고 미루 또한, 이안과 같은 생각인 듯하였다.
-긴장해, 이안.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하니까.
“알겠어. 걱정 말라고.”
미루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이안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성령의 빛 아이템 정보 창에는, 도전자의 자격을 얻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라 되어 있었어.’
쿠구궁-!
‘그렇다면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총 횟수는, 18회겠지.’
어떤 난이도의 관문일지, 아니, 어떤 콘텐츠일지조차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통해 나름대로 상황을 유추해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이안.
하지만 잠시 후.
이안은 자신의 통찰력(?)이 틀렸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
그르릉- 쿠우웅-!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닥에서부터 나선형 계단이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으니 말이었다.
띠링-!
-모든 가디언이 소멸되었으므로, 유적의 상층부가 개방됩니다.
-‘고대의 정령 미루 Ⅱ(히든)(에픽)’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 하였습니다!
-고대의 정령 ‘미루’와의 친밀도가 25만큼 증가합니다.
-봉인된 고대의 정령 마법서 (영웅)(초월)을 획득하였습니다.
-‘고대의 정령 미루 Ⅲ(히든)(에픽)’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주르륵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살짝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여기서 이렇게 쉽게…… 끝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급 전개에 놀란 것이다.
‘뭐지? 그럼 대체 미루는 왜 긴장하란 말을 했던 거지?’
이어서 하얀 빛이 떨어져 내리는 허공을 향해, 이안의 고개가 자동으로 들려 올라갔다.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것은, 어딘가 ‘성령의 수정’이 나타났다는 말일 터.
그리고 이안의 시야에, 새하얗고 찬란한 크리스탈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세르가의 성탑, 최상층으로 이동합니다.
-자격, ‘고대의 전당에 등록된 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유적의 관리자’가 당신을 초대하였습니다.
-‘성령의 유적’에 입장합니다.
* * *
사실 이안은 알 수 없었지만, 원래대로라면 그의 추측과 통찰(?)은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원래 이 원뿔 형태인 공간의 이름이 ‘도전의 방’인 것이나,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하다던 미루의 대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다만 이안이 그 ‘도전’을 생략하고 상층부로 올라가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도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안이 이미 모든 가디언을 소멸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사실과 별개로 이안은, 새로 발생한 세 번째 연계 퀘스트를 먼저 확인해 보았다.
상층부로 이어진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퀘스트의 정보를 미리 파악해 두기 위해서 말이다.
-‘고대의 정령 미루 Ⅲ(히든)(에픽)’
당신은 고대의 유적이 잠들어 있는 곳.
‘성령의 수정’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략……
유적의 안에는 미루를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특별한 아티팩트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매입하여, 미루에게 전달해 주도록 하자.
퀘스트 난이도 : 알 수 없음.
퀘스트 조건 : ‘성령의 빛’아이템 5개 이상 보유.
NPC ‘미루’와의 친밀도 50 이상.
‘고대의 정령 미루 Ⅱ(히든)(에픽)’퀘스트 클리어.
……중략……
클리어 조건 : ‘성령의 비약’ 아이템을 미루에게 전달.
제한 시간 : 없음
최종 보상
–명성(초월) +45,000
-NPC 아렌과의 친밀도 +50
-???
*거절하거나 포기할 시 ‘미루’와의 친밀도가 대폭 감소합니다.
*거절하거나 포기할 시 다시 도전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퀘스트 내용을 읽던 이안은,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아티팩트를 매입하라고?’
시스템 창의 내용 자체는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에게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하나하나 계단을 오르던 이안의 귓전으로, 이안보다 훨씬 더 당황한 미루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안?
“응? 뭐가?”
-가디언이 다 사라졌잖아!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가디언이라니?”
너무도 태연한 이안의 대꾸에, 미루는 더욱 당황하였다.
미루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여기 도전의 방에서, 가디언을 처치해야만 해.
“음……?”
-아까 성탑의 바깥을 지키고 있던, 그 세 녀석 중 하나를 골라서 상대해야 한다고.
이번에는 이안이 당황하였다.
“가디언이라면, 이미 내가 상대하고 왔는걸?”
-뭐어?
“이미 차례대로 세 놈을 다 만났어.”
순간 말문이 막힌 미루는, 다시 이안에게 설명을 시작하였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이안은,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듯하였으니 말이다.
-아니,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잠깐.
이안의 어깨에 앉아 주절주절 떠들던 미루는, 뭔가 깨달았는지 순간 말을 멈추었다.
“……?”
-설마 이전 관문에서 가디언 셋을 이미 만났고……. 전부 다 처치해 버린 거야?
“당연하지. 내가 이겼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잖아.”
이안의 대답에, 미루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혼자서 가디언을 전부 처치했다고?’
고대의 힘을 가진 자신이 없이, 혼자서 모든 가디언을 처치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루는 이 성령의 탑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들까지 알지는 못한다.
각 방에 존재하는 심판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만 미루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이곳 ‘도전의 방’에서 가디언을 상대로 승리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뿐.
그렇기에 약간의 오해(?)까지 곁들여질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이안을 더욱 괴물 보듯 보게 된 것이었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미루와 달리, 이안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올라가기나 하자, 미루. 네가 찾아야 한다던 성령의 수정이, 저 위에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미루가 다시 잠자코 그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놀랐던 그녀의 표정은 어느 정도 진정된 모양새였다.
지금의 상황이 예측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것만은 분명하였지만, 그렇다고 나쁜 방향은 아니었으니까.
‘휴우,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미루는 알 수 없었다.
도전의 관문을 프리패스하게 된 지금의 상황이 유적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말이었다.
* * *
-어서 오시게, 도전자여.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성령의 유적 곳곳에 빛나는 하얀 빛 줄기만큼이나,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올라간 이안 일행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반투명한 유령 느낌의 새로운 NPC였다.
그에게 다가간 이안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확인했던 시스템 메시지들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신이 유적의 ‘관리자’인가요?”
이안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다네, 도전자여. 내가 바로 이곳을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켜왔던 유적의 관리자이지.
옆에 있던 미루가, 관리자를 향해 물어보았다.
-당신은 이름이 뭔가요?
그리고 그런 미루를 발견한 관리자의 주름진 두 눈이, 살짝 크게 확대되었다.
-오호라. 특별한 힘을 지닌 정령이로군. 분명 요정의 냄새가 느껴지는데……. 어떻게 성령의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거지?
관리자의 물음에, 미루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할아버지. 제 질문이나 대답해 주시죠.
관리자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름을 잊은 지 오래라네.
“…….”
-태초부터 나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태어났고, 때문에 누구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지.
“그렇군요.”
-내게 이름이라는 것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개념이었다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겠습니다.”
관리자라는 NPC의 독특한 콘셉트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의 NPC라는 존재가 원래 각자 자신의 역할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관리자 노인의 신세는 모든 NPC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잠시 상념을 하던 이안을 향해 관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튼 오랜만의 손님이라 무척이나 반갑군, 젊은이.
“그렇습니까?”
-자네가 도전을 실패하여 이곳에 올라오지 못할까봐 조마조마했을 정도로 말이야.
“그……렇군요.”
유쾌한 표정이 된 관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사로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내 역할을 수행해야겠지.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공허했던 공간에 새하얀 빛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