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0화 3. 고대의 가디언 (3) >
* * *
본격적으로 중간계에 랭커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수 개월이 흘러갔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거의 모든 길드들이 중간계에 거점을 생성하였으며, 랭커들만의 전유물이던 중간계의 숨겨진 콘텐츠들도 이제 제법 대중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간계 중에서도 가장 많은 유저들에게 공략되고 있는 명계의 경우, 제법 깊숙한 콘텐츠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아케론을 지나 에레보스 첫 번째 구역이 거의 정복된 것은 물론.
최상위 길드들의 경우 시름의 강 코퀴토스와 불길의 강 플레게톤까지도 이미 건넌 상태였으니 말이다.
특히 플레게톤 너머의 ‘죽음의 불길Death Inferno’지역에서는, 인간 유저들과 마족 유저들 간의 대치가 아주 활발하였다.
에레보스 초반 지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필드가 인스턴트 던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적대 진영끼리 만날 일이 많이 없었지만, 데스 인페르노 지역은 전부 오픈 필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콘텐츠가 대립과 대치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계 진영의 대전사大戰士 카이는, 이곳 데스 인페르노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허억, 지금 카이가 대마법사 슐나르의 결계를 부숴 버렸어요!
-이러면 오히려 아타르 길드 딜러진이 위험해지는데요!
-와아앗! 아타르 랭커들 지금 당황했어요! 결계가 깨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죠!
-카이, 정말 대단합니다! 방금 대체 무슨 스킬을 사용한 거죠? 내구력 20만짜리 방어 결계가 3초 만에 박살이 나 버렸어요!
-스킬을 떠나서 이미 공격력 자체가 미친 수준인 것 같은데요?
-아, 카이가 아타르 길드 원거리 딜러들 앞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갑니다! 이대로라면 전멸을 면할 수 없어요!
-아타르 길드 마스터도 단칼에 게임 아웃된 상황입니다. 카이를 막을 수 있는 유저는 아타르 길드에 없다고 봐야 돼요.
한국에 메이저 게임 채널 YTBC가 있다면, 미국에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게임 채널 GGT가 있다.
그리고 최근 이 GGT에서는, 매일 데스 인페르노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들을 방송하며 구독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방송들 중에서도 가장 핫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콘텐츠가 바로, 대전사 카이가 참전한 전투 영상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와, 카이 미쳤다……! 혼자서 대체 몇 킬을 하는거야?
-크……. 내가 이래서 카이 방송을 안 볼 수가 없다니까? 혼자서 어지간한 길드 하나는 그냥 삭제해 버리네.
-아마 아타르 길드에서도 이럴 줄은 몰랐을 걸? 오늘이야말로 카이 목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초기 중간계의 ‘신의 말판’ 전장에서는 결국 이안에게 패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는 명성을 가진 유저인 대전사 카이.
최근들어 카이의 활약이 더욱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단연 진영 간 전쟁이 잦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카이는 인간진영 유저들과의 국지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였고, 그에 카일란 팬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흐, 역시 갓 카이 님이 그렇게 쉽게 함정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이게 카이 님의 노림수였던 거야.
-글쎄. 카이가 확실히 대단하기는 했지만, 그 부분까진 동의할 수 없겠는걸?
-맞아. 카이가 함정에 걸려 들어간 건 사실이었고. 다만 그 함정을 힘으로 부수고 나온 게 팩트인 것 같아.
-흠, 그런가?
-그나저나 카이, 초월 레벨 70 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 그러니까 저 정도 파괴력이 나오는 거겠지.
-크……. 부럽다. 난 아직 중간계 밟아보지도 못했는데…….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었지만, 미국서버의 팬들은 카이의 초월 레벨을 대략 70레벨 대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다른 상위권 랭커들의 레벨은 60레벨 초반대가 대부분이었으니, 카이의 대검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진짜 대박이다. 이러다가 인간 진영 길드들 싹 다 후방으로 밀려 버리겠어.
-그러게. 류첸이라도 기계 문명 퀘스트 한다고 라카토리움으로 빠졌기에 망정이지. 걔까지 계속 명계에 죽치고 있었으면, 진짜 인간진영은 발붙일 곳이 없었겠는 걸?
카이의 독무대를 마지막으로 전투가 전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랭커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대며, 채팅방에서 나가지 않는 미국 서버의 유저들.
그리고 방송을 마무리하기 위해, GGT해설자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뭐 이렇게 되면, 망각의 강 레테를 가장 먼저 찾는 것도 결국 카이가 되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는 명계 콘텐츠도 확실히 반환점을 넘어선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3시간 뒤, 죽음의 탑 공략 영상으로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 *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튀어 나간 이안의 기습 공격은, 아쉽게도 무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이안의 공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가디언의 고유능력이 반사적으로 발동된 것이다.
지이잉-!
-심연의 시험관 ‘뮈르’가 고유 능력 ‘심연의 장막’을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피해가 무효화됩니다.
-‘뮈르’의 생명력이 0만큼 감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이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항상 여러가지 변수에 미리 대처하고 있었던 이안은, 침착하게 측방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타탓-!
이어서 이안은 다시 녀석과 거리를 벌리며, 한차례 심호흡을 하였다.
“후웁!”
일단 기습 공격을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한번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었다.
‘무리하면 안 돼.’
심연의 시험관은 99레벨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안이 용암지대에서 사투를 벌였던 ‘불용이’보다도, 무려 9레벨이나 더 높은 무지막지한 레벨이었다.
이안과 직접 비교한다면, 20레벨도 더 차이나는 레벨인 것.
때문에 이안은, 초 긴장 상태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녀석의 전투 능력이 어떤 식으로 세팅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을 제외한 모든 장비의 능력치가 봉인되어 버린 지금, 녀석의 공격에 잘못 맞으면 그대로 황천행일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었다.
‘시간제한이 없는 zhs텐츠야. 우선 놈을 죽이는 것보다 내가 안 죽는 게 더 중요하겠지.’
가디언과 대치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는 이안.
이안은 세르가의 성탑에 들어서기 전, 녀석이 보여줬던 공격 패턴에 대해 다시 한번 복기해 보았다.
‘작은 크기의 어비스 홀 같은 걸 쏘아 댔었지. 끌려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해.’
가디언이 쏘아 보내던 심연의 회오리는 비교적 느린 속도를 가진 투사체였다.
하지만 주변의 물체들을 끌어당기는 인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대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회오리가 가진 인장력을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테니, 인근에 다가오기 전 미리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할 수 있었다.
-키야아오오-!
그리고 잠깐 동안의 탐색전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이안과 ‘뮈르’의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외형을 가진 비행 몬스터답게, 녀석은 이안보다도 훨씬 민첩성 수치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단순히 달리는 것만으로 녀석을 쫓아가거나 녀석에게서 달아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스킬이나 고유 능력이라도 쓸 수 있다면, 아니, 아이언만 탈 수 있었더라도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터.
하지만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해결을 봐야 하니, 쓸데없는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캬아악-!
“후으읍……!”
가까스로 가디언의 공격을 피해 낸 이안이, 깊게 심호흡 하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스륵-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앙-!
이안이 있던 자리로 떨어져 내린 커다란 심연의 회오리가 석면을 부수며 굉음을 터뜨렸다.
‘이대로는 곤란한데…….’
그리고 물리적인 스피드로 녀석을 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안은, 작전을 조금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스텟에서 밀린다면, 반응속도로 대응해야겠어.’
수많은 기둥이 세워져 있는 실내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장을 축소시키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순간 반응 속도로 녀석의 스피드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그 전략은, 조금씩 먹혀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미꾸라지처럼 기둥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이안에 분노한 가디언이, 무리해서 좁은 공간으로 진입한 것이다.
-키에엑-!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침착하게 녀석의 날갯죽지를 향해 검을 그어 올렸다.
타탓- 촤아앙-!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연스레 확대되는 이안의 동공.
‘딜이 얼마나 들어가려나.’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은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시스템 메시지로 확인한 공격의 결과 값이, 너무 극단적으로 저조했으니 말이었다.
-심연의 시험관 ‘뮈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뮈르’의 고유 능력 ‘고대의 수호’가 발동합니다.
-‘뮈르’의 방어력이 순간적으로 증폭됩니다.
-‘뮈르’의 생명력이 1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1’이라는 충격적인 대미지에 당황한 이안의 귓전으로, 다시 한번 폭발음이 터져 나온다.
퍼엉-!
그 찰나에 다시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뮈르가 이안의 바로 옆에 심연의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심연의 시험관 ‘뮈르’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79,801만큼 감소합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있어?’
단숨에 쭉 하고 깎여 나가는 생명력을 보며, 이안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훔쳐내었다.
만약 이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이미 혼비백산하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이어지는 뮈르의 공격을 정신없이 피해 내는 와중에도, 이안은 침착하게 머릿속의 정보들을 복기하였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카일란에 깨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콘텐츠는 없으니 말이야.’
깨지 말라고 만들어 놨던 콘텐츠도 종종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기 어린 표정으로 더욱 의지를 불태우는 이안.
이안은 단순히 레벨이 부족해서 딜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안의 레벨이 훨씬 더 낮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 이상 차이나는 것도 아니었고, 때문에 한 자릿수의 말도 안 되는 대미지를 봐야 할 만큼의 압도적인 스텟 차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뭔가 해법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정보가 있었다.
-‘악마의 낙인’은 최대 3회까지 중첩되며, 낙인이 3회 중첩된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시 해당 공격은 대상의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 * *
사실 녀석을 처치할 수 있는 파훼법은, 유저에게 대놓고 주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고른 무기의 고유 능력에, 방어력을 무시할 수 있는 조건부 옵션이 달려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안이 곧바로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급박하고 정신없는 지금의 상황 때문이었다.
애초에 고유능력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너무 짧았을 뿐더러, 전투가 지속되는 동안 숨 고를 시간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법을 떠올려 낸 이상, 어떻게든 해내야만 할 것이었다.
‘5초 안에 3스텍을 쌓는다는 게 이 괴물 같은 녀석을 상대로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 내야지 어쩌겠어.’
심판검의 패시브 고유 능력인 ‘악마의 낙인’은, 대상의 공격을 회피한 즉시 치명타로 역공하였을 때 발동하는 표식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떻게 해낸다 해도, 문제는 이 낙인의 지속 시간이었다.
처음 때려 박은 낙인이 5초가 지나 사라지기 전에 두 번의 패시브를 추가로 터뜨려야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극한의 반응 속도와 컨트롤, 그리고 집중력을 요하는 스킬인 것.
이안은 가디언의 스킬 패턴을 집요하게 파악하여 최대한 안전을 확보한 뒤, 슬슬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쐐애액-!
기둥 사이로 파고드는 가디언의 날카로운 발톱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내며, 그와 동시에 녀석의 옆구리를 노리며 검을 휘두른 것.
그리고 이안의 첫 번째 시도는, 깔끔하게 성공하며 낙인을 만들어 내었다.
띠링-!
-심연의 시험관 ‘뮈르’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뮈르’의 고유능력, ‘고대의 수호’가 발동합니다.
-‘뮈르’의 방어력이 순간적으로 증폭됩니다.
-‘뮈르’의 생명력이, 1만큼 감소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판 검의 고유 능력, ‘악마의 낙인’이 발동합니다.
-지속 시간 : 5초
하지만 낙인을 하나 찍어 내는 것과 3중첩을 성공해 내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어마어마한 난이도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흐으읍!”
곧바로 이어진 2차 시도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실패해 버렸으니 말이다.
휘릭.
-공격이 빗나갔습니다!
-‘뮈르’의 생명력이 1만큼 감소합니다.
……후략……
“젠장.”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곧바로 검을 휘두른 나머지, 조건을 충족시키기는커녕 공격을 명중시키는 것조차 실패해 버린 것.
하지만 실수하여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때문에 이안은 실망하지 않았다.
“차핫!”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가디언의 약점을 노리는 이안!
부우웅-!
시간이 지날수록 검에 익숙해진 이안의 얼굴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이안의 눈에 점점 더 타이밍이 보였다.
‘그래. 여기서 이렇게 비집고 들어가면……!’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찰나간의 타이밍과 미세한 정확성으로 결정되는 패시브의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판 검의 고유 능력 ‘악마의 낙인’이 발동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심판 검의 고유 능력 ‘악마의 낙인’이 발동합니다.
-‘악마의 낙인’이 2회 중첩되었습니다!
……후략……
-‘악마의 낙인’이 3회 중첩되었습니다!
-악마의 기운이 강화됩니다!
이어서 그림 같은 움직임으로 3회 연속 인장을 박아 넣은 이안은 그대로 허공으로 뛰어 올라, 녀석의 가슴팍에 심판 검을 박아 넣었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