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6화 2. 세르가의 성탑 (2) >
* * *
마치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천공의 섬처럼 깊고 거대한 어둠에 부유하고 있는 황금빛 세르가의 성탑.
저 복잡하고 더러운(?) 결계를 피해 성탑의 입구에 발을 딛기 위해서, 이안은 차분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계곡 입구의 관문에서는, 성령의 결계에 부딪치는 순간 시작 지점으로 워프되는 시스템이었지.’
이안은 지금까지 여러 번 관문을 통과하였지만, 결계에 부딪쳐 본 것은 처음 만났던 계곡 입구의 관문에서 뿐이었다.
때문에 지금 세르가의 성탑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의 경우, 결계에 부딪쳤을 때 어떤 페널티가 부여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작정 도전했다가 결계를 피해지 못했는데, 아예 계곡 바깥으로 빨려 나가 버리면 그만한 지옥이 또 없겠지.’
하여 이안은, 결계의 페널티를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 먼저 실험을 해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이안은 소환술사였고, 제법 많은 소환수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소환수들 중 하나를 활용하여 얼마든지 실험이 가능하였다.
계곡 입구의 관문에서도, 탑승한 소환수가 아니라면 별개의 개체로 인식되던 것을 이미 확인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리스크가 적은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핀, 부탁해. 날아가서 저 결계에 한번 부딪쳐 줘.”
-꾸룩- 꾸루룩-!
이안의 명령을 받은 핀이, 커다란 날개를 펼쳐 올리며 세르가의 성탑을 향해 빠르게 비행하였다.
그리고 녀석이 결계를 만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띠링-!
-소환수 ‘핀’이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핀’의 이동속도가 10초 동안 20퍼센트만큼 느려집니다.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중략……
-결계에 3회 충돌하였습니다.
-‘유적(어둠)’ 지하 1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응……?”
결계에 몇 번 부딪친 핀은, 하얗게 일렁이는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디론가 송환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과 시스템 메시지를 동시에 확인한 이안은, 의아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유적 어둠……이라고? 이건 또 뭔데?’
또 한 번 예측을 벗어난 상황에 당황한 이안은, 소환수 정보 창을 활용해 빠르게 핀이 송환된 좌표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좌표가 의미하는 위치를 깨달은 순간, 벙 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아렌이 이안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안 님,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아렌의 질문에, 이안은 대답 대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안이 도착한 곳은 절벽 앞.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바로 앞이었다.
‘이 정육면체로 까마득하게 패여 있는 지하 공간이 유적-어둠인가 보네. 핀이 위치한 좌표가 저 아래 어딘가인 걸 보니 말이야.’
너무 농도 짙은 어둠이라 그런지, 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이안은 좌표상 저 아래쪽 어딘가에 핀이 있을 것임을 확신하였다.
‘아예 카카를 한번 보내 봐야겠어. 저 아래쪽에 뭐가 있는지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
핀을 소환 해제하여 아공간으로 돌려보낸 이안은, 이번에는 카카를 소환하였다.
시야를 공유받을 수 있는 카카라면, 더 구체적인 정보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금 느릴 뿐 핀과 마찬가지로 비행이 가능한 녀석이었으니, 임무 수행에 카카만큼 적격인 녀석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카카, 내 말 이해했지?”
“꼭 내가 가야 하냐, 주인?”
“왜?”
“저 아래, 너무 어둡고 무섭다.”
“응. 꼭 네가 가야 하니까 잔말 말고 움직이도록.”
“키잉…….”
오랜만에 정찰 임무를 받아 포롱거리며 결계를 향해 다가가던 카카는, 잠시 후 결계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핀보다 훨씬 느릿한 움직임 때문에 결계에 세 번 부딪치는 데까지 오히려 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크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노예 ‘카카’가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카카’의 이동속도가 10초 동안 20퍼센트만큼 느려집니다.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중략……
-결계에 3회 충돌하였습니다.
-‘유적(어둠)’ 지하 1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미리 카카와 시야를 공유해 두었던 이안은, 긴장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하였다.
카카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하로 송환됨과 동시에 까맣게 변했던 카카의 시야는, 점차 어둠이 흐려지면서 주변 환경을 공유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은 또다시 크게 확대되었다.
‘뭐야, 저 지하의 어둠 속에도 여기처럼 똑같이 결계가 있잖아?’
시야 공유를 통해 이안이 확인한 광경은, 역시나 이안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처음 유적 지하라는 단어를 봤을 때 이안이 상상했던 것은 어떤 새로운 ‘던전’ 같은 것이었는데, 카카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던전은커녕 지금 이안의 눈앞에 있는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카카의 눈앞에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뚫려 내려가 있었으며, 그 공간을 건너가야만 ‘세르가의 성탑’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안이 밟고 있는 공간과 다른 점은, 모든 공간이 좀 더 어두컴컴하고 하방이 아닌 상방으로도 육면체의 공간이 뚫려 있다는 정도.
‘그냥 여기서 한 층 내려간 셈이잖아?’
뭔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한 이안은 다시 카카에게 오더를 내렸다.
그리고 그 명령은, 눈앞에 보이는 결계들에, 한 번 더 부딪쳐 보라는 것이었다.
‘지하 1층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걸 보니, 지하 2층도 분명히 있을 거야. 결계 돌파에 실패할 때마다 한 층씩 지하로 내려가는 시스템일 것 같네.’
이어서 잠시 후.
이안은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계에 3회 충돌하였습니다.
-‘유적(어둠)’ 지하 2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결계에…….
……중략……
-‘유적(어둠)’ 지하 3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유적(어둠)’ 지하 4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중략……
-‘유적(어둠)’ 지하 10층으로 강제 소환됩니다.
계속 결계를 타고 내려간 카카가 지하 10층까지 내려가 버렸으니 말이다.
“으음, 지하 10층이라……. 이 아래로 더 내려갈 수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안은, 몇 가지 재밌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카카의 시야를 면밀히 살핀 결과, 특이점들을 찾아낸 것이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결계 난이도 자체가 점점 더 떨어지는 것 같네. 대충 봐도 결계 숫자도 훨씬 적고, 패턴도 단순해진 것 같고.’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안은 이곳의 기획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최대한 상층부에서 클리어하고 들어가야 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겠어. 괜히 난이도 분할을 해 놓은 게 아닐 거란 말이지.’
모든 판단을 마친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내고 나자, 더욱 승부욕이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조건 한 큐에 클리어 해야겠어. 안 되는 건 되게 만들어야지.’
한 번 실패한다고 해서 모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비장한 표정이 된 이안.
이안은 본격적으로, 결계 공략을 위한 세팅을 시작하였다.
* * *
펄럭- 쏴아아-!
커다란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차갑고 맑은 공기가 온몸을 덮쳐 온다.
어지간한 드래곤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몸집과 날개를 자랑하는 특이한 외형의 대붕大鵬.
녀석의 등에는 황금빛의 안장이 얹혀 있었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안장을 꼭 붙들어 잡은 채 앉아 있었다.
“으으, 추워죽겠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성령의 유적을 조사하던 릴슨.
그런데 성령의 유적 연계 퀘스트를 위해 열심히 ‘차르타’를 찾고 있던 릴슨은, 어째서 대붕을 타고 이동 중인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알 수 없게 꼬여 버린 퀘스트 때문이었다.
릴슨의 퀘스트가 꼬이기 시작한 발단은, 차르타를 찾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차르타라는 녀석…… 존재하는 것 맞습니까, 장로님?
-당연하네. 설마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했겠는가?
-벌써 며칠째 밤을 꼴딱 새 가며 찾았습니다.
-흠, 커흠, 그랬는가?
-차르타는커녕, 녀석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흐음…….
-유적을 찾기 위한,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잠깐, 기다려 보시게.
차르타는 정령산의 세계관 설정상 무척이나 희귀한 개체였다.
한 번 등장했다 사라지면, 최소 보름이 지날 때까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니, 릴슨이 차르타를 찾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근성이라면 그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던 릴슨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없는 녀석까지 찾아낼 재주가 있을 리는 없었다.
‘후우……. 퀘스트 그냥 포기해 버릴까.’
하여 릴슨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랄족의 장로를 다시 찾아갔다.
그냥 포기해 버리기는 아까우니, 배 째라는 식으로 떼를 써 볼 요량으로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릴슨의 그 드러눕기(?)는 마음 약한 고랄 종족의 장로에게 통하였다.
-자네의 노력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일단 성령의 유적에 대한 임무는 조금 뒤로 미뤄 주도록 하겠네.
-……!
-성령을 찾는 임무는 차르타가 발견되면 그때 다시 진행토록 하고……. 대신 다른 유적에 대한 단서를 먼저 주도록 하지.
-그, 그게 정말입니까?
-마침 종족의 파수꾼들이 ‘악령의 유적’에 대한 단서를 가져왔거든.
-……!
릴슨은 고랄 장로의 배려에, 적잖이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와의 대화 이후 생성된 ‘악령의 유적’ 퀘스트는 놀랍게도 성령의 유적 이후로 연계되는 연계 퀘스트였고, 선행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계 퀘스트를 주는 마음 따뜻한(?) NPC는 카일란을 지금까지 플레이하면서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이번에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후후, 알겠네. 그럼 무운을 빌도록 하지.
심지어 고랄 종족의 NPC들은 악령의 유적 단서가 발견된 위치까지 친절하게 릴슨을 안내해 주었다.
고랄 종족의 상징과도 같은 신수인 ‘대붕’까지 태워 주면서 말이다.
“후우. 이번에는 꼭 퀘스트에 성공해야지. 이번 퀘스트 성공시키고, 다시 차르타라는 녀석을 찾아서 성령 퀘도 꼭 완수할 거야.”
안장의 손잡이를 꽉 쥔 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릴슨.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결코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가 찬양하던 친절한 NPC의 정체가 사실 평범한 NPC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와 대화했던 고랄 종족의 장로는 사실 긴급 투입된 카일란 기획 1팀의 팀장 김의환이었던 것.
‘크윽, 다른 유저가 또 퀘스트 하러 오기 전에, 빨리 수정작업 진행해야겠어.’
물론 그런 기획 팀의 고충을 알 리 없는 릴슨은, 오늘도 ‘갓겜’을 외치며 카일란을 플레이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