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4화 1. 고대의 요정, 미루 (3) >
* * *
미루의 이야기를 들은 뒤 최초로 생성된 퀘스트인, ‘고대의 정령 미루 Ⅰ’ 퀘스트.
강제로 퀘스트가 완료된 바람에 이안은 퀘스트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만약 그것을 이안이 알았더라면 더욱 기뻐했을 것이 분명하였다.
이것은 퀘스트 중에서도 이안이 가장 싫어하는, 단순 ‘채집’과 ‘탐색’ 퀘스트였으니 말이다.
정령수 ‘차르타의 소환석’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 각종 재료들을 모아 오라는 퀘스트였던 것.
퀘스트 창의 완료 조건에는 단순히 ‘생명의 결정’이라는 아이템 스무 개를 모아 오라 쓰여 있었지만, 결정 하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 정말로 극악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 퀘스트를 받았더라면 이안은 결계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했었을 테니, 퀘스트가 강제완료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하는 지금도, 이안은 퀘스트 강제 완료에 전혀 불만이 없었지만 말이다.
‘차르타의 소환석 보상이 삭제된 건 아쉽지만, 대신에 다음 연계 퀘스트의 보상이 강화되었다니까, 뭐…….’
이안이 이해한 것이 맞다면, 아마 클리어 보상으로 받는 아이템의 등급이 강화된다는 말일 터.
만약 전설 등급의 장비가 보상으로 책정되어 있었다면 그것이 신화 등급으로 교체될 것이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어마어마한 매리트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영문도 모른 채 퀘스트 강제 완료를 당한(?) 이안은, 다시 침착하게 두 번째 퀘스트의 정보 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퀘스트 창을 읽어 내려갈수록, 이안의 두 눈이 흥미로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고대의 정령 미루 Ⅱ(히든)(에픽)’
고대의 정령 차르타를 얻은 당신은 공간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얻어 내었다.
아직 그것을 다루는 능력은 미숙하겠지만, 비로소 성령의 유적에 접근할 열쇠를 얻은 것.
하여 미루는, 당신에게…….
……중략……
미루는 지금까지도 성령의 유적지를 찾고 있고, 그녀에 의하면 이 생명의 계곡 안에 유적지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미루를 따라 성령의 유적을 찾고, 그녀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자.
퀘스트 난이도 : S- (초월)
퀘스트 조건 : ‘생명의 계곡’을 최초로 발견한 자.
NPC ‘아렌’과의 친밀도 80 이상.
‘엘프 정령술사, 아렌의 부탁 Ⅲ(히든)’ 퀘스트를 진행 중인 자.
정령수 ‘차르타’를 소환 가능한, ‘소환술사(정령술사)’를 포함한 3인 이하의 파티일 것(만약 소환술사를 포함하지 않은 파티라면, NPC 아렌이 정령수 차르타를 보유하고 있을 것).
클리어 조건 : ‘성령의 수정’ 발견.
제한 시간 : 없음
보상 : 고대의 정령 ‘미루’와의 친밀도 +25
고대의 정령마법서 ??? (영웅)(초월)
최종 보상 : 명성(초월) +45000
NPC 아렌과의 친밀도 +50
???
*거절하거나 포기할 시 ‘아렌’과의 친밀도가 감소합니다.
*거절하거나 포기할 시 ‘미루’와의 친밀도가 감소합니다.
‘고대의 정령 마법서라……. 이거 보상도 은근히 기대되는데?’
등급이 영웅 등급으로 책정되어 있었지만, 마법서는 일반 아이템과 또 기준을 달리 한다.
마법서라는 분류 자체가 장비 아이템보다 높은 등급이 더 희귀하였기 때문에, 영웅 등급 정도에 ‘고대’라는 수식까지 붙었다면 충분히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퀘스트 창을 슥 읽어 내려간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퀘스트 내용은 제법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하였다.
미루를 따라가 성령의 유적을 찾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차르타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유적지의 안쪽에 성령의 수정이라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그게 뭔데?”
-불안정하게 엉켜 있는 내 힘들을, 완전히 하나로 융합시켜 줄 수 있는 마력의 결정체.
“아하.”
-수정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게 날 도와줘, 이안. 뭐, 싫다고 해도 강요하지는 않을게. 날 얼음 속에서 구해 준 것만 해도 이미 큰 은혜를 입었으니까.
미루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어렵게 부탁하였지만, 이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퀘스트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알겠어, 미루. 내가 도와줄게.”
-저, 정말이야?
“정말이고 말고.”
-결코 쉽지 않은 일이야, 이안. 한참 성세를 이루던 파프마 일족도 찾아내지 못했던 곳이니까.
“쉬울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여기 들어오는 것도 충분히 어려웠거든.”
-어쩌면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위험하다……라.”
-아마 고대의 가디언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말이야.
미루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여러 번 이야기하였지만, 이안이 그런 것에 아랑곳할 리 없었다.
어렵거나 위험하다 해서 도전하지 않았던 적은 이안의 카일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난 자신 있으니까, 얼른 길이나 안내해 줘. 고대의 가디언이니 뭐니 해도, 두들기다 보면 결국 부서지는 건 마찬가지겠지 뭐.”
“…….”
이안의 답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미루가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본 이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길이나 찾아 달라며.
“응……?”
이안의 물음에 간결하게 대답한 미루는, 양손을 모은 채 작은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하였다.
-القوة القديمة ، تظهر الطريق…….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거니와,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외계어를 중얼거리는 미루.
“……?”
이안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미루를 응시했지만, 그의 그 표정은 곧 일변할 수밖에 없었다.
고오- 고오오오-!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던 미루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한기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뭐…… 하는 거지?”
당황한 이안은 오른팔을 들어 몰아치는 바람을 막은 채, 미루를 계속해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
파괴적인 굉음과 함께, 미루의 주변으로 응집되어 있던 한기의 폭풍이 계곡의 호수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촤아아악- 콰아아-!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잔잔하기 그지없던 호수의 수면은 성난 파도처럼 요동쳤고, 미루의 작은 손에서 쏘아져 나온 강력한 기운은 호수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었다.
콰아아아- 쏴아아-!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무리 NPC라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이라니……!’
위력이나 계수 따위가 어떻게 될지는 이안으로서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미루가 구사하는 마법을 맞상대한다고 상상하자 소름이 끼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놀란 것과는 별개로, 미루의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호수 전체를 집어삼킬 만한 거대한 소용돌이로 만들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폭풍을 쏟아부었으니 말이다.
“이게 무슨……!”
이어서 잠시 후.
이안은 미루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드디어 깨닫기 시작하였다.
호수에 만들어진 소용돌이는 더욱 깊숙하게 수중으로 파고들며 길을 만들고 있었고, 그 모양 그대로 호수를 얼려 흡사 ‘지하 터널’ 같은 느낌의 얼음덩이를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설마…… 호수의 아래쪽에 유적이 있는 거야?”
이안은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그것을 들은 미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이안의 앞으로 내려왔다.
-맞아, 이안. 확실하지는 않지만, 분명 저 아래쪽에서 성령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하…….”
호수의 가까이로 다가간 이안은, 작은 요정이 만들어 낸 초자연적인 광경에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호수 전체를 얼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거대한 얼음 터널을 순식간에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마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 말이다.
‘피올란 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미루한테 제자로 받아 달라고 구배지례라도 올렸겠는걸.’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안이, 미루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생겼으니 말이다.
“그런데 넌, 이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었던 거야?”
이안이 보기에 미루의 마법은 어지간한 용언 마법만큼이나 강력해 보였으니, 어쩌면 당연하기 그지없는 의문.
하지만 이안의 질문에 대한 미루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하였다.
-그야 간단해.
“음……?”
-아까도 말한 것 같지만, 나는 얼릴 줄은 알아도 녹일 줄은 모르거든.
“…….”
간결함과는 별개로, 순식간에 납득이 되어 버리는 미루의 설명.
-어쨌든 이제 따라오도록 해. 힘든 길을 선택한 건 너니까, 날 원망하지는 말고.
“그, 그러지 뭐.”
미루는 작은 날개를 폴폴거리며 앞장서 빙하 동굴(?) 안쪽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차르타를 제외한 모든 소환수들을 소환 해제시킨 이안은 그녀의 뒤에 천천히 따라붙었다.
작은 요정의 어마어마한 마력에,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이안.
하지만 그러한 놀람과 별개로, 이안의 기대감은 한층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의 보상이 고대의 정령 마법이고, 방금 미루가 보여준 마법의 위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고대의 정령 마법서’라는 보상에 대한 기대감이 급격히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흐흐, 물 속성을 가진 블래스터가 있으니까……. 빙결 계열 정령 마법이 나와도 사용해 볼 수 있겠지.’
더욱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어두운 동굴 안쪽으로 이동하는 이안과 일행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을 맞이한 것은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푸른 빛무리’들이었다.
띠링-!
-성령의 유적지, 첫 번째 관문을 발견하였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고대 유적지의 첫 번째 관문에 입장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또 저 징그러운 결계들이냐?’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안에게 한숨이나 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안의 옆으로 날아온 미루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얼음이 녹기 전에 여길 통과해야 해, 이안.
“얼음이라면…… 네가 만들어 낸 이 얼음 동굴?”
-그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얼음.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길어야 10분……?
미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스템 메시지가 추가로 생성되었다.
-관문 제한 시간이 설정됩니다.
-제한 시간 : 599초
-제한 시간 내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고대의 정령 미루 Ⅱ(히든)(에픽)’ 퀘스트에 실패하게 되며, 다시 퀘스트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순식간에 똥 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난이도야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실패 리스크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처음 이 생명의 계곡에 들어올 때 겪었던 난이도를 생각한다면, 결코 쉬운 관문일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젠장……. 얼마나 어려울지는 모르지만, 한번 해보지 뭐.’
하여 아렌에 미루까지 차르타의 등에 태운 이안은, 망설임 없이 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타탓-!
하지만 관문 안쪽으로 비장하게 들어갔던 이안은, 잠시 후 다른 의미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이대로 끝이야?’
제한 시간 10분 전부를 쓰기는커녕.
고작 3분여 정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관문의 끝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와, 이안. 너 정말 엄청난데?
“……?”
-차르타를 이렇게 잘 다루는 정령술사는 수백 년 살면서 정말 처음 본 것 같아.
“으응? 그, 그래?”
그리고 그렇게, 시작부터 묘한 이안의 유적 탐험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