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1화 7. 성령의 유적 (4) >
* * *
이안의 선택은 분명 도박이었다.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턱이 없었으니, 불확실성에 승부를 건 셈인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였다.
또다시 무조건 아웃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결계와의 충돌을 피할 방법은 오직 이 방법뿐이었으니 말이었다.
‘벽 뒤에 숨겨진 히든피스라도 있길 바라는 건 너무 도둑놈 심보겠지?’
속으로 작은 소망(?)을 중얼거려 본 이안은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깐 현실성 없고 실없는 생각을 하긴 하였지만, 정말로 그런 기대 때문에 이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들의 눈에는 미친 짓으로 비칠 모습이었지만, 이안에게는 제법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우웅-!
이안과 아렌을 태운 차르타의 신형이 벽에 닿는 순간.
‘공령체’ 고유 능력으로 장애물을 통과할 때 발생하는, 특유의 공명음이 이안의 귓전으로 울려 퍼진다.
“……!”
찰나간의 시간이었지만, 긴장한 표정이 된 이안은, 빠르게 시야를 스캔하였다.
일단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 있다’는 공령체 고유능력을 믿고 뛰어든 것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버그 같은 게 발생할 수 있음은 인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함.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안의 두 눈은 곧 평온해졌다.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었다.
‘카일란 기획 팀이 아마추어들도 아니고…….’
그가 믿는 구석은 바로, 카일란을 세계 최고의 게임으로 만든 LB사의 ‘기획 팀’!
‘분명 고유 능력을 기획할 때, 이런 짓을 하는 유저가 생길 거라는 정도는 예측했겠지.’
이안이 말하는 ‘이런 짓’이란, 무턱대고 지형지물에 뛰어드는 행위를 말함이었다.
공령체가 모든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는 고유 능력이다 보니, 실험 정신이 투철한 유저들은 충분히 해 봄직한 시도인 것이다.
“……!”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안의 시야가 점점 까맣게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속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공령체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물리법칙이 적용되어 시공의 틈에 고립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시공의 균열이 생성됩니다.
-임의의 공간으로 강제 송환됩니다.
고오오오-!
벽 속으로 파고들면서 까맣게 변한 이안의 시야에, 하얀 빛의 선명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또렷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이안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그의 노림수가 절반은 통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이제 튕겨 나가는 장소가 어딘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공령체의 지속 시간은 대략 3~4초이다.
거기에 벽에 빨려 들어갔다가 튕겨 나오는 시간까지 합하면 대략 5초.
만약 이안이 뛰어든 그 자리로 송환된다면 생성되었던 결계가 다시 사라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이안의 노림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안은 결계에서 아웃되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여기까지 생각하고 움직인 것이었다.
슈우웅-!
이질적이 기계음이 울려퍼지며, 깜깜했던 이안의 시야가 빠르게 밝아졌다.
그리고 다시 밝아진 시야를 확인한 이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됐어……!”
예상했던 그대로의 좌표에 튕겨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크리티컬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이안은, 침착하게 다시 차르타를 컨트롤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고유능력이 묶긴 상태에서 가장 위험했던 구간을 통과해서인지, 한층 더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번에 클리어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제 상관없었다.
방금 발견한 방법을 활용하면 고유 능력을 더욱 아낄 수 있을 것이고, 그럼 이 결계의 난이도 자체가 훨씬 쉬워지게 된다.
-크헝-!
이안과 마찬가지로 다시 활력이 솟아오르는지, 차르타 또한 크게 포효하며 전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편, 벽에 뛰어드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아렌은 다시 달리는 차르타를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어떻게 된 거에요, 이안 님? 언제 다시 바깥으로 나온 거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NPC 아렌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안에게 대응해 줄 시간은 없었다.
지금 이안의 온 정신은, 시야에 어지러이 생성되는 파란 불빛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이번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이안은,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 결계를 계속해서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갈수록 차르타를 컨트롤하는 이안의 몸놀림은 더욱 능숙해졌고, 마치 서커스를 하듯 푸른 결계의 벽들을 요리조리 피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이안 님, 저기……!”
이안 일행의 시야에, 멀찍이 번쩍이는 황금빛 아지랑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끝이다!’
협곡을 횡으로 가로지르며,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황금빛의 아지랑이들.
이안은 그것이 결계의 마지막임을 확신할 수 있었고, 망설임 없이 그 방향을 향해 도약하였다.
-크허어엉-!
그리고 잠시 후, 황금빛 장막을 통과한 그 순간!
띠링-!
이안의 눈앞에, 드디어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초로 ‘성령의 결계’를 통과하셨습니다!
-명성(초월)이 1만 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하지만 이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게 끝이라고?”
역대급으로 하드한 난이도의 관문이었던 만큼 뭔가 괜찮은 보상을 기대했는데, ‘최초’ 업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성 외에 아무런 보상이 없었던 것이다.
‘뭐 이렇게 짠내 나는 경우가 다 있어?’
물론 이안이 피똥 싸며 클리어한 이 관문은 사실 퀘스트 진행 과정에 스무스하게 지나갔어야 하는 곳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보상이 없었던 것.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이안으로서는 툴툴대는 것이 당연했다.
탓-!
결계를 완전히 빠져나온 차르타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계곡으로 뛰어든다.
이어서 놀랍게도, 차르타는 물 위를 달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촤아아-!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허공으로 도약한 차르타가 커다란 바위에 올라서자, 이안 일행의 눈앞에 장엄한 풍광이 펼쳐졌다.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물줄기가 나타난 것이다.
“오호.”
아직까지도 새하얀 눈이 꽁꽁 얼어있는 가운데, 그 사이사이로 거미줄처럼 쏟아져 내리는 새하얀 폭포수의 모습.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곳에서는 녹빛의 아지랑이와 황금빛 운무가 퍼져 나갔고, 그것을 본 이안은 이곳이 왜 생명의 계곡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설마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이안은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하였다.
아렌처럼 생명수가 필요해서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다른 콘텐츠를 찾아야 했으니 말이었다.
진입로에 이렇게 미친 난이도의 관문이 만들어져 있었으니, 틀림없이 이 안에는 대단한 것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첨벙-!
허겁지겁 차르타의 등에서 내려, 가져온 나무 물통 안에 생명수를 담기 시작하는 아렌.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엘프 정령술사, 아렌의 부탁 Ⅲ(히든)’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 * *
퀘스트 창을 곧바로 확인한 이안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 안에서 사소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음? 뭔가 이상한데?’
퀘스트 내용 자체는 아렌을 ‘마이얀 산맥’으로 데려다 놓으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지만, 퀘스트의 제목에서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아니, 왜 두 번째 연계 퀘스트는 어디 가고 바로 세 번째 퀘스트가 생성되는 거야?’
분명 이안이 방금 클리어한 퀘스트는 ‘아렌의 부탁Ⅰ’ 퀘스트였는데, 연계로 생성된 퀘스트가 ‘아렌의 부탁 Ⅲ’ 퀘스트였으니.
지금껏 카일란을 플레이하며 이런 적이 없었던 이안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낄지언정 어떤 크리티컬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안은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하였다.
‘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계곡 안에 있는 콘텐츠를 빠르게 찾아내는 거니까.’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는 아렌을 집에 다시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곧바로 되돌아 나가면 너무도 손해가 막심했다.
하루 종일을 투자해서 계곡 진입에 성공하였는데, 짠내가 풀풀 날리는 퀘스트 보상만을 받고 되돌아 나간다면 손해도 그런 손해가 없었던 것이다.
콸콸콸.
아직도 열심히 물을 뜨고 있는 아렌을 슬쩍 응시한 이안은, 다시 차르타의 등에 올라탔다.
아렌이 볼일을 보는 동안 넓은 계곡 안에서 뭐라도 찾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차르타, 물을 걷는 건 제약 없이 가능한 거야?”
이안의 물음에, 차르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으르렁거린다.
크릉-!
이어서 녀석의 대답을 들은 이안은, 곧바로 계곡 안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차르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물 위를 뛰어다니는 게 제약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령수 ‘차르타’의 정령력 소모로 인해, ‘정령 마력’이 25만큼 감소됩니다.
물 위의 질주를 지속하는 동안, 이안의 정령 마력이 계속해서 소모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에게 그렇게까지 부담될 수준의 마력 소모는 아니었기에, 차르타는 신나게 질주할 수 있었다.
‘후우, 넓기도 넓다. 아렌이 물 다 뜨기 전에 뭔가 찾아내야 하는데…….’
커다란 포대 자루에 물을 계속해서 담는 아렌을 힐끔 확인한 뒤, 다시 계곡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하는 이안.
그런데 잠시 후.
뿌득-!
이안은 아래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내렸다.
‘뭐지? 수면을 밟았는데 왜 이런 소리가……?’
이제까지는 차르타가 달릴 때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었는데, 순간 그 사이에서 이질적인 소리를 캐치한 것이었다.
이어서 수면 아래의 이질적인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한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물 밖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는 그림자가 확실히 수면 아래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던 이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이어서 이안은, 망설임 없이 차르타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수면 아래에 있는 커다란 물체가 뭔지 빠르게 확인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첨벙-!
딱히 수영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맥주병은 아니었기 때문에, 수면과 가까운 곳에 있는 물체 정도는 확인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
물속에 잠긴 거대한 것을 발견한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알 수 없는 고대의 유적’을 발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