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9화 7. 성령의 유적 (2) >
* * *
며칠 만에 샤이야 봉우리에 도착한 이안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쯤부터는 절대로 비행이 불가능했던 구간이었을 텐데?’
봉우리 중턱부터 시작해서 강렬하게 휘몰아치던 극한極寒의 돌풍들.
그리고 산 전체를 뒤덮고 있던 새하얀 눈, 그에 더해 얼음덩이들까지.
정말 그때 보았던 같은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간 데 없이 사라져 있었으니 말이었다.
‘뭐지? 잘못 찾아온 건가?’
물론 산 구석구석 그늘진 곳에 아직 채 녹지 못한 하얀 눈들이 쌓여 있었으며, 뼈가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잎사귀를 피워 내고 있지 못하였지만 어쨌든 이안이 알던 샤이야 봉우리의 외형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불용아, 제대로 찾아온 것 맞아?”
이안의 물음에, 불용이가 심퉁맞은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그렇다, 주인. 설마 내가 수백 년 동안 머물었던 곳을 벌써 잊었겠나.”
“아니, 그렇기는 한데……. 며칠 전에 내가 봤던 모습이랑 너무 달라서, 이상해서 그래.”
“주인이 봤던 모습과 어떻게 다른가.”
“분명 그때는 봉우리에 접근하기 조차 힘들 정도로 냉기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새하얗고 차가운 눈이 허리춤까지 수북이 쌓여 있었다는 말이지.”
당황한 나머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며 그때의 상황을 주절주절 읊는 이안.
그런 이안의 이야기에 대꾸한 것은 불용이가 아닌 아렌이었다.
“맞아요, 이안 님. 불과 지난 주만 하더라도, 이곳은 이안님이 말씀하신 대로 불모지에 가까운 땅이었어요.”
“그, 그렇지?”
“다만 며칠 전부터 갑자기 이곳 봉우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점점 눈이 녹아내리고 생명이 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
“분명히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 그게 뭔지는 저도 정확히 모르겠네요.”
“흐음…….”
이안은 불용이의 등에서 샤이야 봉우리를 내려다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그랬듯 카일란의 세계관에서 아무 이유없이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 그 이유에 대해 골똘히 추측해 본 것이다.
‘설마 내가 용암의 대지를 클리어한 것과 연관이 있는 현상인가?’
하지만 당장 확실한 근거를 생각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또 지금 진행 중인 퀘스트에 중요한 사항도 아니었으니 이안의 관심사는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다.
“아렌. 그 생명의 계곡이라는 곳, 이 근방인 거야?”
이안의 물음에 아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네, 맞아요, 이안 님. 서쪽으로 조금만 틀어서 이동하면, 금방 계곡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아렌의 말을 들은 불용이는 크게 날개를 뻗어 천천히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험준하게 이어진 산세를 넘어, 깊고 새파란 계곡이 거짓말처럼 일행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샤이야 봉우리를 샅샅이 뒤졌던 전력이 있는 이안조차도 완전히 처음 보는 절경이었다.
“와, 이쪽에 이런 지대가 있었다니…….”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새파란 폭포수와 그 아래로 이어진 깊고 고요한 계곡의 물줄기들.
이안은 이런 거대한 지형을 자신이 발견하지 못했었다는 것에 놀라워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이안이 샤이야 봉우리에 왔었던 때에는 생명의 계곡 자체가 단단히 얼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계곡에 하얀 눈이 가득 메워져 있었으니, 아무리 이안이 꼼꼼히 봉우리를 뒤졌다고 한들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펄럭-!
커다란 날개를 크게 펄럭인 불용이가 사뿐히 계곡의 진입로에 내려 앉았다.
이어서 불용이의 등에 타고 있던 이안과 아렌 또한, 사뿐한 몸놀림으로 땅에 내려섰다.
“여기에요, 이안 님.”
“흠.”
“이미 위에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엄청나게 크죠?”
“이 계곡 말하는 거지?”
“넵.”
“확실히 그렇긴 한데…….”
계곡의 앞쪽으로 다가간 이안은, 산줄기를 따라 웅장하게 이어진 계곡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천천히 그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이는 계곡이긴 한데……. 어째서 차르타 없이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거지?’
아렌의 말에 의하면 계곡을 감싸고 있는 결계 같은 것이 있다고 하였으나, 이안의 눈에는 그런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이안으로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우웅.
팡-!
갑작스레 눈앞을 가로막는 반투명하고 푸른 벽들이 이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를 튕겨 내었고…….
“앗!”
깜짝 놀란 이안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이었던 건가?’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안의 눈앞에는,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라 있었으니 말이다.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10초 동안 이동 속도가 20%만큼 느려집니다.
-현재까지 결계에 1회 부딪쳤습니다.
-결계에 3회 이상 부딪칠 경우, 계곡의 진입로로 강제 소환됩니다.
-충돌 횟수는 3분 뒤 초기화됩니다.
“오호.”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의 표정에는 어느새 놀람의 감정이 싹 다 지워져 있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흥미진진한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이렇게 또 재밌는 콘텐츠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뒤쪽에 있어 그런 이안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아렌은, 그가 당황했다고 생각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 성령의 결계 때문에, 계곡에 접근할 수가 없었어요.”
“확실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쉽지 않겠어.”
“혼자서 정말 수십 번은 시도해 봤는데, 아무리 노력해 봐도 10미터 이상은 들어갈 수가 없더라고요.”
아렌의 말을 들은 이안은 두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저 결계가 나타날 좌표를 예측하고 피해 가면서 진입한 거야?”
아렌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예측이라기보단, 빠르게 반응한 거죠.”
“반응?”
“결계가 생성되기 직전에 파란 불이 반짝이거든요. 그걸 보면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서야 해요.”
“오호, 그런 게 있었단 말이지.”
새로운 정보를 얻은 이안은, 다시 한번 계곡의 진입로를 향해 걸음을 옮겨 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푸른 빛이 일렁인 순간…….
타탓-!
곧바로 몸을 회전시켜 결계를 피해 방향을 선회하였다.
스륵.
이어서 아슬아슬하게 결계의 옆을 스쳐 지나간 이안은, 입 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후후, 이런 거였단 말이지?’
처음 결계에 부딪쳤을 때는 당황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나타나는 푸른 벽체의 크기까지도 어느 정도 파악에 성공한 것이다.
‘대충 가로 세로 1미터 정도 된다고 보면 되겠군.’
그리고 흥이 난 이안은, 내친 김에 더 깊은 곳까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차르타 없이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탓- 타탓- 스스슥-!
마치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기라도 하듯 푸른 불빛에 반응하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이안.
“우, 우와!”
이안의 칼 같은 반사 신경을 확인한 아렌은, 입을 쩍 벌리고는 감탄하였다.
사실 결계의 매커니즘을 알려 준다고 해도, 이안이 단번에 그걸 피할 줄 몰랐으니 말이다.
‘끽해야 한 번 정도 피할 줄 알았는데…….’
서커스처럼 결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는 이안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아렌.
하지만 결국 이안도 결계를 전부 통과하기 전 결계에 충돌하여 튕겨 나오고 말았고, 그런 그를 향해 아렌이 호들갑을 떨며 뛰어왔다.
“대단해요! 이안, 당신 정령술사 아니었어요?”
“뭐, 그렇지.”
“정령술사가 어떻게 그렇게 신체 능력이 좋을 수 있는 거죠?”
“이 정도야 나 아니어도 해낼 수 있는 사람 많을 걸?”
“에이, 설마요.”
흥분한 아렌은 계속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이안은 적당히 대답한 뒤 결계의 입구를 향해 다시 다가갔다.
방금은 막바지에 연달아 충돌하는 바람에 결계 밖으로 튕겨 나왔지만, 몇 번만 더 시도하며 계곡물이 있는 곳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었다.
물론 차르타 없이 말이다.
‘흠, 원래 차르타가 꼭 필요한 콘텐츠는 아니었나 본데?’
하지만 이안은 잠시 후, 그게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결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난이도가 더욱 어려워졌으니 말이었다.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10초 동안 이동속도가 20%만큼 느려집니다.
-‘성령의 결계’에 부딪쳤습니다.
……중략……
-결계에 3회 충돌하였습니다.
-계곡의 진입로로 강제 소환됩니다.
게다가 결계에 중간에 한 번씩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결계 패턴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사실상 차르타 없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휘유. 쉽지 않네.”
세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자, 아렌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이안 님?”
“응?”
“그런데 차르타는 왜 안 쓰시는 거에요?”
고랄 종족의 장로들은 아렌에게, 공간을 지배하는 정령수 차르타의 힘을 빌린다면, 결계를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때문에 아렌으로서는, 차르타 없이 계속해서 헤딩하는 이안의 행동이 조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안이 차르타를 아직 타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있었다.
최대한 결계의 구조와 패턴에 익숙해진 다음, 아렌과 함께 차르타의 등에 타고 한 번에 결계를 뚫어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차르타를 부르려고 했어.”
“오오!”
우우웅-!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앞에 푸른 갈기를 가진 날렵한 호랑이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커허엉!
이어서 망설임 없이 차르타의 등에 올라탄 이안은, 아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내 뒤에 타, 아렌. 계곡의 안쪽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말이야.”
이안의 말에 순식간에 얼굴이 밝아진 아렌은 곧바로 차르타의 등에 올라탔다.
탓-!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아렌 또한 제법 날렵했기 때문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차르타의 등 위로 단번에 도약하여 올라탈 수 있었다.
“그럼, 출발한다?”
“넵!”
아렌의 대답이 떨어지자, 두 사람을 태운 차르타가 곧바로 달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신형은 계곡의 입구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 * *
“흐음……. 여기 이 보랏빛 구슬이 고랄종족이 말했던 그 아티팩트가 맞겠지?”
정령산 깊숙한 곳, 어둑어둑한 지하의 유적.
그 안에서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구슬을 찾은 릴슨이,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어 횃불을 비춰 보았다.
-알 수 없는 구슬 (???)
지금 릴슨은, ‘성령의 유적’을 찾기 위해 연계 퀘스트를 연달아서 진행하는 중이었다.
일단 생명의 계곡을 둘러싼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차르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차르타를 찾아야 함은 물론 녀석에게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알아내야 했으니 말이다.
해서 릴슨이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은 ‘폐허가 된 파프마의 유적’이었다.
파프마의 유적에는 갖가지 특별한 아티팩트들이 많이 숨어 있었고, 그 안에 릴슨에게 필요한 ‘생령의 구슬’도 있다는 정보를 얻었으니 말이다.
생령의 구슬이 있으면 정령수와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되면 ‘차르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었다.
물론 ‘차르타’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녀석의 퀘스트를 또 클리어해야 할 확률이 높았지만, 이렇게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연계 퀘스트의 재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번에는 생령의 구슬이 맞아야 할 텐데!’
보랏빛 구슬을 찾아낸 릴슨이 직업 스킬인 ‘고급 감정’을 발동시켰다.
이어서 잠시 후.
파앗-!
어둠 속에서 보랏빛 섬광이 일렁이더니, ‘알 수 없는 구슬’의 주변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알 수 없는 구슬’의 감정에 성공하였습니다!
-‘생령의 구슬(전설)(초월)’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됐어!”
원했던 유적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릴슨은 두 주먹을 불끈 말아쥐며 환호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차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희귀한 종의 정령수를 찾아내는 것.
‘좋아, 이제 생명의 샘을 얼른 찾아봐야지.’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릴슨은 알 수 없었다.
생명의 샘을 찾아내는 데에만 하루.
게다가 ‘차르타’라는 녀석은, 앞으로 한동안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