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8화 7. 성령의 유적 (1) >
중간계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인 ‘용사의 마을’은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중간계에 입성하기 위한 상위권 유저들이 끊임없이 용사의 마을 문을 두들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과 별개로, 항상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평화로운(?) 용사의 마을.
처음 중간계 콘텐츠가 열렸을 때야 모든 카일란 유저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용사의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관심이 식고, 카일란의 평범한 콘텐츠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온하기 그지없던 용사의 마을이 며칠 전부터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레 생겨난 마을 안의 ‘특별한’ 콘텐츠 때문에 유저들의 관심이 다시 용사의 마을로 쏠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란의 주인공은 바로, ‘용암의 대지’ 던전이었다.
-(속보) 용사의 마을 내부에 새로운 인스턴트 던전 오픈!
-숨겨져 있던 히든 던전의 발견인가, 아니면 LB사에서 깜짝 오픈한 이벤트성 던전인가!
-영웅의 협곡 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아이템 ‘용암 세트’의 첫 번째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중간계의 첫 번째 콘텐츠인 용사의 마을에 생긴 특별한 인스턴트 던전, 용암의 대지.
하지만 이 용암의 대지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용사의 마을에 상주하던 평범한(?) 상위권 유저들이 아니었다.
일단 던전의 레벨 제한부터가 ‘초월 40레벨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용사의 마을 콘텐츠를 진행 중인 초월 10레벨 이하의 유저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 같은 곳일 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연일 이슈가 되는 데에는, 몇 가지 확실한 이유가 존재하였다.
첫째,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다름 아닌 ‘용암 세트’라는 것이 밝혀진 점.
e스포츠처럼 대중화된 영웅의 협곡 콘텐츠 덕에 ‘용암 세트’ 아이템은 일반 유저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초월 장비였고, 때문에 세트 효과와 장비 개별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는 유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 직접 관문에 도전하지 못한다 하여도, 다른 랭커들이 도전하는 모습을 ‘관전 모드’로 지켜볼 수 있다는 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에 랭커들이 도전하는 것을 관전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는 점이 인스턴트 던전으로서는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픈된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첫 번째 보스를 깬 사람조차 없다는 점도 카일란 팬들의 관심을 끌기 좋은 이슈였다.
-와, 저 미친 골렘, 깨라고 만들어 놓은 보스 맞음?
-아니 거의 모든 대미지에 면역인데, 저걸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게다가 용암 지속 피해량 상태는 또 왜 저래? 나같이 장비 거지인 유저들은 안에 5분만 있어도 그냥 녹아서 없어져 버리겠어.
-기다려 보셈. 아직 네임드들 트라이 안 했으니, 곧 있으면 공략법 나오겠지.
-으, 근질거리네. 나도 빨리 트라이해 보고 싶은데, 공략 법 나오기 전에 머리 박는 건 바보 짓이겠지?
-ㅇㅇ 계정당 1회밖에 도전 못 하는 던전이라던데, 지금 트라이하면 바보지 뭐.
-그나저나 위 님들, 다들 초월 40레벨은 찍고 하는 이야기쥬?
오늘도 하루 일과를 충실히 마치고 컴퓨터에 앉은 레미르는, 절로 실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공식 커뮤니티의 모든 게시판이 죄다 용암의 대지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였으니 말이다.
“흐흐, 요즘 커뮤니티가 핫하다고 하더니, 이거 때문이었어?”
용암의 대지 던전이 용사의 마을에 생성되면서 숨겨져 있던 던전히 대중화되어 버렸지만, 레미르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그녀는 용암의 던전을 클리어할 때 두 줄의 메시지를 똑똑히 확인했었으니 말이다.
-이제부터 낮은 단계의 ‘용암의 대지’ 관문이 ‘용사의 마을’에 생성됩니다.
-낮은 단계의 ‘용암의 대지’에서는 영웅(초월) 등급의 용암 장비들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전설 등급의 용암 장비 풀 세트에 신화 등급의 용암 지팡이까지 착용한 레미르로서는, ‘낮은 단계’의 용암 던전이 대중화된다 해도 배 아플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우쭐한 표정이 된 레미르는, 유저들이 공략 영상이라고 올려놓은 유캐스트 영상을 하나 골라서 플레이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섯 번의 기회를 전부 소진할 동안 골렘 하나를 잡지 못하는 불쌍한(?) 유저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거인 레벨이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상대했던 것보다는 확실히 약해 보이는데…….”
물론 던전에 도전한 파티원들의 평균 초월 레벨은, 50도 채 되지 않는 낮은 레벨대였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속절없이 거인에게 무너져 버렸다.
“저래서는 거인을 잡는다 해도 광전사한테 몰살당하기 딱 좋은 실력들이네.”
유저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뭔가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더욱 차오르는 레미르.
물론 이안이 없었다면 레미르 또한 지금 이렇게 웃고 있지 못하겠지만, 굳이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아마 이안이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쯤 트라이해 보겠다고 길드원 모아다가 파티 꾸리고 있었겠지.’
차오르는 만족감에, 점점 더 뿌듯한 표정이 되는 레미르.
‘역시 다음에도 이안이 부르면 일단 무조건 가고 봐야겠어.’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악몽 같았던 노가다의 기억이 희미하게 지워진 모양이었다.
* * *
얼떨결에 아렌에게 퀘스트를 받아, 다시 샤이야 봉우리로 향하게 된 이안.
그는 샤이야 봉우리로 이동하기 위해 최근에 새로 뽑은 불용이의 등에 탑승하였고, 불용이를 만난 아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이안 님, 이 녀석, 설마 마그마 드래곤인가요?”
늠름한 불용이의 자태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묻는 아렌을 향해,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결하게 대답하였다.
“맞아. 샤이야 산맥에서 포획한 녀석이지.”
“그 설산에 마그마 드래곤의 레어가 있었다고요?”
이안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뭐, 그건 아니지만,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어쨌든 소개할게, 이 녀석의 이름은 불용이야.”
이안의 말이 끝난 순간, 불용이와 눈이 마주친 아렌.
아렌은 다시 한번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내질렀다.
“불용이! 이름이 너무 귀여워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에, 슬쩍 기분이 좋아진 이안.
“역시 그렇지?”
물론 당사자인 불용이는 무척이나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불용이가 아니라 ‘라카도르’다, 엘프 꼬마.”
하지만 불용이의 작은 반항은 이안에 의해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하지만 네 애칭은 불용이잖아. 그렇지, 불용아?”
“크윽……. 그, 그렇다…….”
“귀여워!”
이미 이안에게 마력의 심장은 받은 후였지만, 불용이는 자신의 애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안과의 약속은 용언의 맹약이었기 때문에, 번복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여 상처 입은 표정이 된 불용이가 이안을 향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주인.”
“왜, 불용이?”
“방금 잡은 차르타라는 녀석은 고유 이름으로 불러주면서, 대체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
불용이의 물음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야, 널 아끼니까 그런 거지.”
“싫어하는 게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만약 싫어했으면, 내가 그렇게 귀여운 이름을 지어 줬겠어?”
“후우……. 그냥 싫어해도 된다, 주인.”
“잔말 말고 빨리 출발하기나 하자, 불용. 샤이야 산맥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잖아.”
“크으윽.”
잠시간의 사랑싸움(?)이 진정된 뒤, 아렌까지 등에 태운 불용이는, 빠르게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샤이야 봉우리는 불용이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인근에 도착할 때 까지는 아렌의 길 안내도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신이 없어서, 차르타의 정보 창을 제대로 확인하질 못했네.’
불용이도 입을 다물고 아렌 또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정신없이 빠져들자, 이안은 곧바로 소환수 정보창을 열어 찬찬히 차르타의 정보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녀석의 고유 능력은 제법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꼼꼼히 정독하며 읽어 봐야 했으니 말이다.
-차르타 (생명의 수호자)
레벨 : 78 (초월)
분류 : 정령수
등급 : 전설 (초월)
성격 : 나태함
진화 가능
공격력 : 3,822
방어력 : 1,716
민첩성 : 5,538
지능 : 1,170
생명력 : 341,250/341,250
고유 능력
*공령체(재사용 대기 시간 60초)
1초 동안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공령체’가 됩니다.
‘공령체’ 상태에서는 어떤 공격도 받지 않으며, 대신 적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공령체’ 상태에서는 모든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 3초)
*은닉 (재사용 대기 시간 120초)
공간 속으로 몸을 은폐하여 ‘은신’ 상태가 됩니다.
‘은신’ 상태에서는 적들의 눈에 띄지 않으며, ‘디텍팅’ 계열 마법으로 모습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은신’ 상태에서는 치명타 확률이 30퍼센트만큼 증가하며, 치명타 피해량이 12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대상의 후방을 정확히 공격하였을 시 40퍼센트의 확률로 1초 동안 ‘기절’ 상태에 빠뜨리며, 적이 기절했다면 재사용 대기 시간과 무관하게 다시 ‘은닉’이 발동합니다.
*공간 왜곡 (재사용 대기 시간 300초)
원하는 대상과 자신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바꿔 버립니다.
적아敵我에 구분 없이 모든 대상에게 사용할 수 있으며, 발동 즉시 ‘차르타’의 이동속도가 3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특수한 상황일 시, 해당 능력이 발동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간의 지배자 (패시브)
공간의 지배자 차르타는 일시적으로 자신 주변의 공간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차르타는 자신의 모든 액티브 스킬을 발동시킨 직후, 자신 주변의 시공간을 50퍼센트만큼 느리게 만듭니다.
공간의 지배자 능력은, 발동 시점부터 3초 동안 지속됩니다.
*일체화 (패시브)
차르타는 자신과 교감하는 ‘정령술사’를 등에 태웠을 시, 자신의 모든 고유 능력을 그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차르타를 탑승한 상태로 그의 고유 능력을 발동시킨다면, 탑승자 또한 같은 효과를 받습니다.
(이 패시브는, 차르타가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 능력에 한해 적용됩니다.)
-자연의 친구(물)
정령수는 자연과 동화된 ‘자연의 일족’입니다.
정령수의 모든 전투 능력은 소환술사의 정령술에 영향을 받으며, 정령수가 사용하는 모든 고유 능력의 계수는 소환술사의 정령 마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자연의 친구(물)’ 효과로 인해 모든 ‘물’ 속성 마법으로 인한 피해를 30퍼센트만큼 무효화시킵니다.
*해당 정령수의 성향으로 인해, 모든 공격에 ‘물’ 속성의 추가 피해가 더해집니다.(정령술사의 정령마력에 비례)
고대부터 생명의 샘을 지켜온, 신령한 정령수입니다.
그 어떤 소환술사나 정령술사도 길들이지 못했다는, 공간을 지배하는 전설적인 소환수입니다.
‘크, 역시 고생해서 잡은 보람이 있단 말이지.’
이미 대략적으로 읽어 보았던 정보 창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감탄을 거듭하는 이안.
차르타의 고유 능력들은 대부분 유틸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안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유 능력 하나하나 버릴 게 없지만, 역시 그중에서도 최고는 공간 왜곡과 일체화네.’
공간 왜곡, 그리고 일체화.
사실 이 두 가지 고유 능력 이름은 이안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공간 왜곡은 이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환술사 스킬과 같은 이름이었으며, 일체화는 아이언의 고유 능력과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능력들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확연히 다른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슷한 콘셉트의 스킬인 건 맞지만, 스킬 구성이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 왜곡은 내가 가진 능력의 상위호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 일체화는 아이언의 것과 다른 콘셉트라고 해야 맞겠네.’
아이언이 가진 일체화는 아이언의 막강한 전투 능력을 소환술사에게 전이시켜 주는 고유 능력이다.
반면에 차르타의 고유 능력 일체화는 아이언처럼 자신의 전투 능력을 전이시키지는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뛰어난 고유 능력들의 효과를 소환술사가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결국 소환술사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아이언을 탑승하는 게 도움되겠지만, 전략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에는 차르타를 탑승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 되는 것이다.
‘크흐, 만약에 진화까지 시킬 수 있다면, 진짜 꿀 같은 소환수가 될 텐데 말이지.’
차르타의 고유 능력들을 살피며 이런저런 전투 시나리오를 짜 보던 이안은, 저도 모르게 히죽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3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앗, 저기예요!”
샤이야 봉우리를 발견한 아렌의 목소리가 이안의 상념을 깨우며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