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2화 5. 다시 만난 정령수 >
“흐아암, 거의 10시간은 잤는데, 왜 잔 것 같지가 않냐…….”
카일란에 접속한 레미르는, 들어오자마자 하품을 쩍 쩍 하며 기지개를 켰다.
나름 푹 쉰다고 잠을 청한 뒤 다시 접속한 것이었지만, 피로가 전부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레미르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것은 사실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40시간 연속 플레이 자체가 하드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플레이 스케줄이 평범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최근에 도전했던 던전들 중에서도 가장 난이도 높은 던전을 쉬지 않고 수십 회 트라이했으니, 고작 10시간 정도의 수면으로 그 피로가 회복될 리 없는 것.
그렇다면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레미르가 반쯤 감겨 있는 눈을 하고선 카일란에 다시 접속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녀가 피땀 흘려 얻어 낸 값진 결과물인, 사랑스런(?) 용암 세트 아이템들을 얼른 사용해 보고 싶어서였다.
“흐흐, 다음 길드파티 일정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손이 근질거리잖아?”
던전 클리어 이후 이안과 헤어진 레미르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부여잡은 채, 이번에 얻은 총 여섯 종류의 용암세트 아이템들을 꼼꼼히 살펴봤었다.
첫 번째 관문에서 얻었던 망토부터 시작해서 2, 3회차에 얻은 장비인 목걸이와 반지.
거기에 4회차에 얻은 머리장식과 6회차에 얻은 로브.
마지막으로 지옥 같은 난이도의 노가다를 완수하고 탈진 직전에 얻어 낸 지팡이까지.
그녀의 눈에 이 장비들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초월 장비들보다 월등하게 강력하였고, 약간의 과장을 섞는다면 정말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장비들이라는 느낌마저도 들 정도로 옵션 구성이 아름다웠다.
거기에 착용 시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불꽃 이펙트까지.
화르륵-!
장비를 전부 착용한 뒤 꼼꼼히 상태를 점검해 본 레미르는 다시 한번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와, 정신 차리고 보니까 더 감동이네…….”
반쯤 비몽사몽이었던 어제와 달리 어느 정도 맑아진 정신으로 장비들을 점검한 레미르는 더욱 들뜨기 시작하였다.
다른 옵션들을 다 떠나서 M. Atk.
즉, ‘마법 공격력’이 증가된 것만을 놓고 보아도, 한 배 반 이상이었으니 말이었다.
지금까지 애지중지하며 써 오던 장비들이, 하나같이 누더기로 보일 정도.
‘흐흐흐, 엊그제 장비 좀 좋아졌다고 우쭐대던 훈이 녀석부터 우울하게 만들어 줘야겠어. 오늘 길드 파티에서 DPS 톱은 단연 이 레미르 님이겠지.’
레미르가 생각하기에 이제 이안을 제외한다면, 길드 파티 기여도에서 그녀를 이길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드 파티에서 기여도 1위를 한다고 딱히 얻을 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인의 부러움을 살 수는 있을 터였다.
“히히, 으히히……!”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시스템 창을 읽어 내려가며 실실 웃는 레미르.
잠시 후, 그런 그녀 혼자 있던 길드 거점 대기실에, 파티원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끼이익.
“어, 뭐야? 레미르 누나잖아?”
“누나, 오늘부터 다시 길드 파티 합류야?”
“야, 레미르, 너 체력이 남아나겠어?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약속 시간이 되자, 훈이와 카윈을 시작으로 클로반과 헤르스까지 순식간에 대기실에 가득 들어찬 로터스의 길드원들.
그런 그들을 향해, 레미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오늘은 이 누나만 믿고 다들 따라오시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상태(?)에, 길드원들이 당황했음은 물론이었다.
* * *
한편 레미르가 새로 얻은 장비들을 착용한 채 파티 사냥에 설레고 있던 그 무렵.
위이잉-!
-홍채 인식 완료. ‘이안’ 님, 카일란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재충전 후 돌아온 이안은, 레미르보다 조금 더 늦게 카일란에 접속하였다.
“흐읏차-!”
용암의 대지의 모든 공략이 끝난 뒤, 이안은 레미르 못지않게 체력이 방전되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철 체력을 가진 이안에게도, 한계를 넘어서는 노가다 일정이었던 것이다.
이안의 경우 레미르보다도 10시간 이상 더 연속 플레이를 했던 것이었으니, 마지막 순간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라바 드래곤까지 잡아 낸 것은 사실 기적이라고 할 만 하였다.
심지어 획득한 장비들과 라바 드래곤의 스펙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로그아웃하여 기절하듯 수면에 빠졌던 이안이었으니, 이번 노가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자, 이제 재충전도 했으니 우리 불용이 스펙이나 한번 구경해 볼까?”
용암의 대지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얻어 낸 라바 드래곤을 떠올린 이안은, 히죽히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녀석을 소환해서 감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라바 드래곤의 덩치는 다른 신룡들과 비견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했기 때문에, 보는 눈이 많은 이곳 프뉴마 마을의 한복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다른 유저들의 시선을 끌면, 귀찮은 일만 생길 게 분명했으니까.
“어디 보자……. 이쯤이면 적당한 것 같은데.”
프뉴마 마을 뒤편에 있는 한산한 공터에 도착한 이안은, 곧바로 라바 드래곤을 소환하였다.
포획에 성공한 이후 첫 소환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대충 어떤 고유능력들을 가졌는지야, 경험해 봐서 알고 있지만, 그래도 구체적으로 확인하면 더 예쁜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겠지.’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현재 이안의 파티에서, 새로 얻은 불용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구상해 본다는 것.
이어서 이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불용이, 아니, 라바 드래곤 소환!”
우우웅-! 화르륵!
이안이 뻗은 손으로부터 하얀 빛이 흘러나와,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
그리고 늠름한 녀석의 모습과 함께, 예의 그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라바 드래곤’을 처음 소환하셨습니다.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식구를 들일 때마다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창작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이름……. 당연히 이름을 지어 줘야겠지.”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안의 표정에는 한 톨의 고민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녀석의 이름으로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인지, 곧바로 입을 연 것이다.
“그래. 네 이름은 이제부터…….”
그런데 그렇게 이름이 지어지려던 일촉즉발의 순간!
이안의 말을 다급히 가로막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자, 잠깐!
“……?”
-설마 ‘불용이’라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겠지?
떨리는 목소리.
불안한 눈빛.
라바 드래곤과 눈이 마주친 이안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너 혹시 천재……?”
-…….
“어떻게 내 생각을 읽어 낸 거지?”
방금 전까지도 불용이라는 단어를 계속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이안의 대사.
“크으, 역시 넌 불용이가 될 운명이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도 불용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 거지?”
-크르르륵! 그럴 리가 없잖아!
옆에 누군가 다른 이가 있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안은 불용이라는 이름에 완전히 꽂혀 버렸다.
본인 스스로 이미 자신의 작명 센스에 무척이나 흡족해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소환술사 인생 처음으로, 소환수의 이름을 짓는 것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불용…….”
-크롸아악! 싫다고!
띠링-!
-소환수 ‘라바 드래곤’이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해당 명칭으로 소환수의 이름을 지정할 수 없습니다.
-소환수 ‘라바 드래곤’과의 친밀도가 3만큼 감소하였습니다.
소환수가 자신의 이름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버린 것이다.
“…….”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라바 드래곤을 째려보았다.
찌릿-!
신입 주제에 감히 하사받은(?) 이름을 거부하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귀여운 이름을 거부하다니…….’
하지만 소환수가 완강히 거부하는 마당에, 무작정 불용이라는 작명을 강행할 수도 없었던 터.
이안은 다시 녀석을 설득해 보기 시작하였다.
“불용이가 마음에 안 든다면, ‘불용’은 어때?”
-대, 대체 뭐가 다른 건데?
“글자 수가 다르잖아.”
-크륵……!
“이름 너무 귀엽지 않아?”
-별로 귀엽지도 않을뿐더러, 난 귀엽고 싶지 않다, 주인!
“크흐음…….”
하지만 이안의 심혈을 기울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완고하기 그지없는 라바 드래곤.
이안은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이름은 뭔데?”
-크흠,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일단 한번 들어나 보자고.”
-크릉, 크르르릉!
이안의 물음에, 잠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 불용(?)이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라카도르’다 주인.
“음……?”
-태초부터 내 이름은 라카도르였고, 나는 그 이름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게 무슨…….”
그리고 이안이 그에 대한 어떤 반론을 제기하기도 전에, 그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띠링-!
-소환수의 이름이 설정되었습니다.
-소환수 ‘라카도르’가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소환수 ‘라카도르’와의 친밀도가 5만큼 상승했습니다.
“…….”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어이가 없어진 이안.
‘뭐 이런 건방진 소환수가 다 있어?’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이름을 돌이킬 방법은 없었고, 이안은 빠르게 현실에 순응하기로 하였다.
“후우,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크, 역시 태고부터 존재했던 나의 이름은 주인이 보기에도 멋진가 보군.
“별로 멋지지도 않을뿐더러, 난 네가 멋지길 바라지도 않아.”
-…….
“네 이름이 라카도르인지는 몰라도, 이제부터 애칭은 불용이야.”
-크윽, 싫다! 비늘이 다 오그라들어 버릴 것만 같은 그런 애칭이라니!
불용이는 계속해서 이안에게 반항하였지만, 이안의 황소고집을 꺾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포획당하지도 않았을 터.
-크롸아아악!
정신적 대미지에 발버둥치는 불용이를 뒤로한 채, 이안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녀석의 상태 창을 오픈해 보았다.
이제 사소한(?) 문제는 해결하였으니, 녀석의 능력치를 하나하나 뜯어 가며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으흐흐, 요 귀여운 녀석을 앞으로 어떻게 써 줘야 할까…….’
그리고 잠시 후.
“……!”
녀석의 상태창을 오픈한 이안은,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레벨 이거 미쳤네?”
소환수의 상태창 가장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정보인 레벨부터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으니 말이었다.
-라카도르(용암의 신룡)
레벨 : 90
분류 : 신룡
등급 : 신화
성격 : 겁이 많음
완전체
공격력 : 3,690
방어력 : 1,620
민첩성 : 1,980
지능 : 6,930
생명력 : 442,350/442,350
고유 능력
*용암의 권능(패시브)(강화)
……후략……